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장. 거인의 조언.
“엄마! 말 좀 해보세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세상에 아빠 목숨을 남에게 맡기다니요. 세상 사람들이 알면 오정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오정의 안주인이 거주하는 삼성동 대저택.
임아현 부사장의 뾰족한 목소리가 집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언니. 목소리 좀 낮춰줄래. 엄마 귀 안 먹었거든!”
“이게 어디서 따박따박 끼어들어! 넌 빠져!”
“내가 왜? 나도 엄연한 오정 그룹의 주주이고 경영자야!”
“니가 뭘 알아!”
“언니는 그럼 뭘 그렇게 많이 아는데?”
“야! 임윤아!”
“왜! 임아현!”
두 자매 사이에 언성이 높아졌다.
“그마아아안!”
지끈지끈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황라현이 소리쳤다.
“…….”
그제야 조용해진 공기.
“아현아, 말 좀 가려서 해라. 그리고 윤아도 언니한테 그러면 못써.”
언제나 차분한 임아진이 두 여동생을 나무랐다.
“언니는 이 상황이 이해 가? 아직 멀쩡히 살아계셔. 그런데 생판 남에게 아빠 목숨을 맡겼잖아. 그러다 무슨 일 생기면 어떻게 할 거야?”
“태산 씨가 왜 남이야. 아빠도 인정했어.”
“이게 이렇다구. 남자한테 완전 미쳤네. 부부도 헤어지면 남이야. 그런데 장태산과 넌 무슨 관계인데? 뭐 약혼이라도 했어?”
다시 불붙은 자매의 대화.
“둘 다 그만해.”
조용히 듣고 있던 임준형이 한마디했다.
“오빠는 무슨 생각으로 허락한 거야? 장남에 차기 오정을 이끌 오빠까지 왜 말도 안 되는 일에 장단을 맞춰?”
급기야 임아현은 오빠인 임준형까지 추궁했다.
갑작스럽게 가족 모임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중요한 일임을 직감하고 본가로 달려왔다.
식사 후 간단한 다과를 나누다 듣게 된 이야기.
아버지 임성철 회장이 장태산이 운영하는 장주시 연구소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리였다.
오정 병원에서도 회생은 장담할 수 없는 상황.
겨우 목숨만 연장하고 있던 상황의 임성철 회장이 장태산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아버지가 원했다.”
“뭐? 아빠 상황이 어땠는지 알면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아빠가 어떻게 의사표시를 해.”
툭.
발끈하는 임아현 앞에 서류 하나가 던져졌다.
맨 앞장에 여러 명의 변호사들 이름과 도장이 찍히고 공증까지 거친 서류였다.
‘유언장?’
언뜻 서류를 본 임아현은 예민했다.
아직 살아 계셨기에 유언장은 공개되지 않았다.
일찍부터 오빠 임준형을 중심으로 한 승계 플랜이 가동된 것을 알고 있지만 아직 기회는 남았다.
“유언장 아니다. 그러니까 기대하지 마.”
“내……가 언제 기대를 해!”
아닌 척 발끈하며 임아현은 서류 내용을 살폈다.
생각했던 것보다 간단한 내용.
[2013년 7월 3일 오전 11:00분 회장 집무실에서 작성.
- 나 임성철은 깨어날 수 없는 중대 변고 시 장태산에게 모든 치료를 위임한다.
- 사망에 이를 시에도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다.]
분명 자필로 작성된 임성철 회장의 메모가 첨부돼 있었다.
내용은 길지 않았지만 충격적이고 파격적이었다.
오정 회장이 가족도 아닌 한 개인에게 일신의 치료를 모두 맡겼다.
대한민국 의료계 최정상이나 진배없는 오정 병원에 의탁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사였다.
“위조 아냐?”
임아현은 누구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룹 고문 변호사들이 각 한 부씩 보관했다 가져온 거다.”
침묵하고 있던 황라현이 조용히 답했다.
“왜 이제서?”
“날짜까지 지정했단다. 네 아빠 치밀한 거 몰라?”
아내도 모르게 변호사들을 통해 날짜까지 확실하게 명시해 놓은 임성철 회장.
“그러니까 왜 장태산한테 맡긴 거냐고. 그 자식이 의사야?”
도통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는 임아현.
“언니, 장주시 연구소에 대해서 모르지?”
“그깟 연구소가 뭐!”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임윤아가 비웃듯 임아현을 쳐다봤다.
“시골 촌구석 개인 연구소가 뭐가 어쨌다는 거야! 아무리 애써보라고 그래. 오정연구소만 하겠어?”
“하아아……. 저렇게 감이 떨어져서야.”
“뭐라고?”
“언니, 잘 들어둬. 장주시 연구소는 세상을 바꿀 기술 혁명이 일어날 창조 구역이야. 연대를 비롯해 엘자그룹 회장님들이 그곳에서 개발되는 기술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구.”
