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8장. 휴전 끝나다.
회귀의 전설 2부
“빌어먹을……. 손씨 가문 새끼들!”
부아아아앙.
흰색 BNW 차량이 도로 위를 빠르게 질주했다.
제한속도를 훌쩍 넘었다.
앞을 막아서는 차량들을 칼치기로 가볍게 재꼈다.
끼이이잇.
코너에서도 속도는 줄지 않았다.
하체가 단단한 BNW답게 굉음을 토하면서도 접지력을 잃지 않았다.
제천 IC와 연결된 38번 지방 국도.
잘나가던 중앙지검 부장검사 오경석은 갑작스런 발령을 통보받았다.
욱하던 성질을 참지 못하고 사고를 친 게 일이 커졌다.
유년 시절부터 의협심이 남달랐던 오경석.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지 동네 선배들 대하는 것도 깍듯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학교 일진 서클과 맞짱을 떴을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제대로 임자를 만나 왕창 얻어 터졌다.
아무리 의협심이 넘치고 강단이 좋아도 쪽수에는 장사가 없었다.
그걸 깨닫고 난 뒤부터 기를 쓰고 공부에 매진했다.
검사가 되어 쓰레기 같은 양아치들을 모조리 감방에 처넣으리라 다짐했다.
머리가 좋고 똑똑했던 오경석의 오기는 독기까지 겸비되자 무섭게 효과가 나타났다.
기대 이상으로 성적이 올랐다.
무난히 한국대 법학과에 입학하고 어렵지 않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판사가 될 만한 성적이었지만 검사에 지원했다.
체력이 국력이라는 말대로 운동도 열심히 했다.
형사부나 강력부 중심으로 돌았다.
그러나 현실은 오경석의 생각과 많이 달랐다.
영화 같지 않았다.
결코 검사는 총 들고 깡패들을 쫓거나 잡지 않았다.
현장에서 형사들이 잡아온 범죄자들을 심문하고 조서를 꾸며 기소하는 게 다였다.
현실을 직시한 뒤 오경석의 꿈은 또 바뀌었다.
이왕이면 가장 끗발 센 중앙지검 검사가 되어 진짜 큰 양아치를 잡아보기로 노선을 정한 것이다.
우선 오경석은 실적을 쌓는 데 주력했다.
언론에 보도될 정도의 큰 사건 몇 개를 거뜬히 해결했다.
더불어 선배들과 친분도 쌓아 돈독하게 지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얻게 된 중앙지검 부장검사 자리.
이후 최종 목표는 총장으로 바뀌었다.
조직 안에서는 승진할수록 몸을 사려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멋대로 처리할 수 있는 일도 더 줄어들었다.
잔뜩 몸을 낮추고 숨을 죽인 채 꿈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절치부심 꿈을 향해 가는 중에 터진 손주혁 사건.
“그 개새끼……. 멘탈이 두부만도 못한 새끼. 그 정신 상태로 무슨 검사야!”
부장인 자신을 물 먹이고 윗선과 다이렉트로 일을 처리한 손주혁.
지검장부터 시작해 동료 검사들이 대놓고 오경석을 손가락질했다.
처음에는 더럽고 치사해도 참았다.
대한민국에서 리앤장 손씨 가문은 법조계의 진골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검사장이 특별히 허락한 정신 교육 기회.
그 말만 믿고 잽싸게 달려가 손주혁을 제대로 깠다.
오랫동안 수련한 무에타이를 완벽하게 펼쳤다.
건방진 놈이 상황 파악 못 하고 발령장을 들고 악을 쓰며 들이댔다.
말로 조용히 교육시켜 보려고 했는데 급기야 자신을 날려버리겠다고 소리쳤다.
밑에 계장과 다른 직원들이 밖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순간 꼭지가 팍 돌아버린 오경석 부장.
정신없이 손발을 놀렸다.
몇 대 치지도 않았는데 살려달라며 빌던 손주혁의 울음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렇게 몇 차례 더 흠씬 두들겨 팼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 이대로 안 물러나! 다시……. 중앙으로 복귀한다! 그때 다 날려버리겠어!!!”
중앙지검 부장검사를 영월지청으로 발령 냈다는 건 한마디로 나가라는 의미.
오경석은 버티기로 했다.
