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9장. 불벼락.(2)
“J는 쌓은 재력으로 미모의 여성들과 뜨거운 밀회를……. 밀회는 빼고……. 일반 사람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다채로운 연애를 즐기는 것으로…….”
조국일보 편집국장실.
반종현 회장의 지시를 받은 편집국장 박두상은 소설 쓰기에 열을 올렸다.
빈약한 근거에 기반한 사회 고발 칼럼.
지면을 타는 순간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수십 년 기자 생활을 해 온 박두상의 감이 발동했다.
우매한 대중들이 한꺼번에 몰릴 만한 소스들로 그럴싸하게 이야기를 엮어 냈다.
재벌, 천재, 한국대, 변호사, 거기에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군 면제, 불법 행위, 보유한 재산만 해도 수조.
타이틀로 뽑을 만한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차고 넘쳤다.
대한민국을 뒤흔들 만한 이슈였다. 한 달 정도는 거뜬히 물고 뜯을 수 있다.
그 뒤에는 거세진 여론을 타고 검찰과 국세청이 나설 것이다.
손쓸 틈을 주지 않고 완벽하게 장태산을 보낼 수 있는 계획.
한 번 물린 이상 절대 빠져 나올 수 없는 개미굴로 빠져드는 것이다.
“흐흐흐. 잘 가라. 재수 없는 새끼.”
박두상은 장태산에게 가진 반감이 아주 컸다.
세상 물정 모를 어린놈이 이미 모든 걸 다 가졌다.
그야말로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슈퍼 갑 주인공.
철저히 짓밟아 곤죽을 만들어 버릴 생각에 원고를 수정하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장태산 고맙다. 너 보내고 나면 나도 퇴직 후에 고문질이나 하며 남은 인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게야. 흐흐흐.”
조국일보 소수 공신들에게나 허락되는 논설주간과 논설고문 자리.
이 두 자리는 아주 꿀 빠는 보직이다.
조국일보에 잘 보이고 싶은 기업들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 있었다.
회장의 최측근으로 자리매김하는 자리인 만큼 모두들 욕심냈고 알아서 기었다.
부와 여자는 물론, 여러 개발 이슈가 되는 정보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만큼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회장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박두상은 추호도 조국일보를 떠날 마음이 없었다.
입사 후 동료들이 독재 정권에 희생양이 되어 고문실로 끌려갈 때 결심했다.
절대 불의에 눈감고 정권과 사주에 충성하리라 다짐한 것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씻을 수 없는 장애를 얻고 취직도 못한 채 방황하던 선배와 후배들.
그리고 함께했던 동료들.
인정 때문에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참상을 떠올리며 재차 마음을 다잡았다.
그 고통의 결과 지금은 이렇게 승승장구해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조국일보 편집국장.
반씨 일가를 제외하고 언론계를 통틀어 박두상을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자는 이 시대에 얼마 없었다.
뚜루루루루.
책상 위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편집국장 직통 전화번호를 아는 이들은 지극히 소수.
“박두상입니다.”
- 박 편집장님. 저 오정의 윤 전무입니다.
“윤 전무님. 그렇지 않아도 전화 잘하셨습니다. 오늘 기분 좋은 일이 있어요. 술도 고프기도 하고, 때마침 윤 전무님이 먼저 연락을 주셨습니다. 하하하.”
조국일보 기자가 된 이후 자신의 호주머니 돈으로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기업 쪽 언론 대관업무 담당자들이나 정치인들이 알아서 찾아와 술을 대접했다.
명절은 물론 시시때때로 이런저런 이유로 거둬들인 떡값이 1년에 대형 세단 한 대 값은 됐다.
오정의 윤 전무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한 명.
신문사를 담당하는 윤 전무는 사람이 괜찮았다.
원하는 기사를 써주고, 오정은 지속적으로 광고를 제공해 서로 윈윈했다.
소지하고 다니는 법인 카드로 화끈하게 제공했다.
- 국장님, 지금 술 얘기가 나옵니까?
‘뭐야? 이 새끼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평소 간도 빼줄 것처럼 굴었던 윤 전무의 목소리가 시니컬했다.
다소 추궁하는 듯한 말투.
“윤 전무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오늘 기분 별롭니까?”
살짝 기분이 상해 까칠하게 반응을 하는 박두상.
윤 전무가 아니어도 지금 당장 불러내면 달려올 인간들은 널리고 널렸다.
‘오정을 한 번 깔 때가 됐지.’
