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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7장. 최후의 만찬. (804/1,284)

807장. 최후의 만찬.

“단물만 빼먹고 빠지기에는 너무 늦었지……. 후훗.”

창밖으로 보이는 시원한 산세를 바라보며 중년의 남자가 비웃음을 지었다.

방금 끝낸 통화로 목적은 달성했다.

오랜 세월 구축한 일송회의 법률 담당 장로 계승 문제.

말 잘 듣는 사냥개가 쓰러지고 젊고 튼실한 사냥개를 새로 세웠다.

종자는 꽤 괜찮았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법조계를 완벽하게 통제해 왔다.

정치, 언론, 그리고 법조계까지 세 축을 곤고하게 구축했다.

마지막으로 조종자라 불리는 일송회 회주 신분으로서 대한민국의 보이지 않는 진짜 주인으로 군림했다.

“뼈다귀를 던졌을 때 신속하게 물지 않는 배부른 사냥개는 죽인다. 설사 그게 손대균 너라고 해도 말이야.”

회주는 오늘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는 개는 사냥에 필요 없었다.

시간이야 좀 더 걸리겠지만 사냥개 후보는 주변에 많았다.

다행히 손대균은 어리석지 않았다.

회주가 내민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설사 그렇다 해도 회주는 사냥개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손국중은 의심할 여지없이 완벽하게 복종해온 인물이지만 손대균은 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몇 번의 갈등을 표출했다.

후일에 자식이 생기고 난 뒤 일송회를 위해 수십 년 동안 일해 왔지만 요 몇 년 사이 많이 흔들렸다.

“장태산…….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회주는 장태산이 무척 궁금했다.

사방에서 끌어 모은 정보를 다 훑었지만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한때는 회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했던 적도 있지만 이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암중에 손국중을 쓰러뜨렸을 만큼 무섭게 성장했다.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회주는 장태산이 벌인 짓이라는 걸 확신했다.

지금까지 보여 온 장태산 행보와 일치했다.

적으로 인식한 자들을 대함에 있어 손에 사정을 두지 않는 장태산.

“널 보면 마치 날 보는 것 같구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활짝 웃는 장태산의 모습.

보면 볼수록 회주는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됐다.

“네가 강하다 하나 난 기다린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 그때 널 사냥하겠다.”

회주는 예리한 시선으로 장태산을 노려봤다.

사냥을 해야 할 타깃.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산재한 문제가 적지 않았다.

일송회를 반석에 올리기 위해 여러 가지 작업이 필요했다.

특히 벗이 요구하고 있는 과거 강점기 배상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힘을 쏟을 시점.

잠시 장태산을 내려놓기로 했다.

“……장님! 다 준비됐어요…….”

창밖에서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

끼릭.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여는 회주.

“지금 나갑니다. 하하하.”

전혀 다른 표정의 가면을 쓰고 더없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

또로록.

깨끗하고 투명한 와인잔에 성스러운 이의 피를 채우듯 와인을 채웠다.

작은 기포가 무수히 일었다 이내 사라졌다.

“…….”

침묵은 조용히 시간을 타고 흘렀다.

“오늘따라 네가 낯설다.”

안 보는 사이 많이 수척해진 중년 남자가 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 보여?”

“네.”

“당연한 일이다. 너야 노부모와 철없는 새끼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손대균을 만났다.

갑작스런 통화와 약속.

거절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할 사이였다.

“이번 일은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톡 까놓고 말문을 열었다.

손대균 정도 되면 내가 직간접적으로 이번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쯤은 다 안다.

“유감이라…….”

꿀꺽.

막걸리를 넘기듯 거칠게 와인잔을 비워내는 손대균.

“오늘은 유난히 달다.”

입가에 묻은 와인의 흔적을 냅킨으로 닦아냈다.

룸 안의 공기는 무겁고 조용했다.

손대균 이사와 가끔 들러 술자리를 가졌던 회원제 와인바.

오늘은 유난히 손님이 없는 것 같다.

꿀꺽 꿀꺽.

나도 와인을 들이켰다.

전처럼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받는 화기애애한 자리는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손대균 이사와 나 사이에 은근히 흘렀다.

“난 막걸리가 싫어.”

갑자기 툭 내뱉는 손대균 이사의 막걸리 인상에 대한 부정론.

허투루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손대균 이사의 몸짓 하나하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백주시(白酒詩)’라고 아나.”

“네.”

“고려 이규보 선생 작품인데 고3 시절 과외 선생님이 문학 시험에 나올 수 있다고 특강을 해주셨지.”

귀를 열고 경청했다.

“예전 젊었을 때는 백주 마시기를 좋아했다. 맑은 술을 만나기 어려우니 흐린 술을 마셨다…….”

담담한 손대균의 목소리가 조용한 룸 공기와 잘 어울렸다.

“높은 벼슬에 오른 후, 늘 맑은 술을 즐겨 마시니 다시 흐린 술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손대균 이사 같은 인사들은 대화를 나눌 때 의미 없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당연히 지금 하는 그의 말도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 터.