정권이 바뀌면 구명의 손길이 뻗쳐올 수도 있었다.
처가댁도 힘 좀 쓰는 집안.
당분간은 와신상담하며 때를 기다리리라 다짐했다.
부우우우우우웅.
가속 페달을 깊숙이 밟았다.
38번 도로는 유난히 터널이 많았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터널을 빠져나가는 오경석의 BNW.
“어?”
터널을 빠져 나오자마자 앞서 달리던 대형트럭 두 대가 차로를 막았다.
서로를 추월하려는 듯 두 개 차로를 다 차지했다.
“비켜! 이 느려터진 새끼들아!”
빠아아앙! 빠아아앙!
속도를 줄이며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는 오경석 부장.
그러나 여전히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는 두 대의 대형트럭은 엉덩이가 무거웠다.
“이런 썅! 짭새들은 뭐 하는 거야! 이것들 군기 한번 바짝 잡아야……!!!”
욕을 찰지게 퍼붓는 오경석.
룸미러에 시선이 가는 순간 몸이 그대로 굳었다.
뭔가를 잔뜩 탑재한 육중한 덩치의 덤프트럭이 뒤에서 바짝 달려왔다.
거리가 눈에 띄게 가까워졌지만 전혀 속도를 줄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트럭.
“어! 어어어…….”
말문이 막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오경석.
씨이익.
트럭 기사의 웃는 얼굴이 룸미러를 통해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앙! 콰과과과과광!
그대로 전해지는 엄청난 충격.
와자자자자작.
트럭 바퀴가 트렁크를 지나쳐 운전석까지 밀고 들어왔다.
콰자자자작.
앞에 달리던 트럭 뒷부분에 끼어버린 보닛도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크아아아아악!”
짧은 비명을 내지르는 오경석 부장.
그 순간 거짓말처럼 뒤통수를 스치는 얼굴 하나.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리앤장 손대균 이사였다.
마치 그가 눈앞에 있는 듯 악마처럼 웃고 있었다.
“항상 말하지만 기본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 리앤장은 그동안 여러 고객들에게 최상의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희대의 살인자라도 리앤장의 고객이 되는 순간 최상의 법률 서비스를 제공해 무죄 판결을 받아냄이 우리 리앤장이 추구하는 리걸 마인드(legal mind)입니다.”
이사가 주관하는 리앤장 최고 임원회의.
수석급 변호사들이 중앙에 앉아 있는 손대균 이사의 말을 경청했다.
누구 하나 토를 달지 않았다.
손국중 회장이 쓰러지면서 모든 실권이 손대균 이사에게 넘어 왔다.
냉철한 카리스마가 회의장을 압도했다.
칼같이 다리미질 된 블랙 슈트 차림의 손대균은 날카로운 은빛 메탈 안경을 쓰고 회의를 주도했다.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샤프한 모습.
참석한 리앤장 수석 변호사들과 임원들도 긴장했다.
손대균 이사의 눈빛이 한번 훑을 때마다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섬뜩했다.
“다들 긴장 늦추지 마세요. 별 것 없는 삼우로펌이 치고 올라오고 있습니다. 각자 맡은 사건에 최선을 다하세요. 팀별 승소율 90% 이상이 올해 목표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넵! 이사님!”
손대균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도 더러 있지만 모두가 힘차게 답했다.
리앤장 로펌 규율은 깐깐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실력 없는 변호사는 선배를 떠나 후배 변호사들의 지휘를 받는 일도 허다했다.
그렇다고 박차고 쉽게 나갈 수도 없었다.
리앤장에 있는 동안 받게 되는 연봉과 각종 대우, 승소율은 마약과도 같았다.
게다가 리앤장을 배신하고 나가기라도 하면 그 대가를 톡톡하게 치렀다.
찌이잉.
그때 손대균의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을 일으켰다.
다른 이들은 회의 시간에 감히 꺼내볼 수조차 없는 스마트폰.
손대균이 가볍게 터치했다.
[완료]
짧게 수신된 문자.
씨익.
손대균의 입고리가 한쪽으로 올라갔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수고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회의에 참석했던 임원들이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빠져나갔다.
손대균 이사가 퇴사 전보다 더 지독하게 변해 돌아왔다.