“…….”
임윤아의 말에 임아현은 말문이 닫혔다.
장주시 연구소에 관한 얘기는 들었지만 크게 관심은 갖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임아현에게 중요한 건 그룹 지배 관계가 전부.
“가족회의로 결정했다. 그러니까 토 달지 말고 입 조심해.”
임준형이 일방적 통보처럼 지시했다.
“난 인정 못 해! 내가 가서 아빠 상태 직접 볼 거야!”
임아현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툭.
그때 임준형이 옆에 있던 서류 봉투에서 뭔가를 하나 더 꺼내 던졌다.
“봐.”
“이건 또 뭔데?”
“장태산이 내민 담보.”
“담보?”
‘도대체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지켜보고 있는 가족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스윽.
서류를 들고 살펴보는 임아현.
삭제된 앞부분을 빼고 여러 그래프 수치들이 보였다.
“짜증나게 하지 말고 이게 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봐.”
“오정전자 주식 지분표.”
“???”
“언니, 아직도 몰라? 태산 씨와 연관 있는 오정전자 주식 분포도야. 해외에 있는 알 수 없는 주식 계좌. 비율은 정확히 25%.”
“헛!”
25%라는 말에 임아현이 신음을 토했다.
가족들 누구도 25%에 달하는 양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임성철 회장만이 겨우 몇 %를 소유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나머지는 다른 계열사를 통해 우회적으로 오정을 통제했다.
장태산이 내민 25%는 말 그대로 엄청난 파급력을 갖게 된다.
“이, 이걸 믿어?”
임아현은 끝까지 저항했다.
“안 믿으면 어쩔 거야? 아빠가 확인한 공증도 있는 마당에 막을 명분이 있어?”
임윤아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몰아붙였다.
“…….”
할 말이 없는 듯 입술을 깨무는 임아현.
“손주혁 날아간 거 알지?”
“!!!”
임준형 입에서 툭 튀어나온 이름 석 자.
손주혁이란 이름에 임아현이 깜짝 놀랐다.
“적당히 놀아라. 주 서방이 모를 거라 착각하지 마. 동서일보 정보 수집 능력도 장난 아니다.”
순간 임아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정보에 의하면 이번 손주혁 사건…… 장태산과 연관돼 있다.”
“지, 진짜?”
불과 얼마 전 손주혁이 느닷없이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넌 나를 오빠로 보긴 하는 거냐? 내가 바보로 보여? 그러니까 조용히 네 일이나 잘해.”
여러 의미가 담긴 임준형의 말.
오정의 차기 황제도 다루기 힘든 장태산을 더 이상 건들지 말라는 경고였다.
‘장태산……. 내가 널 절대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괜한 오기가 발동하는 임아현.
두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도대체 그 계집은 뭐 하는 거야?’
임아현은 미리 던져 놓은 폭탄을 떠올렸다.
아직도 별다른 움직임 없이 꿈쩍하지 않고 있는 장태산을 옭아맬 그물.
한 번 더 추궁해야겠다고 이를 갈았다.
***
“괜찮으십니까?”
“나? 으흐흐흐. 한숨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아. 아주 개운해.”
거인이 깨어났다.
대한민국이 아닌 낯선 러시아 사하공화국의 내 비밀 왕성에서.
“컨디션은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서 신기해. 널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봤지? 그리고 잠깐 눈을 감은 것 같은데……. 이곳은 어디야?”
큼지막한 창밖으로 보이는 광활한 벌판.
아직 눈이 잔뜩 쌓인 벌판과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산등성이는 임성철 회장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사하공화국입니다.”
“러시아에 있는 그 사하공화국? 한국이 아니야?”
“네.”
“어떻게 데려온 거야? 날 한국에서 보내줬어?”
“영업비밀입니다.”
“…….”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는 임성철 회장.
성수와 화타의 침, 내공으로 그를 전보다 건강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빼내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장주시 연구소에서는 수시로 러시아에 물자를 실어 보냈다.
장한수 실장을 통해 공항에 손을 썼다.
러시아에서는 무조건 무사통과.
자가용 비행기를 이용해 바로 이곳으로 이동해 왔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임성철 회장은 갑자기 시원한 광소를 터트렸다.
누가 들어도 충만한 행복이 절로 느껴지는 웃음.
“야! 이게 얼마 만에 맞는 자유냐? 내가 고등학교 시절 가출할 때 빼고, 이렇게 통쾌한 적이 없었다. 아우! 공기가 달라. 아주 달아!”
“그렇게 좋습니까?”
“자유다! 자유! 그놈의 회장, 남편, 아빠, 기업인이 아니야. 장 회장. 나 여기서 마음껏 백수해도 되지?”
