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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7장. 마녀의 와인. (784/1,284)

787장. 마녀의 와인.

“갑자기 웬 술?”

임윤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장태산의 여동생 장주아의 졸업식 날이다.

회사에 중요한 임원 회의가 잡혀 있어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저녁이라도 같이 먹고 싶었지만 가족들만 모인다는 소식에 아쉽지만 함께하지 못했다.

그때 때마침 걸려온 언니 임아현의 저녁 술자리 초대.

요즘 들어 사사건건 태클이 심해지긴 했지만 언니는 언니였다.

어차피 언제라도 한 번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필요는 있었다.

사업적인 부분에서 부딪치게 되면 아직은 임윤아 쪽이 손해였다.

장태산이 뒤에 든든하게 있긴 하지만 임윤아는 자신의 힘으로 해내고 싶은 욕심도 갖고 있었다.

약속 시간을 잡았다.

일이 끝나는 시간은 저녁 9시.

약속 장소는 거리가 가까웠다.

청담동에 위치한 VIP 와인 바.

임윤아도 몇 번 가봤던 곳으로 강남 야경이 볼 만했다.

딸깍.

지하 주차장에 차를 파킹하고 내렸다.

땅이 비싼 강남이지만 멤버십을 취급하는 곳답게 주차 공간이 널찍한 게 인상적이다.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안전과 보안도 철저했다.

또각또각.

지하라 해도 찬바람은 어쩔 수 없었다.

임윤아는 한껏 옷깃을 여미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띵.

지하 3층 주차장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지잉.

부드럽게 열리는 문.

임윤아는 빠르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곧장 11층을 눌렀다.

스르륵.

다시 부드럽게 닫히는 문.

“잠시만요!”

그때 밖에서 들려온 다급한 남성의 목소리.

임윤아는 그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열림 버튼을 눌렀다.

“감사합니다.”

롱코트를 멋스럽게 입은 키가 훤칠한 남자가 탔다.

‘뭐야? 층수는 왜 안 눌러?’

남자는 힐끗 층수 버튼을 쳐다보는가 싶더니 가만히 서 있었다.

위이이이잉.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올라갔다.

띵.

- 11층입니다.

기계의 단조로운 목소리 뒤에 열리는 문.

“먼저 내리십시오.”

남자가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후 먼저 내린 임윤아.

그런 임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자의 뜨거운 시선.

그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번졌다.

“예약하셨습니까?”

“임아현 부사장님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습니다.”

“이쪽입니다.”

와인바 실내는 적당히 따뜻했다.

깔끔한 와이셔츠 차림의 남자가 안내했다.

‘뭐야? 왜 따라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남자는 말없이 임윤아의 뒤를 따라왔다.

안내를 맡은 직원도 일행인 줄 아는 눈치였다.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드는 임윤아.

“좋은 시간 되십시오.”

가장 안쪽에 위치한 룸으로 안내한 후 고개를 숙이는 남자 직원.

임윤아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곧장 문을 열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

스윽.

턱.

그때 닫히는 문을 누군가 붙들었다.

뒤를 따라오던 남자의 손이었다.

“뭐죠?”

임윤아가 불쾌한 듯 까칠하게 물었다.

미국에서 종종 경험했던 낯선 남자들의 행동과 비슷했다.

VIP 와인바에서 이런 식의 태도를 보이는 남자와 맞닥뜨릴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뭐야? 두 사람이 왜 같이 들어와?”

그때 약속 장소에 먼저 와 있던 임아현이 두 사람을 아는 체했다.

‘아는 사이야?’

임윤아가 남자를 다시 한 번 돌아봤다.

상당히 잘생긴 외모의 남자였다.

자신만만함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에서 풍겼다.

딱 봐도 가는 곳마다 여자깨나 울리고 다녔을 외모와 풍기는 분위기.

걸친 옷과 액세서리 또한 일반인들 사이에는 좀체 알려지지 않은 최고급 브랜드 상품이었다.

“저도…… 초대를 받고 왔습니다.”

“네…….”

“어서 들어와. 혼자 술 마시기 심심하잖아.”

이미 와인 한 병을 비운 임아현.

