812장. 선과 악.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
“큼.”
청담동에 위치한 대한민국 탑을 달리는 텐프로 ‘柳’.
회원들을 가려서 받는 초특급 룸살롱에 세 남자가 모였다.
샤프한 이미지의 리앤장 이사 손대균이 샬루트 38년산 병을 들고 있었다.
그 앞에 앉아 있는 일송회 장로인 조국일보 반종현 회장과 전운택 국회의원.
두 사람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손대균이 이 불편한 자리를 마련한 장본인이었다.
그의 말처럼 그동안 격조했다.
여러 이유들 중에서도 장태산 때문에 사이가 크게 틀어졌다.
장로에는 포함되지 못했지만 일송회 자체에서 중요한 멤버로 여겨졌던 손대균의 변심.
그런 손대균을 앞에 두고 반종현과 전운택은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았다.
‘이 자식 또 뒤통수는 치는 거 아냐?’
반종현은 게슴츠레하게 실눈을 뜨고 손대균의 하는 짓을 지켜봤다.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 속내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반 회장님. 전 의원님 미안합니다. 제가 두 분보다 세상을 덜 산 탓인지 이번에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손대균이 그의 평소 태도와 어울리지 않게 사과를 했다.
이 태도는 과거와 사뭇 달라진 모습 중 하나였다.
언제나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고 웬만해서는 흐트러지지 않았던 그가 사람 좋게 웃었다.
“사과를 하니 받기는 하겠습니다만…….”
반종현이 병을 들고 권하는 손대균에게 잔을 내밀었다.
누가 뭐라 해도 손대균은 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손국중 회장이 쓰러진 상황이니만큼 리앤장을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은 손대균밖에 없었다.
“다 잊어주십시오. 뭔가에 쓰인 것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요즘 말로 이런 걸 오춘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손대균이 겸연쩍은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좀 심했죠……. 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계신 분이 일개 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서 대의를 그르쳤습니다.”
조용하던 전운택이 한마디 딱 꼬집어 던졌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앞으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합니다.”
손대균이 정중하게 두 사람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정중한 사과에 두 사람은 놀랐다.
“이제 제 잔 받으시겠습니까?”
“이렇게까지 사과를 하시니…….”
전운택도 잔을 내밀었다.
“회주님께서 저에게 장로직을 내려주셨습니다.”
잔을 채우며 가볍게 입을 여는 손대균.
“헛!”
“진짜요?”
두 사람은 예기치 않은 손대균의 말에 진심으로 놀라며 재차 물었다.
아직까지 회주에게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손국중 회장이 변고를 당했으니 자연스럽게 장로직은 계승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손대균의 경우는 얘기가 좀 달랐다.
분명 손대균의 변심은 회주를 분노케 했다.
“넓은 아량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두 분께서도 저의 과오에 대해서 잊어주십시오. 이 사람 손대균은 앞으로 일송회를 위해 뼈와 살을 바칠 겁니다.”
대단한 각오를 내비치는 손대균의 발언.
“회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축배를 들어야지요. 장로직을 맡게 된 걸 감축드립니다. 손 장로님.”
반종현이 먼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축하를 했다.
신비한 능력을 소유한 회주가 변심한 전과가 있는 손대균을 용서하고 장로직에 봉했다면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손 장로님. 제 잔도 받으셔야죠.”
전운택도 일거에 의심을 거두었다.
손대균의 손에 들려 있던 술병을 건네받았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손대균의 지난 과오는 잊어주는 게 맞았다.
회주는 장로에 불과한 자신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선인과 같았다.
괜한 일로 회주에게 밉보일 필요가 없었다.
“두 분께 감사합니다.”
또로로록.
전운택이 손대균의 잔을 채웠다.
그렇게 채워진 세 사람의 술잔.
“이런 분위기 오랜만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손 장로님과 이런 술자리를 가져본 지가 한참 과거였습니다.”
“앞으로 종종 이런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와인바에서 말입니까?”
“아닙니다. 저도 앞으로는 양주를 마실 생각입니다.”
“오! 그래요.”
양주라는 말에 반종현과 전운택의 얼굴에 희색이 비쳤다.
그동안 손대균은 철저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와인은 그런 면에서 손대균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다.
