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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3장. 미워도 자식. (780/1,284)

783장. 미워도 자식.

“장태산……. 도대체 넌 뭐냐…….”

호텔 스위트룸 창밖으로 붉은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를 끝내고 호텔에 들어온 손대균.

손에는 와인잔이 들려있다.

여전히 술이 고팠다.

아침이 밝아오는 시간인데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아내는 딸을 보기 위해 프랑스에 가 있는 상황.

텅 빈 허전한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셨지만 쉽사리 취하지 않았다.

이럴 땐 다른 사람들처럼 정신 줄을 놓고 싶었다.

긴 세월 동안 긴장을 한시도 늦추지 못하고 살아온 몸과 정신.

이미 오랜 습관이 되어 잠깐 취해 흐트러지는 것도 스스로 허락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버지…….”

지금까지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지만 본격적으로 장태산을 향해 아버지가 칼을 빼들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아버지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한 번 목표하면 끝장을 보는 집요한 성격을 갖고 있는 아버지 손국중.

일제시대 때부터 그 살얼음판 같은 시절을 다 보내며 승승장구해 오늘에 이르렀다.

시대를 거듭해 오는 동안 법원과 검찰 핵심 라인이 모두 아버지 손국중의 하수인이 되었다.

일송회 회원들 대부분이 정치와 언론계까지 빈틈없이 장악했다.

그 가운데 미약하나마 장태산의 앞을 막아주던 손대균.

그 가림막이 사라졌다.

남아 있는 건 진검승부뿐.

누군가 한 사람은 피를 봐야 끝낼 수 있다.

“휴우.”

손대균은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가 다칠 가능성이 더 컸다.

자식 된 입장에서 아무리 친일파라고 해도 부모는 부모일 수밖에 없었다.

또 장태산은 자신이 진심으로 아끼는 후배.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열혈 애국 청년이었다.

살면서 수많은 인간 군상을 만나왔던 손대균이 봐도 장태산은 진짜 배기였다.

그걸 자신보다 먼저 알아봤던 딸 손유리.

“나이를 헛먹었어…….”

손대균은 먼 타지에 있는 딸을 생각하자 또 다시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젊은 시절 자신도 경험한 그 나이 때의 뜨거운 감정.

그런 딸의 순수했던 감정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눌러버렸다.

예전보다 사이가 좋아지기는 했지만 딸에게는 평생 남아 있을 상처였다.

그러는 사이 장태산의 주변에는 늘 미모의 여인들이 끊이지 않고 맴돌았다.

“이 나이 먹고…… 쪽팔리게 도망칠 수도 없고.”

장태산이 제시한 조건이 만만치 않다.

직접 아버지를 만나보고 난 뒤 노선을 정하겠다고 선언한 것.

대쪽 같은 아버지가 장태산을 직접 만나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 뻔했다.

그래도 두 사람이 만날 자리를 주선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가문을 위해서.

“태산아. 너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겠구나.”

장태산의 숨은 능력과 재능이 대단했지만 어둠 속에서 규모를 키운 더러운 권력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그 내막을 낱낱이 알고 있는 손대균으로서는 장태산의 입지가 우려스러웠다.

띠리리리리리.

그때 울리는 단조로운 스마트폰 벨소리.

스윽.

스마트폰에 뜬 반가운 이름.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 아빠!!!

명랑한 목소리로 반갑게 소리치는 사랑스러운 딸.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아직 안 잤어?”

손대균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늦게나마 깨닫게 된 부모 자식 간의 교감.

- 엄마랑 이제 들어왔어요.

“밤늦게 돌아다니지 마. 파리라고 치안이 좋은 건 아니다.”

- 아빠도 그렇게 생각하죠? 이렇게 아름다운 미인들을 먼 타국에 던져 놓고 마음이 불편하죠?

손유리가 은근한 농담을 걸었다.

“유리 너도 너같이 예쁜 딸 낳아 봐라. 그때는 아빠 마음 알 거다.”

- 그렇게 걱정되면…… 오세요.

“응?”

- 아빠. 백수된 거 여기까지 소문이 난 거 있죠~.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난 거야?”

- 엄마가 아빠 주변에 스파이 쫙 뿌려 놨잖아요.

“그거 무서운 발언이다.”

- 오세요. 백수 된 기념으로 가족여행 가요. 아빠하고 엄마랑 여행하고 싶어요.

손유리가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유혹했다.

“갈까?”

손대균도 적적해지던 차에 귀가 솔깃했다.

