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0장. 내 조직원.
“!!!”
바비 로저스는 당당한 태도의 다니엘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세계적 투자자인 그의 앞에서 돈 얘기를 저런 식으로 꺼낼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었다.
아직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비밀 투자 자금 규모가 꽤 됐다.
경제 잡지 포브스가 발표한 개인 재산 순위를 다시 써도 될 정도였다.
그런 로저스를 상대로 돈보다 시간이 더 귀하다고 말하는 다니엘 장.
평소 로저스 자신이 가볍게 하고 다니던 말이었다.
‘농담이 아니잖아…….’
다니엘의 눈빛에서 거짓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푼돈을 쫓아 투자하는 궁한 자가 아니었다.
돈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제 마음을 흔들 만한 매력적인 무기가 없습니까? 로저스 당신이 말하는 진정한 가치 투자로 저를 설득해 보십시오.”
“…….”
로저스는 잠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른 투자자들이었다면 작은 이익에도 눈이 돌아가 미끼를 물겠지만 눈앞의 다니엘은 그렇게 쉽게 상대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 싶어 아찔해졌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 바닥에 발을 들인 후 수없는 격변의 시간을 겪어오면서 잘 버티고 또 성공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태도에 로저스는 자존심이 상했다.
이쯤에서 물러나기에는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이 용서치 않았다.
“한국 기업들은 앞으로 무척 힘든 시기를 보낼 거라 예상해요. 대중 투자는 부메랑처럼 발목을 잡을 거예요. 기술을 쏙 빼먹은 중국은 복제와 대규모 국가 자본 투자로 한국을 바짝 따라 잡을 겁니다.”
중국의 악행을 익히 잘 알고 있는 로저스는 슬슬 보따리를 풀었다.
“미국도 엄청난 국가부채로 지금까지 세계에 인심 쓰듯 베풀던 혜택을 축소할 게 뻔해요. 그런 와중에 과도한 규제와 재벌의 경제력 집중, 가계부채, 소득불균형에 빠져버린 한국은 스스로의 역동성을 회복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이건 제가 단언할 수 있어요.”
조용한 말로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는 로저스.
다니엘은 다른 대꾸 없이 차분하게 로저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안정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혁신이 일어나지 않아요. 뛰어난 인재들이 더 이상 이공계에 지원하지 않아요. 공무원이나 의사가 되기 위해 혈안이 됐지요. 이런 안정만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IT 산업과 4차, 5차 산업을 이끌 기술을 창조할 수 없어요. 개인의 역량 문제의 차원을 넘는 사회 구조적 문제지요.”
다시 한 번 확인되는 로저스의 통찰력.
세계 각국에 대한 그의 다양한 정보와 깊은 통찰력은 대단했다.
로저스는 한국의 미래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일본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어요. 저금리 때문에 갈 곳을 잃은 거대 자금은 산업시설이나 건전한 투자처가 아닌 부동산에 몰려요. 그러다…… 앞으로 몇 년 후에 뻥하고 거품이 꺼지면…… 국가 전체가 위기에 빠지게 되는 거죠. IMF는 우스울 정도일 게 당연해요. 어떤 누구도 도울 수 없어요. 그때가 되면 세계 어떤 국가도 당장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세계적 대공황에 빠져 있게 될 테니까요.”
말을 마치고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조용히 음미하는 로저스.
이제야 그의 모습에서 여유로움이 엿보였다.
‘이 정도는 다 예상하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로저스는 속으로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로저스의 긴 말을 듣고도 다니엘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쉽게 접할 수 없는 세계적 투자자의 미래 예견.
다니엘은 엷은 미소를 띤 채 아무 말 없이 로저스의 말을 끝까지 듣기만 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비장의 한 수.
“……위원장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해요.”
“네?”
다니엘이 처음으로 진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다니엘 당신에 대해서 알고 있더군요.”
김정은 위원장이 로저스와의 단독 환담 시간에 다니엘에 대해 콕 찍어 말했었다.
남한의 투자자 장태산을 만나고 싶다고.
로저스 역시 이번이 다니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아무리 로저스가 세계적으로 뛰어난 대형 투자자라 해도 같은 민족인 다니엘보다 덜 매력적일 터였다.
기꺼이 만남을 주선하겠다고 확답했다.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을 제안하면 다니엘 역시 쉽게 거절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뜻밖입니다.”
놀람도 잠시였다.
이내 평정심을 찾고 미소를 짓는 다니엘.
“놀라지…… 않는군요?”
“그게…… 놀랄 일인가요?”
“…….”
다니엘의 물음에 로저스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비장의 한 수마저 통하지 않았다.
“김정은은 돈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체제 안정도 추구합니다. 패권국인 미국과 맞서면서 투자금을 구하겠다는 건데…….”