“도원결의에는 못 미치지만 오늘 이후로 나 손대균은 일송회와 회주님의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할 것이며 두 분의 장로님들과 생사(生死)를 같이할 것을 엄숙히 맹세하는 바입니다.”
뜨거운 다짐을 담담하게 선포하는 손대균.
“손 장로가 유비하십시오. 전 관우할랍니다.”
“그럼 제가 장비입니까? 오늘 말술을 마셔야겠습니다. 하하하하하하.”
긴장감이 돌았던 분위기가 풀리며 유쾌한 대화가 오고갔다.
“일송회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먼저 선창을 하는 손대균.
“위하여!!!”
세 사람은 목소리를 높여 거침없이 외치고 단숨에 잔을 비워냈다.
“크으…….”
“오늘따라 술맛이 죽입니다.”
단숨에 잔을 비운 일송회의 장로들.
“회주님께서 장태산 일을 직접 맡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니 두 분께서는 저와 같이 회주님을 보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요?”
“그거 잘됐습니다. 장태산 그놈이 보기보다 아주 날쌘 여우입니다.”
장태산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는 손대균의 말에 반종현과 전운택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했다.
“아버지와 아들 녀석이 저렇게 쓰러지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손대균의 진심이 느껴지는 아픈 고백.
“그래야죠. 어떻게 세운 손씨 가문입니까.”
“걱정 많이 했습니다.”
“이제 술도 한 잔 돌았으니 화끈하게 노셔야죠. 제가 특별히 조 사장에게 부탁해 놨습니다.”
“그럴까요?”
“흐흐. 손 장로님이 이제야 우리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변했어요. 변해.”
반종현과 전운택의 눈동자에 감춰져 있던 욕망이 순식간에 드러나며 번들거렸다.
지금까지는 이들과 함께 어울려도 여성을 동석하지 않고 양주도 마시지 않았던 손대균.
삐잇.
그가 나서서 테이블 위의 벨을 눌렀다.
스르르르.
약속돼 있었는지 방음이 잘된 룸의 문이 열렸다.
또각또각.
한눈에 봐도 앳되고 예쁜 아가씨 세 명이 들어왔다.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외모와 분위기.
“새로 들어온 아이들입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뒤따라 들어온 ‘류’의 조 사장이 인사만 짧게 하고 바로 물러났다.
“뭣들 해. 알아서 모셔.”
손대균의 차가운 명령.
파바밧.
짧은 시간 이미 자기 스타일의 여성에게 시선을 보내는 반종현과 전운택.
여성들이 눈치를 채고 알아서 옆자리에 가 앉았다.
당연히 손대균 옆에도 미모의 여성이 다가와 착석했다.
그 순간.
와락.
“어머~.”
손대균이 반쯤 드러난 여인의 허리를 한 팔로 꺼칠게 당기며 끌어안았다.
“오늘…… 끝까지 가는 겁니다!”
반종현과 전운택을 바라보며 뜨거운 시선을 보내는 손대균.
“오늘 마음껏 달려봅시다!”
“하하하하하하하.”
만족감이 충만하게 가득 찬 룸.
손대균도 흡족한 듯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
그러나 그의 깊은 눈동자에 순간 비치고 사라진 한광.
룸 안의 누구도 그 번득임을 눈치 채지 못했다.
***
“맛있죠?”
“오랜만입니다. 이런 분위기.”
“정말요?”
강남에 위치한 유명 연예인이 운영한다는 포차.
한쪽 구석 테이블에 앉아 불떡볶이와 곱창전골을 먹었다.
밥을 산다고 한 문효진이 선택한 메뉴.
나름 연예인이라고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선택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모자를 눌러쓴 채 활짝 웃는 문효진.
진하지 않은 가벼운 화장이 그녀를 더 빛나게 했다.
“맛있습니다.”
“그렇죠? 이게 마약떡볶이라니까요. 열 받을 때 불떡볶이 한 접시 먹으면 스트레스가 화끈하게 풀린다니까요. 그리고 여기 소곱창 보이시죠? 마장동에서 직접 사장님이 떼어 온 한우곱창이에요. 얼큰한 국물과 어울리는 쫄깃한 식감이 예술이거든요.”
국자로 내용물을 떠 보여주는 문효진.
보기보다 털털했다.
조연으로 출연했던 드라마에서 도도한 대기업 회장의 딸 역할을 했었는데 그 이미지와 많이 달랐다.