눈치 빠른 변호사들은 눈치껏 팀원들을 쪼느라 바빴다.
“오경석이……. 멀리 배웅은 가지 않으마.”
체증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만끽하는 손대균.
아들을 무참히 폭행했던 검사를 깔끔하게 손 봐줬다.
잊고 있었던 무한 권력의 참맛.
짜릿함이 척추를 타고 짜르르 흘렀다.
“후후후훗…….”
텅 빈 회의장에 음산하게 깔리는 낮은 웃음소리.
눈에 띄지 않는 검은 오라가 손대균 주변으로 느릿하게 흘렀다.
***
휘리리리링.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왔다.
덜컹.
창밖에 휘몰아치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았다.
영원히 녹지 않을 것처럼 눈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러시아 사하공화국의 내 땅.
한국과 달리 아직도 한 겨울잠에서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동토의 대륙.
한국에서 잠시 몸을 피했다.
몸과 마음을 식히고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손대균의 돌변한 행보에 마음이 아팠다.
그가 선택한 길 위에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릴 걸 알면서도 손대균은 그 길을 선택했다.
이제는 누구도 위로할 수 없고 침해할 수 없는 고독한 자의 길.
타인의 행복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기꺼이 맞이하려 하는 손대균의 선택.
그의 마지막 모습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그와 나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손대균은 본래 자신이 계속 가야 했던 길을 따라갔다.
몰라 볼 정도로 무섭게 변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난 생의 그 리앤장처럼 움직일 것이다.
타인의 시선보다는 자신의 욕망에 발맞춰 충실히 걸으려 하는 손대균.
그 역시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그래서 비난도 욕도 할 수가 없다.
나라고 입장이 바뀐들 그와 다른 선택을 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손대균은 무엇이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다.
다만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은 온전히 자신이 짊어져야 했다.
“선배님, 너무 멀리는 가지 마십시오.”
살면서 쌓게 되는 업이 얼마나 무서운지 사람들은 잊고 산다.
한 번의 선택이 가져올 파장은 두고두고 인생 전체를 흔든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손대균이 너무 안타까웠다.
마지막에 손유리와 아내를 부탁하던 손대균.
농담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변할 거라는 사실을 나에게 통보한 것이다.
띠리리리리리.
조용히 울리는 스마트폰.
“조 이사님.”
- 장 회장…… 그 녀석 골로 갔다.
“네?”
한국에 있던 조윤태 이사의 전화다.
갑자기 누군가가 골로 갔다는 말을 전하는 그의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
- 오경석 있잖아. 손주혁 팼던 부장검사.
“설마……?”
- 그래, 방금 전에 연락받았는데 떡이 됐단다. 영월지청으로 발령받아 가다가…… 덤프트럭에 앞뒤로 깔려 시체도 제대로 못 건졌대.
“!!!”
싸한 느낌이 전해졌다.
- 다들 쉬쉬하지만 이거 손 이사 작품이다. 트럭 운전사는 깜빡 졸다가 그랬다는데…… 난 안 믿는다.
나도 믿지 못하겠다.
직접 당해본 일이기에 드라마 속 연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안다.
이미 변하기 시작한 손대균.
“확실합니까?”
- 증거가 어디 있어. 도로교통법 위반 과실치사로 처리되겠지.
기가 팍 죽은 조윤태 이사.
“몸조심하십시오.”
- 손대균이 복귀하면서 우리 삼우 깠다더라.
선전포고도 시작됐다.
아니 휴전이 끝났다.
“손 선배님 손이 독합니다. 로펌 변호사들에게서 정보 새나가지 않도록 주의 주십시오.”
- 어차피 한번 넘어야 할 산이다. 나도 과거의 조윤태가 아니야.
그동안 맷집이 세진 조윤태 이사.
“지원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만 하십시오.”
- 그래. 장 회장 믿고 나도 한번 날뛰련다. 합법적으로다가!
뼈가 있는 다짐이다.
“중요한 일들은 저와 상의하십시오.”
- 그래. 중요한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마. 장 회장 너도 몸조심하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우리 오래 같이 살자. 그럼 수고~.
통화가 끝났다.
예상보다 빠르게 손대균 이사가 앞으로 나섰다.
오늘부터는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마침 등 뒤에서 창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