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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장. 이웃집 담. (785/1,284)

788장. 이웃집 담.

“오늘…… 술 좀 받네.”

임아현은 와인을 물처럼 마셨다.

본래부터 주량이 좀 센 편인 임아현.

와인을 연거푸 비워내면서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미스 때부터 놀던 가락이 있어서 와인 정도로는 취하지도 않았다.

보기 좋을 정도로 붉게 달아오른 임아현의 낯빛.

“그만 마셔.”

그런 임아현을 지켜보던 임윤아가 제동을 걸었다.

언니 임아현이 계속 잔을 건네는 바람에 몇 잔의 와인을 마신 임윤아의 얼굴도 불콰하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이 자리가 무척 불편했다.

그래도 언니 임아현의 얼굴을 봐 예의를 지켰다.

어릴 때는 나름 친하게 지냈던 언니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언니 기분 좀 맞춰주면 안 돼?”

“많이 마셨어. 밤도 깊었고.”

“까칠하기는……. 너 그래서 회사 생활 하겠어? 윗사람 눈치도 보고 그래야지.”

“언니가 윗사람은 아니잖아?”

임윤아는 임아현과의 신경전에 물러서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가 센 언니 때문에 심적으로 대응하기가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기세당당함이 온몸에서 발산됐다.

“재수 없어.”

임아현이 임윤아의 그런 기세를 모를 리 없었다.

“동생에게 할 말은 아니잖아? 손님도 계시는데.”

“하하. 저도 여동생하고 가끔 싸우기도 합니다. 어느 집이나 형제간에 그러면서 정이 더 깊어지는 거겠죠.”

손주혁이 호탕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

‘사이가 안 좋다더니…… 사실이었군.’

임아현과 임윤아의 불꽃 튀는 신경전을 지켜보던 손주혁.

그간 암암리에 들려오던 소문의 실체를 확인했다.

오정 일가 자식들뿐만 아니라 대부분 재벌가 형제들 사이엔 자연스럽게 긴장감이 흘렀다.

회사 규모는 한정적이었고 각 구성원들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막내라고 아빠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세상 무서운 줄을 이렇게 모르니 어쩌니.”

또로로록.

와인을 재차 따르며 임아현은 은근히 임윤아를 깎아내렸다.

“언니는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지금의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해?”

“그럼 아냐? 넌 편하게 공부만 했잖아. 오빠와 언니한테 직접적으로 비교 당하면서 커온 나와 입장이 다르잖아.”

“스스로 잘했어야지. 오빠와 큰언니는 아빠 뜻을 어긴 적이 없어.”

“흥! 웃기네. 네가 그동안 있었던 집안일들을 다 알기나 해?”

임아현이 코웃음을 쳤다.

“잘난 재계 황태자의 화려한 과거는 지금도 진행 중이고, 큰언니는 평안한 결혼생활이나 하면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 둘 다 완전 웃겨. 코미디가 따로 없어.”

“언니!!!”

임윤아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외인까지 합석한 자리에서 집안의 치부를 멋대로 까발리는 임아현이 못마땅했다.

“정색하지 마. 이 바닥에 소문 쫙 깔렸어. 너도 마찬가지 아냐? 남자와 눈 맞아서…….”

“임아현!!!”

임윤아가 발끈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남자?’

내심 임윤아를 점찍고 있던 손주혁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소문에는 분명 조용히 공부나 하는 것으로 알려진 임윤아였다.

임아현의 지금 발언은 그런 임윤아에게 남자가 있다는 소리다.

“임아현? 술맛 확 떨어지게…….”

임아현이 임윤아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파바바밧.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이어졌다.

꾸욱 입술을 깨무는 임윤아.

“나 갈게. 회사에서 봐.”

임윤아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백을 챙겼다.

“가든지 말든지.”

“…….”

그 모습을 임아현이 이죽거리며 노려봤다.

냉정하게 돌아서던 임윤아가 손주혁을 봤다.

“실례가 많았어요.”

“붙잡고 싶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조만간 정식으로 만나 뵙겠습니다.”

“…….”

손주혁을 말없이 바라보는 임윤아.

“그럼.”