장태산이 아버지와의 자리를 만들어 달라 청했지만 당분간 시간이 좀 필요한 일.

지금은 당장 복잡한 머릿속을 식힐 시간이 더 절실하게 필요했다.

아직 길게 남아 있는 인생 2막도 생각해 봐야 했다.

누가 뭐라 해도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

좀 더 먼 미래와 제2의 인생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시점임은 분명했다.

- 아빠. 여행은 여행이 목적이 아니라…… 용기의 문제에요. 아빠도 이제…… 아빠 인생 사셔야죠. 용기를 내봐요. 저처럼.

천천히 말을 내뱉는 손유리의 목소리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딸의 진심에 울컥, 손대균의 심장이 뜨거워졌다.

과거 자신이 매몰차게 내쫓았던 딸이 조언하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여행.

강제로 쫓기듯 유학길에 오르던 손유리는 그 순간의 상황을 거부하지 않았다.

딸이 겪었을 혼란과 방황, 그리고 용기.

어느새 품안의 딸은 스스로 진짜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 아빠가…… 용기를 내보마.”

한없이 가라앉던 손대균의 마음에 힘이 샘솟았다.

지치고 힘든 시간에 들려온 구세주 같은 딸의 조언.

마치 신이 자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처럼 생각됐다.

- 보고 싶어요. 우리 아빠!

비타민 같은 손유리의 마지막 말.

손대균의 입가에 좀 더 환한 미소가 빙그레 지어졌다.

***

“회장님을 뵙습니다.”

“앉으십시오.”

“감사합니다.”

내가 만난 대웅맨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상관에게 절대 복종했다.

도운중 회장의 뚝심 경영과 함께 찬란하게 빛났던 그들의 충성스러운 과거.

아직 세상에서 사라지기에는 아까웠다.

IT시대에서는 직장 내 공평한 기회와 수평적 관계를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익 창출을 목표로 하는 기관들에서는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각각의 실적을 내기 위해서는 개인의 피나는 노력과 자발적 헌신이 필요했다.

원자재가 풍부한 타국과 달리 뛰어난 머리를 가진 인재밖에 없는 대한민국에서는 경쟁구조에 놓이는 게 어쩔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살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현실.

노력하지 않고 쉽고 편하게 풍요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일은 할 만 합니까?”

“이런 말씀 드리기 외람되지만……. 정말 행복합니다.”

대웅조선 대표로 낙점한 제문환 임시 대표.

비밀리에 대웅조선 인수 업무를 진행 중에 있다.

도도희의 추천을 받아 여러 경로로 꼼꼼한 검증을 거쳤다.

이공계 생으로 설계 파트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영업 파트 쪽도 경험이 있는 인재였다.

후배들에게도 평판이 좋았고 맡은 바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의 인물.

무엇보다 가정도 화목했다.

내 휘하에 들어와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화목도 중요한 전제 조건이 됐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 말은 교과서 안에서만 효력을 발휘하는 고사성어가 아니다.

가정도 지키지 못하는 자가 밖에서 더 큰일을 어찌 해낼 수 있겠는가.

가정을 방치하면서 맡은 일에서 성과를 내기란 쉽지 않다.

세상의 거친 바람을 견디게 해주는 방패가 바로 튼튼한 뿌리가 되어 주는 가족인 것이다.

“다행입니다.”

직원의 입을 통해 듣는 진심이 담긴 ‘행복하다’는 말에 나도 마음이 훈훈해졌다.

- 제씨 가문 조상들이 포인트를 쐈습니다.

- 카르마 포인트를 듬뿍 획득했습니다.

역시 잘 골랐다.

제씨 가문은 덕이 많은 집안인 것 같다.

예상치 못했던 포인트가 쏠쏠하게 들어왔다.

“커피 드십시오.”

유세라 상무의 고품격 커피가 준비 됐다.

“잘 마시겠습니다.”

회사에 돌아왔다.

장주시 연구소도 나름 좋지만 나의 근본은 이곳 LOR 투자법인.

이곳에서 모든 걸 진두지휘했다.

오랜만에 조용히 티타임을 가졌다.

“솔직하게…… 대웅조선 어떻습니까?”

불시에 질문을 던졌다.

“그게 무슨…….”

“제문환 대표님 같으면…… 인수하시겠습니까?”

임시 대표직을 맡고 있지만 깍듯하게 대했다.

사람은 맡은 직책에서 잠재된 힘을 발휘하기도 하는 법.

