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장. 거인의 조언(2).
- 너 잘 생각해라. 이거 엄청난 기회다. 오정패션 부분 광고 따는 게 쉬운 일 같아? 우리 같은 중소 기획사는 국물도 없어. 그걸 이렇게 잡아온 거야.
“네…….”
- 긴 말 않을게. 자존심 버려. 네가 한국대 타이틀 달고 있지만 확실한 캐릭터성은 없잖아. 집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
- 한 번만 눈 딱 감아라. 너 하나 뜨면 같이 고생한 회사 식구들도 인생 한 방에 빛 볼 수 있다. 너 늙을 때까지 회사 대표로 쭉 세워줄게. 나 그렇게 인간말종 아니다. 너도 알다시피 그동안 스폰 들어온 거 칼같이 잘라줬잖아.
대표의 거듭되는 설득에 문효진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요즘 들어 회사 사정이 많이 어렵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내세울 만한 대표 배우가 자신밖에 없었다.
소속된 연기자들 대부분이 신인들.
이제 겨우 몇 개 프로그램을 거쳐 조연 자리를 딸 정도다.
그런 시점에 들어온 거절하기 힘든 제안.
1차 장태산과의 접촉은 이루어졌지만 그 뒤로 전혀 연락을 하거나 만남을 시도하지 못했다.
마음에서 계속 거부감이 들었다.
직접 부딪혀본 장태산은 꽤 괜찮은 사람이고 남자였다.
접촉 사고 처리 후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연락을 해오거나 집적거리지도 않았다.
그런 그와 상관없이 압력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도 없었다.
방영 중이던 드라마도 끝났다.
‘한국대 얼짱 미녀’라는 타이들을 이용한 대중들의 관심 끌기도 금방 잊혀질 게 뻔했다.
- 열흘 주마. 그 안에……. 크게 터트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
상대가 원하는 건 장태산과의 화려한 로맨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는 몰랐다.
대중들에게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장태산을 광장으로 끌어내려 안달이 난 듯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스캔들이 터지면 자신도 감당 못 할 파장이 일 것을 문효진도 눈치 챌 정도다.
“최선을 다할게요.”
- 그래. 최선을 다해봐. 아버지 사업도 어렵다며? 그동안 키워주신 은혜라도 갚으려면 그나마 돈으로 갚는 게 최고다.
문효진의 아픈 곳을 은근슬쩍 건드리는 소속사 대표.
“…….”
문효진의 커다란 눈망울에 금세 이슬이 맺혔다.
이러려고 한국대에 진학할 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고 노력해 배우가 된 게 아니었다.
그녀가 꿈꾸던 자신의 앞날에 이런 더러운 세상은 결코 없었다.
-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다들 이렇게 살아. 독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어. 그런 바닥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건 인생 선배로서 알려주는 충고야.
“네…….”
- 그래. 효진이 넌 똑똑하니까 잘할 거다. 여름 광고 찍어야 하니까 식단 관리 잘하고. 수고해라.
- 들어가세요.
통화가 끝났다.
“하아아.”
문효진은 가슴이 답답해 깊은 한숨을 토했다.
누가 봐도 이번 역할은 꽃뱀.
결코 내키지 않았지만 대표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현실이 악몽 같았다.
상대 쪽에서 제안한 조건은 독인 줄 알면서도 먹을 수밖에 없는 독사과나 마찬가지였다.
일만 성사되면 계약금이 억 단위 이상 통장에 꽂힐 터.
자금이 꼬여 사업 운영에 힘들어 하는 아빠를 도울 수 있게 된다.
문효진은 갈등하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저장되어 있는 장태산의 번호.
정작 어떻게 해야 할지 문효진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내면에서 회오리치는 선과 악의 싸움.
문효진의 초롱초롱했던 눈빛은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
해현경장(解弦更張).
거문고의 줄을 다시 고쳐 맨다는 뜻.
“장 회장 나이 때라면 어울리는 말이지. 나처럼 곧 갈 날이 멀지 않은 나이가 되면 붓을 들고 무얼 그려내야 할지 고민할 시간도 아까워.”
임성철 회장의 말이 귀에 쏙쏙 박혔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온 존경할 만한 대선배의 조언.
경청했다.
“손대균이 변할까 두렵다고 했지.”
“네.”
“그가 변한다고 달라질 게 있나?”
“…….”
“어차피 인생은 각자 사는 것이야. 손대균이 선택한 운명은 스스로의 것. 그가 짊어져야 할 업의 짐을 왜 장 회장이 대신 지려고 하나? 그거 오지랖이야.”
오지랖.
비수 하나가 심장을 관통하는 듯했다.
“다들 내가 대한민국을 암중에서 조종한다고들 말하지. 10% 정도는 맞고 나머지는 사실과 다른 말이야. 난 그럴 능력도 마음도 없어.”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을 일체 부정하는 임성철 회장.
