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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장. 계약의 조건. (779/1,284)

782장. 계약의 조건.

‘부탁?’

조윤태는 상황을 파악하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천하의 리앤장 손대균이 장태산에게 부탁을 하는 자리였다.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손대균은 법조계에서 오정의 임준형과 같은 존재로 통했다.

편한 자리 같지만 조윤태와도 지금까지 서먹하게 지내온 터였다.

선후배 관계에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길고 긴 시간 동안 현실에서는 경쟁자로 지냈다.

대한민국 곳곳에 포진한 한국대 법학과 동문들.

더러 친분을 나누며 지내는 관계도 많았지만 현실적으로 경쟁자이자 싸워 이겨야 할 적으로 지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중에서도 대한민국 법조계에서 리앤장에 이어 넘버 투에 진입한 삼우로펌은 서로 앙숙과 같은 관계.

시대를 불문하고 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리앤장의 권력은 나머지 수많은 로펌의 경쟁력을 합친 힘을 거뜬히 뛰어 넘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리앤장의 입김이 작용했다.

현 정권은 더 큰 영향을 받았다.

각 부 장관들뿐만 아니라 고위직 낙하산들 중 상당수가 리앤장에서 관리하는 자들.

대부분 탐욕에 영혼을 판 친재벌에 친일파 인사들이었다.

그런 리앤장의 황태자 손대균이 친분도 두텁지 않은 조윤태에게 갑자기 연락해 왔다.

그것도 술 한 잔 사달라는 생각지 못한 말로 말이다.

두 사람은 평소에도 술잔을 나누는 사이가 아니었다.

과거 한국대 축제 기간에 장태산의 주점에 들렀다 우연히 나누게 된 술자리가 전부.

호기심 반 의구심 반의 심정으로 이 자리에 나왔다.

뭔가 딜을 하기 위해 불러냈을 거라는 예상은 했다.

리앤장과 다퉈야 할 소송이 몇 건 대기 중에 있었다.

대개 친분도 없는 한국대 선후배 관계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술자리는 모종의 거래가 주목적인 경우가 많다.

장소도 요즘 핫하게 잘나가는 신규 텐 프로.

술과 여자는 거래를 위한 딜에서 빠질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조윤태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진짜 깔끔하게 술만 마셨다.

평소 젠틀하기로 유명한 손대균이 살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게 다였다.

대학교 재학 시절 그랬던 것처럼 친근하게 선배라 호칭하며 특유의 시원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신입생 시절부터 이미 똑똑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보여 챙겨주기 시작했던 손대균.

어느 날 알게 된 그의 신분 때문에 조윤태는 충격을 받았었다.

당시만 해도 청춘들의 피는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뜨겁게 끓던 시대였다.

친일파 독재 부역자들에 대한 반감도 어느 시절보다 극에 달했다.

손대균의 아버지 손국중에 대한 평판은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 좋지 않게 평가됐다.

민주화 시위에 참가했던 동료들 중심으로 손대균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배척당했다.

거의 CC가 될 뻔했던 여학생과도 이별했다.

이후 특유의 밝았던 미소가 그의 얼굴에서 사라지고 더 이상 선배들과 어울리지 않게 된 손대균.

세월은 무심하게 흘렀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보란 듯이 리앤장을 이끌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더 단단해졌고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존재가 됐다.

그의 힘만은 영원할 것 같았다.

그랬던 손대균이 장태산에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이 깊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조윤태 역시 낱낱이 사연을 알지는 못했다.

또로로록.

손대균이 말끝을 흐리자 장태산이 잔에 술을 채웠다.

대선배들 앞에서도 절대 꿀리지 않는 저 당당한 태도.

술 한 잔 따르는 모습에서 분위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장난기 섞인 모습은 사라졌다.

“음.”

조윤태는 혼자 짧은 신음을 삼켰다.

어쩐지 장태산은 시간이 갈수록 더 대하기가 어려워졌다.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다가도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포스에 어쩔 수 없이 조심스러워졌다.

한창 젊은 청년이지만 도리 없이 회장이란 호칭을 써야 했다.

휘하에 두고 있는 기업들 모두 쟁쟁하고 대단했다.

웬만한 규모의 그룹들 정도는 부러워하지 않을 수준이 됐다.

“어려운 부탁일 거 같습니다.”

‘어려운 부탁?’

조윤태는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두 사람만 이해하고 주고받는 심도 깊은 메시지.

“미안하게 됐다.”

손대균의 표정에 씁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양주 몇 병을 비우고 장태산에게 전화해 백수 대접하라고 소리치던 몇 시간 전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그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꽤 많은 술을 마셨음에도 정신이 또렷한 손대균.