의미심장한 다니엘의 평가.
“북한이 개방되면 남한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긍정적 효과를 가져 올 거예요. 그렇게만 되면 10년 안에 한반도는 세계 경제 중심지가 될 수도 있어요.”
로저스는 자신의 투자 감각을 믿고 확신에 차 말했다.
북한은 누가 뭐라 해도 가치 투자처로서 최고였다.
휴전 중인 분단국이지만 한국과 북한은 뛰어난 인재와 자본, 원자재가 풍부했다.
미국과 일본, 러시아와 중국의 힘들이 부딪치는 세계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위험 지대에서 최고의 기회가 꿈틀거렸다.
“로저스, 당신의 투자 의견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처음으로 다니엘이 로저스를 인정했다.
한없이 밝아지는 로저스의 얼굴.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닙니다.”
“리스크가 큰 선투자는 나중에 몇 십 배의 이익으로 돌아오는 법입니다. 위원장이 친서로 보장한다고 했습니다.”
감춰 놓은 보따리를 하나 더 풀어내는 로저스.
“그 보장…… 믿습니까?”
“네?”
“김정은 위원장의 권력이 그 선대처럼 보장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
다니엘의 물음에 로저스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 전 세계에서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있는 독재국가.
아프리카 쪽에 몇 곳이 남아있을 뿐 세계 독재자들은 권력층에서 대부분 추방당했다.
“공자께서는 사귀었을 때 유익한 세 부류의 친구를 정의했습니다.”
로저스도 알고 있는 동양의 성인 공자.
다니엘이 갑자기 뜬금없는 말로 로저스를 당황스럽게 했다.
“정직한 친구, 신의가 있는 친구, 견문이 넓은 친구. 그 세 부류의 친구를 유익한 친구라 했습니다. 로저스는 김정은 위원장을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진정 친구라 확신할 수 있습니까?”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
로저스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매력적인 투자처인 북한을 선점할 수도 있다는 설렘에 중요한 걸 놓쳤다.
김정은 위원장이 정직하다거나 신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다니엘의 말대로라면 그는 믿을 만한 친구는 아니었다.
‘실패군.’
로저스는 다니엘을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살면서 이렇게 상대하기 까다로운 투자자는 처음 만났다.
이제는 미련 없이 돌아가야 할 때.
당장은 싱가포르로 돌아간 뒤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 것 같았다.
“다니…….”
로저스가 마음을 굳히고 입을 여는 순간.
“로저스, 저는 김정은보다 당신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갑자기 다니엘의 입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나에게?’
다니엘의 저 말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로저스가 크게 놀라며 다니엘을 바라봤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는 당신과 사귀고 싶습니다. 제 친구가 되어 주겠습니까?”
‘친구!!!’
이상하게 친구라는 말이 귀에 콱 박혔다.
그만큼 다니엘의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전 북한보다…… 당신이 훨씬 가치 있는 투자처로 보입니다.”
“다니엘…….”
쿵쿵.
푹 가라앉아 버렸던 로저스의 심장이 새로운 피를 수혈 받은 듯 힘차게 뛰었다.
그냥 던지는 의례적인 수사가 아니었다.
마주한 이후 가장 환한 모습으로 활짝 웃는 다니엘.
스윽.
로저스는 무의식중에 다니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제안……. 흔쾌히 받아들이겠습니다!”
***
“바비 로저스와 친구라……. 장태산 많이 컸다.”
로저스는 싱가포르로 돌아갔다.
북한에 대한 투자를 제안하러 왔다가 나와 친구를 먹고 떠났다.
그 대단한 로저스라 해도 장막에 가려진 미래를 다 알 수는 없다.
앞으로 몇 년 동안 한반도는 격랑에 휩싸인다.
서로 간에 핵폭탄 단추가 크네 작네로 싸우는 무식한 두 나라 지도자들로 인해 전 세계가 두려움에 떤다.
핵전쟁은 결코 일방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세계 다른 어떤 나라보다 대한민국이 그 사태로 인해 직격탄을 맞는다.
핵 한 방이면 대한민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북한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 수도를 옮기라고 말하는 무식한 부동산 투기꾼 트럼프.
그리고 그와 협상에 나선 어린 독재자 김정은과의 맞짱.
아직 본격적인 위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2020년까지도 한반도는 여전히 풍전등화의 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앞에서는 협상에 나서고 뒤에서는 탄도미사일 실험을 재개한 김정은 때문에 여러 차례 꼭지가 돌아버린 트럼프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온갖 막말을 퍼부었다.
그런 북한을 볼모로 수십억 달러가 넘는 방위비를 더 지불하라고 대한민국을 향해서 지속적으로 행패를 부렸던 트럼프.