박두상은 내친 김에 오정을 정신교육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임성철 회장이 쓰러진 직후부터는 과거처럼 부드럽게 기름칠이 되지 않고 있었다.
오정은 약점이 꽤 많았다.
반도체 사업장 화공 약품 문제와 노조 와해 사건은 언제나 핫한 뉴스거리다.
- 네. 기분 아주 엉망입니다.
‘한번 해보겠다는 거야 뭐야? 이 새끼가…….’
상쾌하게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엉망이 됐다.
박두상의 인상이 고약하게 변했다.
“그렇다면 다음에 뵙도록 하죠. 그럼 전 바빠서 이만…….”
먼저 전화를 끊어버리려는 박두상.
- 광고 빼세요.
막 수화기를 내려놓으려고 하는 순간 귀를 의심케 하는 짧은 한마디가 들렸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박두상은 전화기를 다시 바로잡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오정은 신문사 지면 광고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올려주는 기업이었다.
광고를 빼라는 일방적인 윤 전무의 한마디.
그 소리는 대한민국에 전쟁이나 IMF급 위기가 닥쳤을 때나 나올 법한 말이었다.
조국일보와 전쟁을 하겠다는 선전포고인 것이다.
- 윗선 지시입니다. 오늘부터 당분간 오정그룹 모든 계열사는 조국일보 전 계열사에 대한 광고를 전면 보류합니다.
재차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차갑게 내뱉는 윤 전무의 통보.
“윤 전무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광고를 빼겠다니!”
박두상이 놀라 소리쳤다.
편집국장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바로 광고 섭외 능력도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불벼락 같은 일방적 통보를 받았다.
- 어디다 큰소리를 쳐요! 오정이 그렇게 만만해요?
“…….”
-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전 계열사에 그렇게 통보됐으니 처리하세요. 3월 달 예약 건에 한해서는 광고료를 지불하겠습니다. 하지만 조국일보 신문이나 인터넷 판에 이 시간 이후 오정 광고가 나가게 되면 손해배상 청구에 들어갈 겁니다.
띠릭.
역시 전화 통화는 일방적으로 끝났다.
“이게 무슨…….”
정신이 반쯤 가출한 상태가 되어 버린 박두상.
오정의 예상치 못한 통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덜컥.
들어오라는 말도 안 했는데 문이 거칠게 열렸다.
“구, 국장님 큰일 났습니다!”
광고 담당 본부장의 얼굴이 사색이 된 채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신경이 날카로워진 박두상이 사나워진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방금 연대와 엘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연락?”
“오늘부로 광고를 전면 끊겠다고 합니다!”
“뭐라고! 과, 광고를!”
박두상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오정에 이어 연대와 엘자그룹의 광고 중단 통보.
‘설마…….’
갑자기 박두상의 머릿속을 스치는 아찔한 상상.
한 남자의 이름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장태산……!”
***
“무슨 소리야! 큰일이라니!”
동생 반승현 조국스포츠 사장의 말에 반종현은 싸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 소름 돋는 경고를 하고 전화를 끊었던 장한수 실장.
그의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 제게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오정과 연대, 엘자 측에서 오늘부로 광고를 전면 끊겠다고 합니다!
“뭐라고 광고를!”
오정 측에서는 그렇게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엘자와 연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형님, 무슨 일 있습니까? 친분을 쌓고 있던 이들이 갑자기 그 말만 전하고 불똥 튄다며 당분간 연락하지 말자고 합니다.
‘……당했다!’
선수라고 생각했지만 주먹을 날리기도 전에 선빵을 맞았다.
머리가 아팠다.
일종의 경고이자 선전포고.
장태산과 요즘 들어 더 긴밀하게 연루되어 가던 세 그룹.
정보가 샌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사태가 발생했을 리 없었다.
그들이 먼저 조국일보를 노리기 시작했다.
- 형님? 제 말 듣고 계신 거죠?
별 다른 능력은 없지만 반씨 일가라는 이유로 조국스포츠 사장을 맡고 있는 반승현.
그가 당황해 형을 찾았다.
“알아볼 게 있으니 먼저 끊는다.”
- 형님!
띠릭.
심사가 복잡해진 반종현.
“으음…….”
짧은 신음을 흘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장태산……. 네 능력이 그렇게 대단했단 말이냐…….”
피부에 확 와 닿는 장태산의 힘.
젊은 놈의 인맥이 이렇게까지 마당발일 줄을 미처 몰랐다.