손대균 이사의 눈빛과 손끝의 움직임은 뭔가 단단히 다짐한 듯한 분위기였다.

“내가 대학교 입학할 때 멋모르고 선배들 따라다니며 몇 번 술을 마셨다. 조윤태 선배님도 그들 중에 한 분이셨지.”

과거로 돌아간 듯한 손대균의 눈빛.

“신촌 뒷골목에 구국의 열정이 넘치는 얼치기 정치 선배들이 많았다. 큰 주전자 가득 담긴 막걸리에 신 김치가 안주의 전부였다.”

눈앞에 훤히 그려지는 그 시절의 풍경.

“뿌연 조명 아래 담배 연기는 자욱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면 나랏님 욕하고 정치인들 싸잡아 천하의 역적으로 만들었다. 내가 경험한 첫 대학 문화였다. 그때는 뭘 몰라 귀를 기울였다.”

또로록.

손대균은 셀프로 와인을 채워 마셨다.

“술이 취하면 동지라 해도 생각이 다르다며 서로 욕을 퍼붓고 삿대질을 하더라. 그래도 명색이 대한민국 최고 학교 학생들인데 하는 짓은 동네 양아치와 별반 다르지 않았어. 후후훗.”

웃음이 무척 건조했다.

“그래도 좋았다. 그런 게 진짜 대학생활이라 생각했다. 자유롭게 토론하고 썩은 정치인들을 천하의 개자식으로 만드는 대화가 재밌었다. 신입생 중에 눈에 들어오는 여학생도 있었고 말이야.”

지금은 사라져 버린 그때 그 시절의 낭만.

생각에 잠긴 듯 깊은 눈동자에서 그가 보낸 시절들이 영화처럼 재생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어느 날 내 정체가 밝혀진 거야. 교수님 한 분이 친한 척하며 우리 아버지 이름을 말씀하셨지. 그리고 난…… 퇴출당했다. 내가 한 행동이 아닌데 연좌제로 묶더군. 나와 썸을 타던 여학생도 날 벌레 보듯 쳐다보고……. 정말 죽고 싶었다. 얼마 전까지 술잔을 나누던 이들과 척을 질 생각을 하니 잠도 오지 않았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

민주화 투쟁이 한창일 때 기득권층 자제들은 낄 곳이 없었을 것이다.

“괴로운 날들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부르셨다. 제대로 대작한 날이지. 처음으로 말이야.”

자연스럽게 손국중의 이야기가 나왔다.

손대균 인생에 있어 운명의 변곡점 같은 존재.

“시바스 알지? 당시 대통령이 마시던 술……. 진짜 좋더라. 막걸리와 달리 목 넘김이 얼마나 부드럽던지. 억지로 마시던 텁텁한 막걸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손대균의 이야기는 조금 전 말문을 열었던 백주시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의미는 충분히 전달됐다.

“그날 아버지와 두 병을 마셨다. 취했건만 다음 날 아침 속도 편안하더라. 그때 깨달았지. 내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다르구나. 막걸리와 고급 양주처럼 나와 그들은 어울릴 수 없구나. 그때 그걸 확실히 알았다.”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이 시간은 손대균을 위한 자리.

“죽어라 공부하고, 사법시험에 패스에 결혼까지 하고, 또 리앤장 이사가 되어 바쁘게 살았다. 뒤를 돌아볼 시간도 없었다. 대학교 초에 만났던 인연들과도 대부분 안면을 정리했다. 어차피 노는 물이 달랐으니, 나이 먹을수록 만날 일이 없어졌다. 그러다 가끔 마주치는 녀석들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더라. 다들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었는데…… 누구도 과거처럼 나에게 대놓고 손가락질하지 못했다. 그들도 알게 된 거지. 세상에 나와 보니 자신들이 손가락질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정확히 알게 된 거지.”

씁쓸하기 그지없는 손대균의 자랑 아닌 자랑.

한국대 법학과 선배들 대부분이 법조계에 몸담고 있었을 터.

리앤장 이사의 눈 밖에 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사회에 진출하고서야 알았을 것이다.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 뒤로도 다들 연락은 못 하더라.”

어느 간 큰 자가 리앤장 이사에게 사적으로 전화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도 지은 죄가 있는 입장이라면 말이다.

“그 뒤로 난 와인으로 술을 바꿨다. 양주는 아버지 취향이었지…… 내 취향은 아니었거든.”

손대균이 말끝을 맺으며 나를 바라봤다.

파바밧.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일순간 일렁이는 시퍼런 빛.

부드럽게 속으로 들어갔던 야수의 발톱이 다시 날카롭게 드러났다.

분명 웃고 있지만 매섭고 차가운 기운을 내비치는 미소.

“네 유감, 받아줄게.”

“…….”

“아버지께서 연세가 드시더니 세상 돌아가는 힘의 원리를 놓치셨어. 자신의 말 한마디면 산천초목이 벌벌 떨던 시대가 지나간 걸 모르셨던 거지. 그러게 진작 은퇴하시라니까……. 쯧.”