임윤아는 짧게 고개를 숙인 후 룸에서 빠져나갔다.

닫히는 문 사이로 찬바람이 횅하니 불었다.

“기집애. 지는 뭐 특별히 고결한 척하기는.”

임윤아의 반응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임아현.

“이제 나…… 편하게 술 마신다.”

임윤아가 떠나자 손주혁이 가면을 벗었다.

턱하니 임아현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 앉는 손주혁.

거침없이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와인을 마셨다.

“이제야 술 맛 땡기네.”

임아현이 붉은 입술을 나풀거리며 고혹적으로 웃었다.

준비한 미끼를 던졌고 예상대로 손주혁이 그것을 물었다는 걸 알았다.

이제 남은 건 임아현만을 위한 시간.

“동생, 남자 있어?”

“왜? 관심 있어?”

“어.”

“뭐야? 손주혁! 너 변했다.”

“노친네가 장가가란다. 때가 된 것도 같고.”

“놀 것 다 놀고 장가는 장가대로 가시겠다……. 뭐 그것도 수순이지.”

임아현도 그랬듯 과거 문란한 생활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날 청산의 길.

재벌 일가 직계 후손들 대부분이 한창 젊은 시절을 뜨겁게 보냈다.

질릴 만큼 놀다보면 어느 날 모든 게 귀찮아질 때가 온다.

그 시점이 오면 자연스럽게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고 가업에 뛰어든다.

일찍이 놀아본 만큼 그간 누려온 풍요를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과 명예가 꼭 필요하다는 걸 빨리 깨닫는 것이다.

“누구야? 재벌이야?”

손주혁의 눈빛에서 집요함이 엿보였다.

“재벌이라……. 그건 아니야.”

“정치계 쪽?”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손주혁.

“그것도…… 아니야.”

묘한 표정으로 웃으며 손주혁을 바라보는 임아현.

“뭐야? 동생이 만나는 남자 정체?”

“투자자. 그것도 완전 잘나가. 우리 아빠가 떨었을 만큼.”

“투자자? 설마…… 월가?”

“아니.”

“그럼?”

“장태산이라고…… 들어봤어?”

“뭐, 뭐라고! 장태산!!!”

***

괴물?

세계적 투자자가 나를 괴물이라고 호칭했다.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와 점심 한 번 같이 먹기 위해 줄을 선 자들이 엄청났다.

그 위대한 인물 로저스가 야심한 밤에 나를 찾아왔다.

남자는 노년에 접어들었음에도 눈동자가 순수한 아이처럼 반짝였다.

그만큼 호기심이 많고 정신이 맑다는 증거였다.

“들어가시죠.”

사무실로 안내했다.

“커피 준비하겠습니다.”

유세라 상무가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커피는 언제나 사랑입니다. 감사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표하는 바비 로저스.

스르릇.

사무실 문이 열렸다.

여러 대의 모니터가 책상 가득 놓여 있었지만 나름 검소해 보이는 공간.

그런 공간을 로저스는 천천히 둘러봤다.

“이곳이 다니엘의 벙커인가요?”

“네.”

“흐음……. 내가 너무 기대한 것 같군요.”

“괴물이 사용하는 공간치고는 소소하죠?”

“직원도 몇 명 없는 것 같고…….”

로저스 역시 나에 대해 정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눈치다.

“내가 있습니다.”

“???”

간단한 대답에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로저스.

“로저스. 당신의 현 위치에 서기까지 타인에게 중요한 결정을 대신 맡긴 적이 있습니까?”

“…….”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내 적이 된다.’”

조용히 나의 두 눈을 직시하는 로저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러더니 갑자기 대소를 터트렸다.

“대단합니다. 역시 기대 이상입니다.”

이미 깨어 있는 자들과는 굳이 많은 말을 나눌 필요가 없는 법.

나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은 로저스는 무척 즐거워했다.

똑똑.

“들어와요.”

유세라 상무가 테이블에 커피를 세팅했다.

“쿠바 크리스탈이라는 품종이에요. 야심한 시각에 마시기 좋은 원두입니다.”

“오! 향이 기가 막혀요.”

로저스가 커피 향을 맡더니 만족해했다.