돈 버는 재주 정도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인맥관리에도 철저했다.
“고냐 스톱이냐…… 이것이 문제인데.”
로마시대의 카이사르가 된 듯한 복잡한 심정.
아직 주사위는 던지지도 못했다.
계산이 아주 복잡했다.
일송회의 한 축인 손국중이 계획한 장태산 죽이기 작전.
그나마 여기서 멈춘다면 장태산과 더 이상 척을 지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손국중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 대노한 그에게 크게 꾸중을 듣게 될 것이다.
종국에는 일송회에서 그만큼 발언권이 약해질 건 자명한 일.
그 어느 때보다 현명한 선택이 필요했다.
“그 새끼를 지금 잡지 못하면…….”
반종현은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도 이렇게 위험한데 더 놔뒀다가는 앞으로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룹 오너들이야 천천히 달래면 그만.
자금도 넉넉하게 보유하고 있고 광고 수익은 다른 곳에서 뽑아도 충분이 감당할 수 있었다.
“장태산…… 개새끼. 한번 엿 먹어봐라. 흐흐흐.”
결정을 내리자 반종현은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했다.
이 모든 게 손대균 때문에 벌어진 사태.
그의 비호 때문에 장태산의 누런 떡잎이 커져버렸다.
지금이라도 뿌리째 뽑아내지 않으면 화근을 없앨 수 없다.
띠리리리리리.
그때 반종현의 스마트폰이 벨소리를 토했다.
“어라, 이 양반은 또 무슨 일이야?”
반종현과 인연이 깊은 또 다른 권력자.
띠릭.
내심 반갑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공무가 다망하신 실장님이 어인 일이십니까?”
반종현이 넉살 좋게 산뜻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과거부터 죽이 잘 맞아왔던 인사.
두 사람의 합작으로 보수가 계속해서 집권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른 바 ‘우리가 남이가’ 사건의 주인공.
- 좋은 말 할 때 멈춰요.
그 순간 예상치 못하게 들려온 차디찬 목소리.
“네?”
-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각하께 누가 되면 당신과 조국일보가 책임질 거예요?
“그게 무슨…….”
- 방금 국정원 쪽에서 비상 연락이 들어왔어요, 장태산 치려고 준비 중이라던데…… 맞아요?
“헛!”
반종현은 크게 놀랐다.
청와대 공길춘 비서실장까지 장태산이 관련된 일에 나섰다.
그것도 국정원까지 동원된 상황.
- 이 사람들이 정말 무서운 게 없구만!
공길춘은 전형적인 대통령 옹호론자.
과거 조국일보 기자들을 깨 털 듯 털어냈던 악명 높은 공안검사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실장님, 오해이십니다. 저희는 그냥 장태산에 대한 의혹을 말끔히 해소하고자…….”
- 닥쳐요! 조국일보는 의혹이 없나요?
화가 많이 난 듯 공길춘의 목소리는 칼칼하고 매웠다.
- …….
반종현은 그제야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번 장태산 공격 계획은 완벽한 참패였다.
- 더 말하지 않겠어요.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 전에 장태산에 대한 모든 자료 폐기하세요. 곧 미국 국빈 방문을 앞두고 있는 VIP께서도 언짢아하십니다.
대통령까지 언급됐다.
물론 그 뒤에 주순자가 버티고 있을 건 자명했다.
조국일보가 아무리 일송회 중요 멤버 중 한 곳이라도 해도 살아 있는 권력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칼럼을 취소하겠습니다.”
반종현은 꼬리를 말았다.
최병박 전 정권과 달리 조국일보와 크게 접점이 많지 않은 현 조근영 대통령.
여차하면 세무조사를 비롯해 여러 경로로 가해지는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었다.
타협이 필요한 타이밍.
- 조심하세요. 장태산……. 이번 정권에서는 건들지 마세요.
항복의 기미를 확인한 공길춘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그도 조국일보가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
“뜻에 따르겠습니다.”
- 그래요. 우리 다 같이 협력해야 이 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럼 그렇게 알고 끊겠어요.
“들어가십시오.”
띠릭.
통화가 끝났다.
“이런 늙은 양아치 새끼를!!!”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반종현.
“으아아아아아아아아!”
휘이이잉.
퍼팅채를 움켜잡고 사정없이 휘둘렀다.
와장차자자자장.
거침없이 박살이 나는 사무 집기들.
“주순자……. 너 곱게 못 죽을 줄 알아! 나 반종현이 널 반드시 보낸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