돈 돈 하던 미국의 지도자가 바로 트럼프였다.
2020년까지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 비정상적인 두 인물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미중 무역 전쟁에 이은 핵전쟁 위험까지 대한민국을 괴롭혔다.
그 소란은 외국인들이 주식을 팔고 재투자를 망설이게 만드는 중대한 이유가 됐다.
“스스로 강한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돕지 않는 법. 이웃집 개들이 대한민국을 무시하는 가장 큰 이유다.”
마음을 하나로 합쳐 세계적 위기를 돌파해도 모자랄 판에 대한민국 내에서는 권력을 쟁탈하기 위해 내부총질을 멈추지 않았다.
2020년의 한반도 정세는 한마디로 국민을 외면한 정치권 싸움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사이비 교주 같은 자와 친일파들이 힘을 합쳐 나라를 정세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북한이…… 급했군.”
고난의 행군이 끝난 뒤에도 풍족한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북한.
계속되는 국제 사회 고립으로 인해 북한 주민들의 고통은 더해졌다.
공산당 고위 간부들은 그 와중에도 풍족함을 누리고 권력을 휘두르며 떵떵거리고 살았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도 언제까지나 세뇌 당한 채로 머물지 않았다.
외화벌이 일꾼들과 장마당을 통해 서서히 세상의 변화를 눈치 채게 된다.
그 변화를 통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김정은.
언젠가 그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 오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스르릇 문이 열렸다.
“회장님. 퇴근 안 하세요?”
늦은 시간까지 남아 손님을 접대한 유세라 상무.
“오늘 수고했어요.”
“야근 수당 두둑이 청구할 겁니다~.”
성수를 통해 뱀파이어 미녀가 되어버린 유세라 상무가 산뜻하게 웃었다.
“퇴근하셔도 됩니다.”
“저 혼자서요?”
“???”
“이런 날에는 야근한 직원 위로 차원에서 회식 같은 거 안 하나요? 도도희 대표도 지금 야근 중인데~.”
“그래요?”
“회장님이 지시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요.”
도도희가 일 욕심이 많았다.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녀.
그러고 보니 도운중 회장의 시간도 불과 몇 년 남지 않았다.
“그럼 오늘 회식…….”
“콜!!!”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터져 나온 시원한 외침.
“자리는…….”
“이미 예약했습니다. 회장님은 카드와 몸만 가져가시면 됩니다.”
몇 년 같이 일했다고 그세 스타일을 파악한 유세라 상무.
빈틈없이 스케줄을 관리했다.
여러모로 마음이 편했다.
손발이 척척 맞는 만큼 다방면에서 큰 도움이 됐다.
변화무쌍한 물질이 아닌 믿을 만한 사람에 대한 투자.
내가 추구하는 가치 투자의 핵심 요소였다.
“도도희 대표 부르십시오.”
“지금 올라오고 있어요.”
오랜만의 회식이라 유세라 상무가 살짝 들떠 있었다.
야근하는 부하 직원들 격려 차원에서도 필요한 시간.
“오늘 제대로 놀아볼까요?”
“넵!!! 대표님 노래 듣고 싶어요!”
회식 때 몇 번 갔던 노래방에서 내 노래를 듣고 가수가 따로 없다고 외치던 유세라 상무.
이미 두 눈에는 나의 열창에 대한 기대감이 잔뜩 들어 있었다.
“내일 쉬는 날이니…… 밤새 놀아보죠.”
“땡큐 보스!!!”
요즘 추세는 직장 내 일과가 끝나면 회식같은 단체 활동보다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바쁘다.
하지만 우리 회사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직원들이 먼저 회식을 요청하는 아름다운 조직의 모습을 유지했다.
띠리리리리리리리.
그때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임윤아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빠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임윤아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연락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걱정이 먼저 앞섰다.
- 아닌데…….
대답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미 말투에서 느껴지는 무거운 분위기.
“어디야?”
- 여기. 태산 씨 회사랑 가까운 곳.
“아직 집에 안 갔어?”
- 술 한 잔 더 하고 싶어서. 바빠?
임윤아의 조심스런 물음이 이어졌다.
그런 임윤아와 나의 전화 통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유세라 상무.
또 그 뒤에 나타난 도도희 대표.
난감했다.
이런 날이면 몸이 두 개이고 싶다.
“회식 있어.”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 그래? 회식이면 다음에…….
임윤아의 목소리에서 위태로움이 감지됐다.
지금 당장 누군가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듯한 느낌.
전화기를 든 채 나를 쳐다보는 유세라 상무와 도도희 대표를 바라봤다.
스윽.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보내는 두 사람.
“같이 회식하자. 당신도…… 내 조직원이잖아.”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