자체발광 연예인 포스.
주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그런 문효진과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연예인들이 자주 오는 듯 큰 관심은 갖지 않았다.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나누는 청춘들.
꽤 젊은 층의 사람들 이외에는 나이든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진하게 한잔하고 한번 먹어봐요.”
문효진이 소주잔을 들고 웃었다.
팅.
잔을 부딪쳤다.
쾌활하고 명랑한 문효진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술자리.
단숨에 소주잔을 비웠다.
쌉싸름한 주향이 목젖을 타고 넘어갔다.
“크읍.”
조용히 입을 틀어막고 술 맛을 음미하는 문효진.
수저에 곱창과 국물을 떠 나에게 내밀었다.
“아. 해보세요. 선배님 의외로 숫기가 없는 것 같아요.”
문효진이 주저하는 나를 보며 배시시 웃는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손 아파요.”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문효진은 제법 귀여웠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내민 안주를 받아먹었다.
이런 친절함 처음이다.
“맛있죠?”
쫄깃한 곱창과 청양고추가루와 매운 고추가 들어간 국물이 입안에서 기분 좋게 조화를 이뤘다.
이름만 포차지, 비싸기로 소문난 강남의 맛집답게 재료도 훌륭했다.
“크으. 맛있어.”
다시 수저를 냄비에 넣어 국물과 곱창을 건져 자신의 입에 넣는 문효진.
한 술 뜨고 또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내 입에 들어갔다 나온 수저인데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런 눈으로 안 봐도 돼요. 드라마나 영화 찍다보면 이런 일 허다해요. 짓궂은 감독님들과 선배님들이 너나할 것 없이 먹던 수저로 막 퍼줘요. 그래도 오늘은 좋아요. 선배님이랑 한 수저를 쓸 수 있어서~.”
문효진이 순수한 얼굴로 웃는다.
웃는 모습이 참 매력적이다.
지난 생에는 그저 그런 배역을 맡다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브라운관에서 사라졌던 그녀.
연예계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원래 그렇게 성격이 좋습니까?”
“먹고 살려고 변했어요. 어릴 때는 다들 말하는 연예인병에 걸려 한 까칠했는데. 이쪽 판에 들어와 보니 저 같은 건 흔한 돌멩이처럼 널리고 널렸더군요. 소속사도 크지 않으니 열심히 눈치껏 살아남아야죠.”
나이는 나보다 어렸지만 문효진은 어른이었다.
웃고 있는 얼굴 뒤에 감춰져 있는 씁쓸한 표정이 눈빛에서 드러났다.
언제까지나 처음 품었던 순수한 동심의 마음으로 살 수는 없는 세상.
스윽 병을 들었다.
“그래서 술이 존재하는 겁니다. 한 잔 술에 고뇌를 잊고 하루하루 버텨가는 맛도 괜찮습니다.”
“선배님도 고민이 있어요?”
두 손으로 술을 받는 문효진.
내 입장이 궁금한지 물어왔다.
“저라고 매일 매일이 꽃길만 걷겠습니까.”
“부자시잖아요.”
“아셨어요?”
“그럼요. 관심 있어서 여기저기 여러 인맥을 통해 알아봤어요. 저 지금 선배님께 작업 거는 거예요.”
농담을 진담에 섞어 직구로 날리는 문효진.
당돌한 척했지만 눈동자가 떨리는 게 다 보였다.
저건 설렘이 아니라 갈등.
“넘어가줘요?”
“정말요???”
“그런데 떡볶이와 곱창전골에 넘어 가기에는 제가 좀 비싼데.”
“그럼 어떻게 하면 넘어 오실 건데요?”
문효진은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나왔다.
고개를 앞으로 쭉 내밀며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법학과 주차장 차 안에서 맡았던 그녀만의 은은한 체취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효진 씨 스스로 빛나면 됩니다.”
“네?”
갑작스런 나의 대답에 의문 가득한 눈빛을 보이는 그녀.
“작은 선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행하지 않거나, 작은 악을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행한다면……. 그것들이 소리 없이 쌓이고 쌓여 그 사람을 삼키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안에 빛나던 보석은 빛을 점차 잃게 됩니다. 효진 씨는 선과 악, 지금 두 갈래 길 중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