“드십시오.”

장태산이 잔을 건넸다.

“고맙다.”

말없이 잔을 받아 든 손대균은 바로 또 잔을 비워냈다.

“…….”

독한 술을 넘기고도 신음 한마디 뱉지 않는 손대균.

룸에 무겁고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도대체 뭐야?’

전직 차장검사 출신인 조윤태도 짐작하기 힘든 두 사람만의 딜.

꿀꺽.

조윤태는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손대균이 굳이 아는 것 없는 자신을 이 자리에 부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장태산과 돈독한 관계에 있는 자신에게 무언의 힘을 보태달라는 요청.

“태산아……. 이제 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분이다.”

‘가실 날?’

자존심을 내려놓고 솔직하게 꺼내는 손대균의 의미심장한 말.

“저 때문에 백수 되신 겁니까?”

그 말을 받고 다시 질문하는 장태산.

‘태산이 때문에…… 왜?’

수수께끼 같은 두 사람의 대화에 조윤태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짤막하게 오가는 선문답 같은 두 사람의 대화에 마음만 답답한 조윤태.

연쇄 살인범을 잡아다 놓고 하는 취조 때보다 더 심력이 많이 소모됐다.

“갈 길을 정했습니까?”

“결정했지만…… 그게 참 힘들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듯 복잡한 손대균의 목소리.

“그래도 가셔야죠. 꽃길이라 여기며 걸었던 길이 절망이며 타락의 길인 것을 확인했다면 가시덤불에 가려진 정도(正道)를 두려워하시면 안 됩니다.”

어진 훈장이나 되는 듯 손대균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장태산.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휴우…….”

길게 한숨을 내쉬는 손대균.

장태산은 그 모습을 말없이 묵묵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할수록 고민만 더해가는 조윤태.

세 사람이 만들어 내는 침묵이 룸 전체에 낮게 깔리며 숨이 턱턱 막혀왔다.

“사자해원(死者解愿)이라고 했습니다. 선배님께서 정도의 길을 걸으신다면 저도 부탁 받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떨어진 장태산의 승낙.

“고맙다. 태산아.”

손대균은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했다.

‘도대체…… 무슨 부탁이냐고!’

풀리지 않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에 조윤태는 연거푸 술만 들이켰다.

“아버지 그렇게 나쁜 분 아니다.”

‘아버지라면…… 손국중 회장?’

***

손대균의 고민이 무척 깊어 보였다.

양손에 잡힌 두 가지가 다 복일지라도 어느 순간 하나를 놓아야 할 때가 누구에게나 찾아오게 마련이다.

하나를 내려놓지 않고 하나를 더 취하려고만 들면 자칫 두 개를 모두 잃게 되는 수가 있다.

손대균은 자신의 도덕적 양심과 부모에 대한 효 앞에서 심하게 갈등했다.

그래도 과거와 달리 많이 용감해졌다.

스스로 선택한 길에 대한 결단을 내렸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백수!

리앤장 이사의 자리를 내려놓은 게 확실했다.

더 가치 있고 귀한 것을 지키기 위해 존경했던 아버지를 등졌다.

이제야 진실한 꽃을 피울 때가 된 것이다.

나를 만나고 난 뒤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 시간만큼 나도 손대균을 기다렸다.

맹추위가 몰아치는 겨울 같은 고통의 시간, 그리고 통찰과 사색의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어떤 꽃이든 때가 되어야 스스로 피어나는 법.

벚나무를 잘라낸다고 그 안에서 벚꽃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와 같이 손대균은 스스로 인고의 시간을 보낸 끝에 때를 만나 꽃을 피웠다.

존경과 두려움, 번뇌의 상징인 아버지 손국중.

이제야 그의 그늘에서 벗어난 손대균이 홀로 당당히 나를 찾았다.

다른 길을 선택한 그에게는 무엇보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을 것이다.

술이 물처럼 넘어가는 날이지만 절대 취하지 않았다.

“도대체 지금 무슨 얘기야? 손국중 회장님을 왜 태산이에게 부탁해? 회장님 무슨 큰 죄를 졌어?”

답답함을 억누르고 있던 조윤태 이사가 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선배님……. 우리 아버지가 친일파입니다.”

생각지 못하게 툭 내뱉은 손대균의 고백.

“……그래서?”

법조계에 오래 몸 담아온 조윤태 이사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다.

“태산이가 친일파를 싫어합니다.”

“나도 싫어해.”

“그런 아버지가 태산이를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손 회장님이? 왜?”

“그건 태산이에게 물어보십시오.”