“사실 한때는 정말 대한민국을 조종해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네. 선친 때부터 처먹인 돈이 얼마인데 일이 터지면 안면을 바꾸는 정치인들과 권력자들에 환멸을 느꼈지. 그래서 남는 돈 풀어 다른 밭을 일궜네. 그게 바로 세상에 알려진 오정 장학생의 시초지.”
창밖을 내다보며 숨겨진 이야기를 풀어내는 거인.
“처음에는 마음대로 됐어. 돈 푸니까 다들 꼬리를 얼마나 흔들어 대던지……. 머리통인 대통령만 빼고 대부분 내 아래 둘 수 있었어.”
세대를 거듭하며 오정이 뿌려온 정치자금은 천문학적일 것이다.
비자금으로 조성한 현금을 트럭으로 배달했다는 오정의 배짱.
중진 이상의 의원들이나 고위직 관료, 언론인들 중에는 오정이 뿌린 그물 같은 자금 수혈에서 자유로울 인간이 몇 명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말이야……. 어느 날 깨달았네. 이 자식들의 배는 결코 채울 수 없겠구나. 인간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확증이 불가능하구나……. 목을 쳐도 잡초처럼 다시 고개를 들겠구나 깨달았네. 그리 어려운 이치도 아니었는데…… 내가 무지했어.”
거인의 말에는 타락한 권력자들에 대한 모든 인상들이 담겨 있었다.
나도 경험했던 그들의 파렴치함.
“장 회장. 태양과 달, 빛과 어둠처럼 우주는 조화를 이뤄 유지되는 법이야.”
뒷짐을 지고 밖을 감상하던 거인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오정의 정보력으로 마음에 안 드는 정치인들 보내기는 쉬워. 하지만 그 자리는 금세 메워지네. 특히 믿었던 자들은 꼭 배신을 때렸지. 자네니까 하는 말이지만 장한수 실장도 난 믿지 못해. 수많은 거래자들 중에 그나마 신용이 두터운 한 인간일 뿐이지.”
임성철 회장이 진심을 밝혔다.
“가족도 마찬가지야. 아내는 나보다 새끼들을 더 먼저 챙겨. 어차피 우리가 사랑으로 사는 나이는 아니지 않겠나. 자식도 마찬가지야. 하늘이 촌수를 정한 이치처럼 딱 그만큼 거리가 있어. 다 컸다고 욕심 내는 모습을 보면……. 나를 물어뜯으려 했던 경쟁자와 별반 다르지 않네.”
거인은 냉정하게 주변 세상을 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공감되기도 했다.
나 또한 최측근들과 모든 걸 공유하거나 사적인 것을 공개하지는 않는다.
가족 간에도 어느 정도 선을 지켰다.
괜히 세세하게 알아봐야 없던 욕심만 일뿐.
“장 회장, 꿈이 뭔가?”
길게 말을 잇다 잠시 멈추고 훅 던지는 질문.
“그 질문은…… 과거에 제가 회장님께 한 질문 아닙니까?”
“흐흐. 인생은 돌고 도는 법이야. 말해봐.”
“…….”
순간 입이 굳었다.
꿈 속 할배 덕에 끝나 버린 인생이 회귀로 재생되고 있었다.
그 할배가 숙원처럼 던져준 이웃집 개들을 교육시키는 일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
더불어 돈 벌어 가난하게 살던 가족과 내 주변 지인들을 챙겼다.
누가 봐도 전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하지만 꿈은…….
“거봐. 쉽게 입 못 열겠지? 흐흐.”
임성철 회장이 고소해하며 웃었다.
“그래서 거문고 줄을 다시 매는 것이야. 긴장이 풀어지고 느슨해지는 순간 잡생각이 침범하는 법. 그때 나를 뒤돌아보고 느슨해진 자세를 다시 바로잡아야 앞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어. 폭풍이 불기 전에 선원들이 돛 줄을 점검하는 것과 같지. 인생도 마찬가지야. 순간순간 타인으로 인해 괴롭고 힘들면 그때는 나를 뒤돌아보면 돼. 그 안에 해답이 있는 법이야.”
“!!!”
찡 하고 머리가 울렸다.
손대균에 대한 인간적인 감정으로 잠시 마음이 흐트러졌다.
아무리 회귀한 인생이라지만 겨우 30대를 살다 중도하차한 나였다.
신들에 의해 그들의 기억들을 빌려 쓸 수는 있었지만 직접 경험하며 축적한 삶인 아닌 이상 살아있는 지혜라 할 수도 없었다.
인간으로서 무한히 성장하기 위한 삶의 경험.
그때마다 얻게 되는 인생철학의 부재.
보통 같은 나이 대의 사람들보다 더 일찍 성장에 따른 고통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고통에 오늘 거인이 알맞은 처방을 줬다.