시선을 와인잔으로 옮기며 손대균이 혀를 찼다.

“주혁이 사건은 네가 사과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한번 깨졌어야 할 미완성 상태의 그릇 같은 녀석이었다.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불면 다치는 게 당연한 거지. 태산이 너도 알다시피 이쪽 일이 워낙 험하잖아. 사람 목숨도 왔다 갔다 하고…….”

“죄송합니다.”

“됐다니까. 너도 자당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거잖아. 그리고 이 일은 주순자 잘못이 커. 주먹 쓴 그 개새끼가 제일 문제고…….”

손주혁이 압수수색영장으로 날 공격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사태.

손대균은 상황 전반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태산아…….”

손대균이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얼마 전 만남을 가졌을 때의 그 목소리다.

마음이 아리고 싸했다.

어떤 말이 나올지 짐작이 됐다.

“네. 선배님.”

담담하게 대답했다.

모든 인간의 삶은 각자의 선택에 의해 굴러간다.

누가 뭐라 한다 해도 손대균의 인생 역시 그의 것이다.

“고마웠다.”

말은 짧고 간결했다.

찡하며 반응하는 심장.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심장에 가해진 충격과 고통은 강도가 컸다.

손대균 이사를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의지해 왔던 것 같다.

“…….”

“앞으로 너에게 좋은 선배 노릇은 못 할 것 같다.”

속내와 달리 빙긋 웃어 보이는 손대균.

하지만 그의 웃음은 참 맑았다.

슬프게도 눈빛은 따스하게 반짝였다.

마치 헤어지는 연인들처럼 손대균의 그 모습을 유심히 눈에 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고 싶지 않은 모습.

“저도…… 고마웠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손대균 이사 덕분에 대한민국에서 안정적으로 사업하고 살았다.

여러모로 도움도 많이 받았다.

계산된 관계로 시작했지만 그도 나도 진심으로 서로를 대했다.

“고마우면 오늘은 네가 쏴.”

“물론입니다. 마음껏 드십시오. 선배님.”

“그럴까?”

최후의 만찬처럼 흐르는 분위기.

그와 나는 서로에게 예수이고 베드로였으며 유다였다.

내일부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었지만 마지막 만찬의 빈 잔은 채워졌다.

빙긋.

서로를 눈에 담으며 웃었다.

운명이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하더라도 서로에게 진실했던 순간은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팅.

꿀꺽 꿀꺽.

연이어 잔이 부딪쳤고 그때마다 와인이 목구멍을 적셨다.

넉넉하게 준비되었던 와인병이 순서대로 비워지고 있었다.

안주도 필요 없었다.

서로의 가슴을 적신 울컥울컥한 쓴맛이 안주를 대신했다.

그리고.

와장창.

마지막 잔을 비운 손대균이 느닷없이 잔을 내던져 깨트렸다.

“빌어먹을…….”

굳게 닫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한마디.

“…….”

그가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지 모른다.

다만 손국중을 점령했던 최상급 악신이 손대균을 그냥 두지 않으리란 것쯤은 예상했다.

인간이 생을 거듭하며 쌓아온 업은 피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져 흐르는 법.

스윽.

손대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촉촉하게 젖은 중년 남자의 눈동자.

“……잘 살아라. 우리…… 서로에게 원망 말고 살자.”

당부인 듯한 경고.

“네.”

대답은 짧았다.

만나는 순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던 헤어짐의 순간.

“그래, 넌 잘할 거야……. 나보다 더 똑똑하니까.”

손대균이 돌아섰다.

휘청.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중심을 잡는 그.

흔들리는 몸을 가누며 나를 한 번 더 뜨겁게 바라봤다.

뚜벅뚜벅.

그리고 거침없이 출입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찌릿.

남자와의 이별이 이렇게 아플 줄 미처 몰랐다.

마치 수백 개의 바늘이 심장을 쿡쿡 쑤시는 듯했다.

덜컥.

출입문의 손잡이를 잡은 손대균.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혹시라도 말이야……. 유리를 부탁한다. 능력되면 내 아내도.”

마지막 유언처럼 웅얼거리는 손대균의 말, 그리고 생략된 말들의 의미.

“네…….”

“그래 고맙다.”

스르르륵 철컥.

거칠게 출입문을 열고 손대균이 사라졌다.

“하아.”

짧게 목구멍을 타고 터지는 한숨.

그가 사라진 문 쪽을 한동안 뚫어져라 바라봤다.

“선배, 그거 아십니까……. 그 시의 마지막 구절은…….”

나도 잘 알고 있는 백주가의 마지막 구절.

“벼슬에서 물러나 녹봉이 줄어들어 쉬이 맑은 술을 구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백주를 마시게 되었다……. 선배는 모르시겠지만 본래 선배가 좋아하던 술은…… 양주나 와인이 아니라…… 막걸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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