길고 긴 세월 동안 임성철 회장을 짓눌렀던 사회적 지위와 책임, 지켜야 했을 체면.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한껏 들뜬 모습을 보였다.
“오정 걱정 안 되십니까?”
“네가 있잖아.”
“회장님, 저 너무 믿으시면 안 됩니다. 생각보다 냉정한 투자가입니다.”
“됐어.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그 ‘냉정한’이라는 말은 못 믿겠다. 크크.”
임성철 회장이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오정…… 가업 아닙니까?”
“나한테 오정은 미실현 이익과 같아.”
“네?”
“장 회장 자네 말대로 가업이잖아. 그렇다고 값이 오른다고 팔아서 이익을 실현할 것도 아니잖아.”
너무나 지당하고 쿨한 답변이다.
“뭘 그렇게 봐? 장 회장 자네도 나 같지 않나?”
“어떤 의미로 말입니까?”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했던 인물답게 오는 질문도 선문답 같았다.
“자산 임계점을 넘었잖아.”
“…….”
“인공위성이 지구 대기권을 뚫고 나갈 때야 있는 방귀 다 뀌지만 정상궤도에 안착하고 나면 무중력 상태에서 편하게 떠 놀고먹잖아. 나도 그래. 10년 이상 걱정 안 해도 될 만큼 오정은 안전한 궤도에 올랐어. 나머지는 자식들 능력이지.”
임성철 회장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어느 순간 나도 자산의 임계점을 넘었다.
우주에 뜬 인공위성의 눈이 지구를 말없이 바라보듯 나의 눈에 쌓여가는 자본은 수시로 변하는 숫자에 불과했다.
인간의 영역에서 그 큰 수치를 사용할 일들이 많지 않았다.
물론 쉬지 않고 돈은 계속 돌고 또 돌고 있었다.
그러나 차일드 가문에 비하면 아직도 한참 모자랐다.
아무리 회귀한 인생이라 해도 채 10년도 되지 않은 경력.
그 짧은 기간의 경제 활동이 수백 년 동안 지구에서 1등을 먹은 자의 경제 활동과 맞짱 뜰 만한 수준은 못 됐다.
특히 야훼가 차일드 가문을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
차일드 가문의 신빨과 돈빨은 회귀빨로 눌러 보려 해도 비비기 힘들다.
“저거 4륜구동 맞지?”
창밖에 보이는 지프.
“네.”
“고놈 참 야물게 생겼다.”
자동차 광이라 알려져 있기도 한 임성철 회장.
“타보고 싶으십니까?”
“당연하지. 내가 자동차를 참 좋아해. 나이 먹어서 점잔 빼느라 푹신한 뒷좌석에 앉아 다녔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남자의 로망은 스포츠카와 지프지.”
임성철 회장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넘쳤다.
“마음껏 타셔도 됩니다.”
“여기는 기자 나부랭이들 없지?”
“이곳에서는 회장님이 원하시면 모든 게 자유입니다. 여자 빼고.”
“여자는 됐어. 내가 지금 한창 때도 아니고 의미 없어.”
임성철 회장이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며 활짝 웃었다.
“지하 주차장에 차키 몇 개 있습니다. 보시고 골라 타십시오.”
“장 회장, 고마워.”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아니야 진심이야.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이 자유……. 난 죽어서도 찾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내 몸이 내 거가 아니잖아.”
거인은 그간 살아온 자신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의 말처럼 됐을 것이다.
“마음껏 누리십시오.”
“공짜는 싫어.”
“오정 주식 주시려고요?”
“그건 우리 애들 몫이고. 장 회장 줘봐야 티도 안 나잖아.”
“그럼 뭘 주시겠습니까?”
“조언.”
“조언요?”
“내 인생 아카이브에서 삶의 지혜를 꺼내 장 회장을 도와주지. 그걸 원하는 게 아니었나?”
역시 무서운 분이다.
단박에 내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부분을 짚었다.
아무리 회귀한 인생이라 해도 연륜이 묻어날 만큼의 삶을 살지 않은 입장.
그 부족한 부분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맞습니다.”
“말해봐. 장 회장 자네 고민이 뭔지.”
지그시 날 바라보는 거인.
방금 전까지 잠들어 있던 사람 같지 않았다.
“손국중을 날렸습니다.”
“친일파 앞잡이 손국중을! 하하하하하. 그거 참 쌤통이구만.”
호쾌하게 임성철 회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뭐?”
“손대균 이사가 손국중 회장이 걸었던 길을 갈 것 같습니다. 인간적으로…… 안타깝습니다.”
“흐음.”
금세 생각에 빠지는 임성철 회장.
“두 사람 친하다고 하더니……. 괴롭겠군.”
“네.”
“장 회장, 그럴 때는 말이야…….”
내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거인이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밖을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를 보며 해현경장(解弦更張)해야 하는 법이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