양볼이 발그레 달궈진 상태로 두 사람을 맞았다.

룸 한쪽에 넓게 난 창밖으로 강남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루에 최소 수백만 원대 매출 정도는 올려줘야만 차지할 수 있는 자리.

회사에서의 차림과 달리 옆트임이 심한 짧은 스커트를 입고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임아현.

애가 딸린 유부녀였지만 오늘은 누가 봐도 미혼 여성처럼 보였다.

붉은 립스틱이 유난히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화장도 진했다.

술에 살짝 취한 데다 달달한 주향이 임아현 입에서 연신 내뱉어졌다.

“언니 뭐야. 벌써 취한 거야?”

“아니. 이제 시작이지. 애들도 아빠 따라 친가에 갔고…… 오늘 이 시간부터 자유!”

과거 화려하게 싱글 라이프를 즐겼던 임아현이 오랜만에 주어진 시간에 자유를 외쳤다.

부사장이라는 공식 타이틀을 내려놓은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여전하구나.”

남자가 그런 임아현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넌 더 젊어진 것 같다.”

‘두 사람이 친구인 거야?’

임윤아는 아직 정식으로 소개를 받지 못한 남자를 바라봤다.

“빨리 올 것이지…… 왜 이렇게 늦었어?”

임아현이 남자친구를 대하듯 낯선 남자를 추궁했다.

“노친네 비위 좀 맞혀주고 왔다.”

남자는 귀찮은 누군가를 만나고 온 듯한 말을 내뱉었다.

“여기는 내 동생 윤아. 그리고…….”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서울 중앙지검 검사 손주혁입니다.”

‘검사?’

보이기에는 놀고먹는 모 그룹 자제 같은 느낌이 강한 남자.

그가 자신을 서울 중앙지검 검사라고 밝혔다.

“……오정물산 임윤아 상무에요.”

손주혁이 먼저 내민 손을 잡는 임윤아.

파바밧.

그 순간 임윤아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손주혁.

“미인이십니다.”

그는 오정그룹 오너 일가의 딸 임윤아를 보며 가볍게 외모를 칭찬했다.

그 정도로 집안이 대단하거나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둘 중 하나.

임윤아는 손에서 전해지는 기분 나쁜 뜨거운 기운에 인상이 굳어졌다.

‘걸려들었어! 호호호.’

임아현은 임윤아을 뜨겁게 바라보는 손주혁을 지켜보며 내심 환호성을 질렀다.

모두 다 철저하게 계획된 시나리오였다.

두 사람이 같이 들어올 줄은 몰랐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평소에도 욕심이 많고 잘난 맛에 사는 손주혁이었다.

같은 초등학교 출신으로 종종 만나 어울렸다.

한때 썸을 타며 뜨거운 밤도 보냈던 사이.

재벌가 자제들이라고 사는 게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서로들 연애를 했다.

평범한 일반인들과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

사는 세상도 누리는 문화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 무리들 중에서도 꽤 잘난 손주혁.

재벌 후손은 아니지만 웬만한 이들은 손주혁에게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그는 리앤장의 미래 후계자.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삼대 권력 축이자, 법조계를 움켜질 미래의 주인인 셈이다.

임아현도 한때 결혼 상대자로 고심했던 적이 있지만 손주혁 쪽에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

본인의 사생활이나 행실과 달리 아내로는 참한 여자를 원했다.

임아현의 과거를 사소한 것까지 전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손주혁이 원하는 조건에서 탈락.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임아현은 복수를 꿈꿨다.

그리고 오늘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올무에 엮었다.

“손은 그만 놔주시죠.”

손주혁을 차갑게 대하는 임윤아.

“아! 미안합니다. 워낙 부드러워서…… 잡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손주혁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미안함을 표했다.

대꾸하지 않는 임윤아.

‘이것 봐라?’

손주혁은 그런 임윤아의 행동에 흥미가 돋았다.

오정 임성철 회장의 막내딸에 관한 소문은 그도 들어 이미 알고 있는 정보들이 있었다.

하버드 경영학과에 입학해 예일대 미술사 석사로 전공을 바꿨다는 미모의 인재.