조윤태 이사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졌다.

“KI그룹 때문일 겁니다.”

“작업 중이라고 했지?”

“네.”

“이거 제대로 붙겠네. 대한민국 법조계 암중 거물 손국중 회장님과 다크호스 장태산 회장의 결투라! 흥미진진한데~. 빵야! 빵야!”

조윤태 이사가 손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어 나에게 겨냥했다.

피할 수 없는 결투임을 그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좀 살살 봐달라고…… 부탁하는 중입니다.”

“우리 후배 힘들구나. 내가 그 심정 알지. 장태산 후배님 성격이 까칠하잖아. 앞길 막는 적을 지금껏 용서하는 걸 못 봤다.”

최측근 격인 조윤태 변호사가 나의 모든 걸 파악했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늙은 아버지가 다치실까 봐…….”

손대균도 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내가 아닌 자신의 아버지를 걱정하는 입장이 됐다.

“우리 후배…… 효자야.”

툭툭 손대균의 어깨를 두들기는 조윤태 이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대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리앤장 이사의 어깨를 터치할 수 있는 인사는 대한민국에 몇 명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손대균은 백수다.

“‘사후 술 석 잔 말고 살아서 한 잔 술이 달다’라고 했지. 다들 마시자고! 오늘 밤 취해 보는 거야!”

조윤태 이사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단박에 띄웠다.

“알겠습니다! 오늘 제대로 한번 마셔보죠!”

손대균이 호응했다.

나에게 약조를 받아내고 한결 개운해진 표정이다.

“아쉽다. 아쉬워. 이런 날에는 제대로 놀아야 하는데…….”

조윤태 이사가 내 눈치를 살살 봤다.

수박 밭에 와서 수박 구경만 하고 갈 수 없다는 무언의 간절한 갈망이 전해졌다.

“사모님 전화번호가…….”

스마트폰을 들었다.

“야! 장태산!”

버럭 다급하게 소리치는 조윤태 이사.

“넌 남자도 아냐!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후훗.”

가볍게 웃음이 터졌다.

중년 남자의 발악은(?) 보는 것만으로도 재밌었다.

“저래서 제가 우리 태산 후배를 좋아한다니까. 남자도 지조가 있어야지! 암!”

그에 반해 흡족한 표정으로 나를 은근히 쳐다보는 손대균.

“지조는 무슨! 후배! 내일은 내가 제대로 쏠 테니까 우리 다시 뭉치자. 콜?”

“그럴까요?”

“흐흐흐.”

죽이 잘 맞는 두 중년 아재.

“이 후배가 폭탄주 시원하게 한번 말아보겠습니다.”

어차피 벌어진 판.

선배들을 위해 후배 노릇을 자처했다.

몇 년 동안 내 눈치 보며 지내온 두 사람에게 야자 타임도 허락했다.

“야호! 지금부터 이 마이크는 한 시간 동안 내 거다! 선배의 준엄한 명령이야!”

“넵! 선배님! 전 탬버린을 장착하겠습니다!”

한껏 자유롭게 풀어져서 노는 아재들을 보니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마이크를 잡고 나이 지긋한 노인처럼 흥얼거리기 시작한 조윤태 이사.

한껏 고취된 흥겨움이 강남 텐 프로 룸에 넘쳐흘렀다.

***

“끄으윽……. 후배. 내일 약속 잊지 말고…….”

“선배님 하늘이 밝아옵니다. 내일이 아니고 오늘입니다.”

“그게 그거지……. 나 먼저 간다…….”

부우우우웅.

씨큐리티 소속 야간조 경호원이 조윤태 이사를 태우고 사라졌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

조윤태 이사는 오랜만에 거하게 취했다.

손대균도 못지않게 많이 마셨는데 그렇게 취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후배님도 집에 가야지.”

“선배님은요?”

“여기 앞에…… 호텔 잡아 놨어.”

새벽 찬바람에 술이 깨는 듯 손대균은 발음이 또렷했다.

“말해봐. 조건이 있을 거 같은데…….”

손대균의 눈치는 역시 대단했다.

조윤태 이사보다 몇 수 위였다.

“저는 지금껏 적을 봐준 적이 없습니다.”

나의 적은 도를 넘어 세상에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그동안 가차 없이 응징해 왔다.

앞으로 손국중이 어떻게 나올지 대충 짐작이 가능했다.

손대균과 암중의 약속은 했지만 가이드라인은 분명히 정해져 있다.

“그럼…….”

미세하게 흔들리는 손대균의 눈동자.

그 두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리고.

“손국중 회장님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뭐, 뭐라고???”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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