“인생……. 살면 살수록 오묘해. 이 정도면 여한이 없다 싶지만 어느 순간 다시 희로애락(喜怒愛樂)에 빠져 허우적거려. 지금도 마찬가지야. 장 회장 만나기 전까지 이제 끝날 때가 됐구나 싶었는데 몸이 건강해지니 다시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려. 정말…… 알 수가 없어.”
풍진(風塵) 같은 인생사를 말하는 거인의 회한 가득한 말.
거인은 어느 틈에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나 또한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그 나이 때는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그리고 손대균 만만하게 보지 마. 그가 아버지의 길을 선택했다면 그 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장 회장은 장 회장 인생을 살아. 만약 손대균이 걸리적거리면…… 과감하게 베어버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살고 있는 그 목숨은 장 회장 인생이잖아.”
날 시퍼렇게 선 거인의 조언.
꿈틀, 심장의 잔 근육이 팔팔하게 움직였다.
손대균은 직접적으로 나에게 해를 주지 않았다.
누구보다 날 잘 알고 있는 손대균.
오경석 부장의 죽음에 있어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터.
뭔가를 해보려 해도 결정적으로 카르마 포인트가 부족했다.
손대균이 흑화됐다면 그 뒤에 최상급 악신이 버티고 있을 수 있었다.
선신들처럼 악신들도 인간 세상에 개입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우주의 법칙에 모든 존재들이 영향을 크게 받았다.
손국중처럼 뚜렷한 악인들을 처단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포인트가 필요했다.
능력이 차고 넘치는 나여도 무조건 악인들을 처단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근기에 따라 레벨이 낮은 축에 속하는 인간들이라면 모를까 상대해야 하는 존재들에 따라 수준들이 달라졌다.
마법과 주먹이 능사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싸잡아 엎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거인의 말처럼 어둠 속에서 악인의 뿌리는 더 빠르게 자라고 신속하게 퍼져 나갔다.
태양과 달, 빛과 어둠처럼 미묘하게 조화를 이뤄 유지되는 우주의 법칙.
아직 나는 그 거대한 법칙 안에서 미약하기 그지없는 한 인간에 불과했다.
“깨달음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도움 좀 됐어?”
“물론입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앞으로 뭘 할 생각인가?”
“하던 거 계속하려고 합니다.”
“뭐?”
“비밀입니다.”
“내 밑천은 털어가고 본인 비밀은 열지 않겠다? 대단한 사업가야.”
“솔직히 말해보십시오. 방금 전 해주신 조언……. 회장님께서 직접 깨달은 건 아니시죠?”
내 말에 흠칫 몸을 떠는 거인.
“티 났어?”
“물론입니다. 제가 아는 회장님은 그렇게까지 세밀하게 삶을 관찰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귀신같은 녀석.”
“누굽니까?”
“우리 아버지.”
“아!”
“오정반도체 시작할 때 엄청 고민 많았다. 임원들이라는 작자들은 한 번도 가본 길이 아니라고 얼마나 반대를 하던지……. 일본이 다 점령하고 있는 판에 무슨 반도체냐고 하더라. OEM 방식으로 TV나 만들자고 우겨댔지. 나도 고민 많이 했다.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틀린 건지……. 그때 병석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그러시더라. 흔들릴 때는 밖의 말보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확신이 서면 그때 과감하게 밀어붙이라고. 망하면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라고 시원하게 답을 주셨다.”
거인이 거인을 키우는 법.
오늘의 오정이 그냥 있는 게 아니었다.
과감한 도전과 승부가 없었다면 그저 그런 2류 기업에 머물다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장 회장.”
“네. 회장님.”
“한 20년쯤 됐을 거야. 외국에 나가서 제법 잘나가는 월가 작자와 밥을 먹었어. 비싼 돈 내고 컨설팅이라는 걸 받았는데 그때 그 작자와 나눈 대화가 참 재미있었어.”
“어떤 대화였습니까?”
“내가 한참 투자자본이 많이 들어가 힘들 때였는데 그때 흘러가는 말로 그랬거든 ‘돈 걱정 안 하고 살고 싶다’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그 친구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모르겠습니다.”
“나보고 ‘돈은 잘 있으니까 걱정 말고 너나 걱정해라.’ 크크크.”
굵직한 뼈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쓸데없는 걱정 말고 눈앞에 닥쳐 있는 현실에 충실하라는 소리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런데 이곳은 뭐 하는 곳인가? 어째 전기선이 왜 하나도 안 보여? 밖이 어지간히 추운 것 같은데 또 여긴 따뜻해. 히터도 안 보이고……. 저 천장에 박혀 있는 조명들과 문양들은 뭔가?”
임성철 회장이 이제야 실내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궁금하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일.
현대 과학 문명은 거의 가미되지 않은 나의 성.
“마법입니다.”
“응? 뭐라고?”
거인이 농담인 줄 알고 되물었다.
하긴 쉽게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잠시 뒤 임성철 회장은 크게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싱긋.
가만히 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누가 봐도 역전된 상황.
“회장님. 제가 21세기 대마법사입니다.”
“!!!”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