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6장. Accident!(2).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스으윽.
손국중의 집 거실.
손대균의 아들 손주혁이 할아버지 손국중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흐뭇한 표정으로 손주혁의 인사를 받는 손국중.
“건강하구나.”
“할아버님 덕분에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손주혁은 아버지 손대균을 닮아 키가 크고 지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이마는 훤칠했고 두 눈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엄마의 우성 유전자를 골라 흡수한 듯 출중한 외모의 멋진 청년이 됐다.
삼십을 넘긴 나이였지만 아직도 언뜻 보아서는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
한국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검사가 됐다.
군법무관 코스를 밟고 제대 후 국가 지원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무난히 유학을 마치고 오늘 귀국했다.
미국 유학 중 로스쿨에서 변호사 자격증까지 획득한 인재.
손국중은 손자를 자애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손대균이 사표를 던지고 프랑스로 도피했을 때도 끄떡없었던 이유가 다 손자가 있어서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정성을 쏟았고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잘 성장했다.
손국중이 원했던 대로 부족한 것 없이 모든 걸 갖췄다.
“발령은?”
“중앙지검 조세범죄수사부입니다.”
“경험을 쌓기에 좋은 곳이다.”
“미국에서도 심도 있게 공부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에 대답하는 손주혁은 거침이 없었다.
모두가 어려워하는 할아버지 손국중.
하지만 손자 손주혁에게만은 한없이 관대했다.
능력과 실력을 겸비한 만큼 모든 면에서 용서가 됐다.
“도와줄 건 없고?”
“할아버지가 계시는 것만으로도 든든합니다.”
모범 답안이나 진배없는 손주혁의 대답에 손국중의 얼굴에 절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아들 손대균 때문에 받았던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한순간 다 날아갔다.
‘그래…… 이제부터 손씨 가문은 주혁이가 네가 이끄는 게야.’
손국중은 마음을 굳건히 했다.
“……결혼해야지.”
“아직 마음에 둔 사람이 없습니다.”
“할애비 나이가 있으니 되도록 빨리 증손주를 안겨 주거라.”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사실 손주혁은 만나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여러 명.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여성들을 만나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잘난 가문과 학벌, 인물까지 빠지지 않는 손주혁.
당연히 주변에 내로라하는 미인들이 알아서 끓었다.
지금까지 실패를 모르고 살았다.
뛰어난 머리와 타고난 집중력, 그리고 끈기까지. 제 능력에 스스로도 만족했다.
“생활은 어디서 할 거냐?”
“독립할 생각입니다.”
“집은?”
“할아버지가 대학교 입학 선물로 주신 오피스텔에 짐 다 풀어놨습니다.”
“잘했다.”
손국중은 믿음직스러운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배신자나 진배없는 아들 손대균과 같은 공간에 두고 싶지 않았다.
섣불리 함께했다가 정신이 오염될 수도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유리와 있더군요.”
“…….”
손주혁의 말에 손국중이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 가출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대의를 모르는 놈이다.”
손국중의 목소리에서 언짢은 기색이 비쳤다.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할아버지의 아들이자 제 아버지입니다.”
“사람 잘 만나야 된다.”
뼈가 담긴 손국중의 말.
‘소문이…… 사실이었어.’
손주혁은 어린 시절부터 머리가 비범했다.
할아버지의 표정만 봐도 대충 상황이 짐작됐다.
직속으로 자신에게 전해진 고급 정보.
내용인즉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서 모든 것을 거둬들였고 아버지는 사표를 냈다.
엄마를 통해 사실 유무까지 확인한 손주혁.
“전…… 끝까지 할아버지 편입니다.”
손주혁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할아버지 심기를 달랬다.
가문의 뿌리가 친일파라는 사실 정도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손주혁이 대학교 재학 당시만 해도 아직 학내에는 민주화를 외치는 선배들이 꽤 많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세상 변화에 합류하지 못하고 있던 그들.
암암리에 그들에게 타깃이 됐던 손주혁이다.
아버지 손대균과 달리 집안에 대한 사실을 쿨하게 받아들이고 이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신이 누리는 모든 혜택들이 할아버지의 노고라는 걸 인정했다.
오로지 가족을 살리고 살아남기 위해 친일파가 되고, 독재자에 충성했던 할아버지 손국중.
손주혁은 자신의 입장이 할아버지와 같았어도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배고픈 정의는 언제나 입만 아픈 법.
풍요로운 물질을 충분히 누리며 산 손주혁에게 친일과 독재자는 별다른 감정적 문제를 일으키지 못했다.
자본주의가 삶의 기준이 되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내내 그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이상을 따르기에는 세상의 변화가 심하게 요동쳤다.
남을 짓밟지 않고서는 탑에 올라설 수 없는 피라미드 구조.
손주혁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최상층에 오르리라 다짐했다.
“고맙구나. 내가 손자 하나는 잘 키웠어.”
“저녁은 이곳에서 먹고 가겠습니다.”
“그럼 나야 좋지.”
“바둑도 한 수 청하겠습니다.”
“봐주지 않을 거다.”
“할아버지나 예전처럼 무르지 마십시오.”
입안의 혀처럼 살갑게 구는 손주혁.
그런 손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손국중.
입가에 핀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할아버지…….”
그때 조용히 손국중을 부르는 손주혁.
“할 말 있더냐?”
“장태산이…… 누굽니까?”
손주혁은 궁금했던 걸 솔직하게 물었다.