“그럼.”

간단한 간식으로 쿠키까지 곁들인 커피를 놓고 유세라 상무가 사라졌다.

“다니엘은 행운이 많이 따르는 것 같군요.”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방금 나간 직원한테서…… 진심이 느껴졌어요.”

대체로 투자자는 감이 빨랐다.

늦은 시간임에도 퇴근하지 않고 연장 근무 중인 유세라 상무.

그녀의 행동에서 자신의 일처럼 매순간을 대하는 마음을 읽어냈다.

“그런 점에서는 복이 많습니다.”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늦은 저녁 시각에 창밖 야경을 배경삼아 마시는 커피 한 잔.

하늘에 걸린 초승달이 운치를 더했다.

“다니엘.”

간단한 잡담이 오간 뒤 본격적인 얘기가 나올 타이밍.

로저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어제 내가…… 누구를 만나고 온 것 같나요?”

뜬금없는 질문이다.

“제가 알아야 할 인물을 만났나요?”

“물론이에요. 한국은 물론 다니엘에게도 엄청난 행운이 될 거에요.”

확신에 찬 시선을 보이는 로저스.

그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 그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

툭 내뱉은 나의 한마디에 로저스가 화들짝 놀랐다.

대신 나의 입가에는 여유 있는 미소가 번졌다.

지난 생에 로저스의 방북 뉴스가 보도되었을 때 일순간 증시에 변동이 있었다.

그때의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놀랍군요. ……비밀 접촉이었는데 어떻게 알고 있나요? 한국의 정보기관이 전해줬나요?”

물론 국정원도 이미 파악하고 있을 내용이다.

“아닙니다.”

“그럼…….”

“로저스가 저에게 관심을 갖고 있듯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마워해야 할 것 같군요. 세계적 투자자가 저를 그렇게 눈여겨보고 있었다니.”

당황스러움도 잠시.

여유를 되찾으며 빙그레 마주 웃어 보이는 로저스.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김정은 위원장.

조부와 부친의 뒤를 이어 3대째 독재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의 지도자.

형들을 제치고 후계자가 되었을 만큼 북한 내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스위스 교육을 받아서인지 세상을 보는 시각도 남달랐다.

중국과 베트남식 개혁 개방 정책 선택해 나름 경제를 발전시키려 했다.

그러면서도 공산당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는 2020년까지 꾸준히 여러 차례의 대형 사고를 쳤다.

핵무기는 물론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기까지 했다.

미국도 선뜻 무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한 국제 마피아 보스 같은 존재 김정은.

한국 내 국민들은 그를 날려버리라 목소리를 냈지만 세계 정상들 누구도 그를 가볍게 상대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핵무기는 ‘너 죽고 나 죽자’의 막판 전쟁 수단이었다.

“투자.”

로저스의 간단한 대답 한마디.

“……가능할까요?”

“아마 그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몇 년 동안 싱가포르에서 주식과 보험, 부동산 같은 자본주의 상품들의 판매 전략을 배우기 위해 인재들을 보냈어요. 그는 변화를 준비하고 있어요.”

로저스는 거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겠죠.”

“다니엘 장.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미국과 한국 정치권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막대한 북한의 개발 이익을 선점할 수 있어요.”

역시 돈 냄새를 귀신같이 맡았다.

그런 이유로 로저스는 세계적 투자자가 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5년 정도 지나면…… 세계 대공황에 필적할 만한 폭풍이 몰아칠 거예요. 자본주의 시장이 만들어낸 거품이 터질 때가 된 거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 또한 놀라웠다.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가시화 되는 세계적 대위기.

“아마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위기들 중 가장 센 놈이 될 거예요. 그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거품이 잔뜩 섞인 샴페인이…… 펑! 하고 터지면……. 그건 축제가 아니라 저주의 서막이 될 거예요.”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살아 있는 현자의 예견.

최대한 말을 아꼈다.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왔던 2020년의 실상.

이제 그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한국에 남아 있는 마지막 기회에요.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믿지 말아요.”

담담하게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바비 로저스.

나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인간은 본인의 주머니와 곳간이 비면…… 가장 먼저 이웃집 담을 넘습니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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