재벌가 자제들 모임에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공부밖에 모른다고 소문이 돌았던 임윤아.

손주혁의 승부욕을 은근히 자극했다.

할아버지 집에서 저녁은 먹고 나온 상태다.

잠까지 자고 올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할아버지를 인정하지만 존경심까지 갖고 있지는 않았다.

사는 게 다 그렇듯 적당히 아부를 하며 시간을 때웠다.

며칠 동안은 휴가를 받은 터라 시간도 충분했다.

때마침 오정의 임아현에게서 연락이 왔다.

애 딸린 유부녀였지만 여전히 매력이 넘치는 그녀.

가벼운 마음으로 술이나 한잔할까 하고 나온 터였다.

그런 자리에서 예상치 못한 월척을 만났다.

도도한 기품과 귀여운 외모, 뭐니 뭐니 해도 집안은 물론 머리까지 좋았다.

한마디로 완벽했다.

손주혁이 생각하는 이상형과 모든 조건이 정확히 일치하는 임윤아.

그런 임윤아가 은근히 매력을 풍기며 튕겼다.

나름 선수인 손주혁이 그 느낌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손주혁이 찍어서 넘어가지 않은 여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만 불꽃 튀기고…… 술이나 마시지. 나 오늘 제대로 취할 테니까 둘이서 책임져. 윤아야 알았지?”

임윤아가 도망갈 길을 미리 차단하는 임아현.

“하아.”

임윤아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장태산과 너……. 반드시 내가 찢어 놓을 거야!’

임아현은 입안에 와인을 가득 채우고 사악한 계획을 짰다.

핏줄보다 그룹 지분이 먼저였다.

그리고.

“첫 잔은 원 샷인 거 알지?”

임아현이 와인병을 들었다.

쪼로로록.

그리고 각자의 빈 잔에 와인을 듬뿍 채웠다.

사악한 마녀가 직접 채워주는 와인이었다.

***

“악신의 그물이라…….”

졸업식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알림음의 내용.

한마디로 문효진의 접근이 순수하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접촉 사고 자체가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음모라는 말이었다.

문효진이 어디까지 개입됐는지 모른다.

하지만 신들은 그녀를 악신의 그물에 걸린 자로 명명했다.

“만나보면 알겠지.”

졸업식은 늦지 않고 도착해 무사히 끝났다.

2년 후배인 여동생의 졸업식.

부모님은 학사모를 번갈아 쓰고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셨다.

대한민국 부모님 누구나 꿈꾸는 한국대 학사모.

주아가 제대로 효도했다.

가족과 함께 미리 예약한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저녁은 집으로 돌아와 내가 직접 요리를 해 대접했다.

모두가 외식보다 집밥을 강력하게 원했기에 기꺼이 수락했다.

오늘은 오로지 우리 가족들만 모였다.

예비 며느리처럼 대하는 임윤아도 오지 못하게 했다.

앞으로 가족들 다들 더 바빠질 것이라 가족들 간의 정을 나눌 시간이 필요했다.

맛있는 요리에 술잔이 오갔다.

중간 중간 피아노도 치고 노래도 불렀다.

내가 그토록 상상해 왔던 완벽하게 행복한 가족의 모습.

웃고 떠들고 마시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리고 늦은 저녁.

회사에 나왔다.

오늘은 매우 중요한 약속이 잡혀 있었다.

싱가포르에 둥지를 틀고 있는 괴짜 투자자.

그가 나를 만나러 오는 중이다.

삐이잇.

- 회장님.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대기 중이던 유세라 상무가 인터폰으로 손님 도착을 알려왔다.

스르릇.

직접 사무실 밖으로 마중을 나갔다.

사무실 안에 앉아 기다리는 건 현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오! 사무실 야경이 매우 좋아요.”

배가 살짝 나온 노중년의 미국 남자.

그가 창밖을 둘러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뚜벅뚜벅.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로저스.”

스윽.

나의 환영 멘트에 창밖 풍경에서 시선을 돌리는 바비 로저스.

씨익.

그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제야 보는군요. 내 꿈속에 찾아왔던 괴물을…….”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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