“…….”

제문환 대표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회장님. 일반 투자자라면…… 절대 인수하면 안 될 회사입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제문환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신의 대답에 확신이 있는 눈빛.

“왜 그렇습니까?”

“대외비입니다만…… 현재 대웅조선은 각종 비리로 얼룩져 있습니다.”

“비리요?”

모르는 척 물었다.

지난 생에 다니던 증권회사에서도 대웅조선에 대한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나왔다.

임원들은 기업 워크아웃 중에도 의원들과 언론사 간부들을 끼고 초호화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낙하산 사외 이사들은 거수기 노릇만 했다.

납품비리도 어마어마했다.

군함에 어군탐지기를 설치한 사건은 그 이후에도 두고두고 회자됐다.

뿐만 아니었다.

신입 채용 시 대학을 서열별로 차별해 사원을 뽑았고 알게 모르게 부정 채용도 함께 이루어졌다.

고질적인 하청업체 후려치기는 기본.

부당해고는 전문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산업은행이 소유하고 있는 준 공기업 형태라 문제점이 많지만……. 가장 핵심은 분식회계입니다.”

“분식회계!!!”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놀라는 척했다.

훗날 몇 천억도 아니고 몇 조원을 날려 먹은 대웅 조선.

그 사건 중심에 있는 대표적 인물이 나광태 현 대웅조선 사장이었다.

다 망해가는 물류회사를 인수한 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대웅조선의 자회사로 편입시켰다.

그 뒤로 일감 밀어주기를 통해 회사 가치를 뻥튀기해 배당금을 수령하고 주식으로 엄청난 이득을 봤다.

물론 혼자 다 독식하지는 못했다.

그와 연관된 권력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거물 주순자가 뒷배였다.

경제 부총리를 지낸 여당 중진 의원과 조국일보도 다리를 걸쳤다.

나광태가 저지른 사건이 터지기 전에도 전임 사장 역시 원가 축소, 매출액 및 영업 이익 과다계산으로 분식회계를 일삼았다.

그 결과 대웅조선은 상상초월의 부실에 시달렸다.

사기업이었다면 진작 책임자는 구속되고 기업은 파산했어야 했다.

하지만 대상이 대웅조선인 만큼 지역 민심이 심하게 요동칠 게 뻔했다.

대웅조선에 종사하는 정직원 수만 해도 만 명이 넘었다.

하청 업체와 비정규직 인원까지 포함하면 수십만 명이 대웅조선 그늘에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정부에서 부랴부랴 세금을 풀어 부실을 메꿨다.

수조원이 넘게 투입됐다.

다가올 2015년이 돼서야 3조원이 넘는 영업 손실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게 된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2016년에도 가뿐하게 5조가 넘는 적자를 본다.

누가 봐도 망할 집구석.

“유동부채가 15조원 가까이 됩니다. 자산은 장부가로 12조원에 불과합니다. 중국의 위안화 평가절하로 가격경쟁력도 먹히지 않습니다. 저가 수주로 계속 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걸 모두 다 은폐하고 있습니다.”

제문환 대표의 내부 고발.

“노조도 문제입니다. 과거부터 강성노조들이 가장 거세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망해가도 월급만 받으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이미 그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금속노조 소속으로…… 답이 없습니다.”

제문환 대표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했다.

대웅조선의 어용노조.

내가 생각해도 참 솔직하지 못한 조직이다.

회사가 이익을 볼 때는 배당하라 난리를 소리치고, 적자를 보게 되면 고통분담에 절대 동참하지 않는다.

지금도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수시로 파업을 일삼는 껍데기만 남은 어용노조.

“그렇군요.”

이해한 만큼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 전 양심을 속일 수 없습니다. 이대로 들어가시면…… 몇 조원은 금방 빨립니다. 차라리 그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하십시오.”

양심이 살아 있는 제문환 대표.

다시 봐도 진국이다.

도도희가 그냥 추천한 게 아니었다.

도운중 회장이 보증했을 인재.

“그럼 손을 뗄까요?”

웃으며 물었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문환 대표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백수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

나의 대답을 들은 제문환은 물끄러미 커피잔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누가 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 대웅조선 인수.

“인수하죠.”

“네?”

“몇 조면 됩니까?”

“회……장님!!!”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제문환 대표.

“미워도 자식입니다. 대웅조선은…… 미래 대한민국을 책임질 중추 뼈대 중 하나입니다. 제가…… 기꺼이 인수하겠습니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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