학교 교수님들과 선후배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이름 장태산.
언젠가 엄마는 유리의 파리행이 다 장태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 아버지의 파리행은 물론 사직서 사건까지 그 장태산과 연관 있다고 들었다.
“흐음…….”
선뜻 대답을 해주지 못하는 손국중.
평온했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어느새 눈가에 은은한 분노가 비쳤다.
***
“도킹 성공.”
한국대 학내 도로.
두 대의 고급 스포츠카가 추돌하는 걸 지켜보던 한 남자가 스마트폰을 통해 보고했다.
-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바로 철수.
“접수했습니다.”
명령에 스마트폰을 접으며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가는 남자.
“뭐야? 저 여자 문효진 아냐?”
“맞네. 문효진!”
“남자도 배우인가?”
“잘생겼다…….”
사고 현장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차에서 막 내린 여배우를 보기 위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기 시작했다.
***
문효진?
당황스럽게도 차에서 내린 여자는 한국대가 배출한 미녀 배우로 소문이 자자한 문효진이었다.
요즘 핫하게 뜨고 있는 드라마의 주연급 조연을 맡았다.
IQ가 150이 넘는다고 알려진 그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문효진이 내 차를 뒤에서 받았다.
단발에 청바지 차림이다.
거기에 새빨간 하이힐이라니.
아직 날씨가 쌀쌀한데 재킷도 걸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 이거 어쩌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리는 문효진.
그 모습이 청순하고 순수해 보였다.
지금 출연 중인 드라마 배역과도 완벽한 싱크로율을 보였다.
여배우 전매특허인 선글라스도 착용하지 않았다.
얼굴에 드리워진 감정은 오로지 미안함뿐.
“괜찮습니다.”
마침 차를 바꿀 때가 되긴 했다.
로버트 라이언이 신상 차를 몇 대 보내준다고 했다.
“진짜 문효진이야…….”
“실물이 더 예쁜 것 같아.”
“사인 받을까?”
“지금 사고 났잖아.”
“그래도…….”
주변에 몰린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날이 날이니만큼 좋은 구경거리였다.
파바바밧.
성질 급한 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여배우의 사생활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
“저 남자도 배우야?”
“개간지 훈남.”
“지금 화보 찍는 거 아냐?”
사람들의 스마트폰이 나에게도 향했다.
서둘러 피해야 할 상황.
이런 걸로 인터넷에 얼굴 팔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입에서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빠아앙! 빠앙!
접촉 사고로 차가 밀리면서 신경질적인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법대 주차장으로 오시죠.”
“네.”
다시 운전석에 올라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사고에 대한 마무리는 지어야만 했다.
부우우웅.
차를 몰아 혼잡한 도로를 빠져 나갔다.
그 뒤를 천천히 따라오는 문효진의 차.
- 선과 악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순간 갑자기 들려온 알림음.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돼 있지 않아 무슨 뜻인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다만 문효진과의 차량 접촉 사고 때문에 들린 것 같았다.
그 말은 이번 사고가 범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
끼익.
법대 주차장에 도착했다.
조용히 뒤따라와 주차를 한 후 차에서 내린 문효진.
똑똑.
그녀가 먼저 조수석 창문을 노크했다.
“저…… 차에 타서 얘기하면 안 되나요?”
로스쿨로 바뀌었지만 아직 졸업 중에 있는 학부생들이 남아 있었다.
법대 쪽도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
“타십시오.”
티릭.
조수석 잠금장치가 풀렸다.
딸깍.
쏜살같이 차에 조수석에 오르는 문효진.
찬바람과 함께 은은한 꽃향기가 차 안으로 훅 밀려 들어왔다.
“…….”
얼떨결에 차량에 동승하게 된 여배우.
스캔들 나기 딱 좋은 그림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운전이 서툴러서…….”
문효진이 다시 사과를 했다.
“그럴 수도 있죠.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그쪽은 괜찮으세요?”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법학과 08학번입니다.”
“전 12학번이에요. 태산 선배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아직 학부생인 그녀.
드라마에서 맡은 배역인 유치원 여선생님처럼 생기발랄하고 깜찍했다.
“그러십시오.”
나, 남자다.
우연한 만남이지만 미녀 여배우와의 이런 대화는 유쾌했다.
“수리는 어떡하죠? 보험회사에 사고 접수할게요.”
“됐습니다. 큰 사고도 아닌데 번거롭습니다.”
“이 차…… 비싸잖아요.”
내 차는 문효진 차량보다 몇 배 더 비싼 수입차.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문효진이 울상을 지었다.
“그럼 사고처리는 이것으로 마무리 하죠. 뺑소니 신고 안 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나야 괜찮지만 상대는 잘나가는 현역 여배우다.
법대 주차장에 이렇게 앉아 있다가 자칫 오가는 사람들 눈에 띄어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그녀만 손해다.
“그럼 찍어주세요.”
“네?”
“번호요.”
문효진이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그녀를 닮아 아기자기한 스티커로 포장된 스마트폰 케이스.
잠시 고민이 됐다.
“밥 한 번 살게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요.”
문효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계속 거부하기는 힘든 상황.
완강하게 거절하면 진짜 상처받아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스마트폰을 받았다.
그리고 번호를 찍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스마트폰을 다시 건네주자 꾸벅 인사하는 문효진.
그 순간.
- 악신의 그물에 걸린 그녀를 구해 주시겠습니까?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