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1장. 백수.(2)
끼이이익.
서울 남부교도소 정문이 열렸다.
휘이이이잉.
찬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어왔다.
오가는 인적 하나 없이 바람만 불어오는 늦은 저녁.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듯 조심스럽게 열리는 문.
반짝반짝.
긴급 사이렌 불빛이 요란하게 울리며 응급차 한 대가 교도소 정문을 빠져나왔다.
끼이익.
잠깐 멈춰선 응급차.
타다다닥.
대기 중이던 경호원들이 응급차를 중심으로 사방을 에워쌌다.
그륵.
응급차 뒷문이 열렸다.
황급히 응급차에 올라타는 KI그룹 회장실 비서.
“여기.”
비서가 두툼한 코트를 넘겼다.
“에이 추워……. 빨리 문 닫아! 썅.”
신경질이 잔뜩 난 듯 인상을 쓰며 욕을 퍼붓는 KI그룹 임주혁 회장.
교도소 측에서 제공한 환자복을 입었다.
아껴두었던 연줄까지 탈탈 털어 어렵게 빠져 나왔다.
병보석은 더할 나위 없이 빨리 진행됐다.
검찰과 법원 모두 신속하게 임주혁의 보석을 허가했다.
KI그룹 차원에서도 임주혁에게 집중된 시선을 돌리기 위해 수준급 연예인들의 불륜 소식을 터트렸다.
국민들과 기자들의 시선이 예상했던 대로 그곳으로 향했다.
거물 정치인들이나 손에 꼽는 그룹 수준 정도 돼야 써먹을 수 있는 수법.
“출발해.”
법무부 교정본부가 운용하는 응급차 운전 직원에게 반말을 하는 임주혁.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교도관도 개의치 않고 마치 임주혁의 부하 직원처럼 대답했다.
수감돼 있는 동안 교도소에 뿌린 돈이 장난 아니었다.
범털이 황제로 지낼 수 있었던 교도소.
교도관들도 그 혜택을 넉넉하게 받았다.
“가져왔어?”
“네. 회장님.”
“따라봐.”
“넵!!”
비서는 가방에서 꼬냑 한 병을 꺼냈다.
임주혁이 즐겨 마시던 루이 14세XO.
그중에서도 구하기 어렵기로 소문이 자자한 병목 부분이 하얀색인 구형 생산품.
또로록.
군침을 절로 일으키는 연호박 빛깔의 꼬냑이 잔에 채워졌다.
특유의 달콤한 향이 순식간에 응급차 안에 진하게 퍼졌다.
“흐음~.”
코를 벌렁거리며 진한 향을 음미하는 임주혁.
“흐흐흐. 너를 얼마나 마시고 싶었는지……. 이 오빠가 길고 긴 시간을 꾹 참았다.”
변태처럼 잔에 담긴 술과 눈을 맞추며 대화를 나누는 임주혁.
그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길게 번졌다.
아무리 황제처럼 대우를 받아도 교도소는 별 수 없이 교도소였다.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와 있는 듯 응급차 베드에 비스듬히 누워 잔을 기울이는 임주혁.
“크으으…….”
스트레이트로 잔을 비웠다.
“그 개새끼…… 지금 어딨어?”
“네?”
“그 개새끼 말야! 장태산!!!”
목을 적신 임주혁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술이 들어가자 전혀 다른 사람처럼 돌변한 지랄 같은 성격.
한국변호사회 회장인 손국중에게까지 손을 뻗고서야 일이 풀렸다.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었다.
장태산이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것은 확인했지만 이대로 묻어두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비서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오! XX새끼. 어린놈의 새끼가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아?”
교도소 문을 벗어나기 전까지 도 계속 알아본 장태산에 관한 정보.
생각했던 것보다 덩어리가 컸다.
KI그룹 계열사 주식 상당수가 낯선 외국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임주혁은 등골이 서늘했다.
당연히 장태산이 의심스러웠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놀이터이자 왕국을 공격하려 드는 장태산.
오정까지 얽혀 있어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흐흐흐……. 장태산 기대해라. 이 형님이 인생의 뜨겁고 쓴맛을 맛보여 주마.”
철창 밖으로 나와 자유의 몸이 된 임주혁이 거침없이 웃었다.
이제 두려울 게 없었다.
머릿속에 차근차근 그려지는 수많은 시나리오.
‘개새끼……. 목을 따버리겠어!’
***
조만간 스마트폰을 바꿔야겠다.
요즘 들어 부쩍 나의 자유로운 시간을 훼방 놓는 스마트폰.
임윤아와의 오붓한 저녁식사는 보기 좋게 날아갔다.
전화 한 통에 곧바로 서울로 왔다.
오는 중간에 휴게소에서 핫바 하나를 사 임윤아를 겨우 달랬다.
그렇게 도착한 역삼동에 위치한 룸.
말로만 듣던 텐 프로.
입구부터 값 비싼 블랙 대리석이 쫙 깔렸다.
눈에 보이는 인테리어 비용만 해도 수십 억은 우습게 깨졌을 것이다.
“예약하셨습니까?”
입구에서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가드가 앞을 막아섰다.
철저하게 회원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리앤장의 손 이사님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실례했습니다. 모시겠습니다.”
어느새 가드 뒤에 와 대기 중이던 나비넥타이를 한 남자 웨이터가 앞으로 나왔다.
자연스럽게 그가 나를 안내했다.
지하로 연결되는 계단을 내려가는데 의외로 공기는 깨끗하고 신선했다.
블랙과 황금색이 적절히 섞여 조화를 이룬 럭셔리한 공간.
중세 궁전을 흉내 낸 듯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룸이 제법 많아 보이는 데도 잔 소음 같은 소리들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방음에 심혈을 기울인 티가 났다.
“3번, 오늘 진상이다…….”
“지가 다선 의원이면 다야?”
“그러게 말이야. 다 늙어서…… 무슨 추태니.”
두 여성이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며 스쳐 지나갔다.
명성에 걸맞게 미모가 참으로 대단했다.
그 틈에도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눈빛을 뿌렸다.
스쳐 지나가는 공기가 씁쓸했다.
분명 손대균 이사의 취향이 아닌 곳이었다.
평소처럼 고상한 와인 바도 아니고 이런 곳으로 나를 부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동안 내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던 손대균 이사.
전화로 말한 백수가 되었다는 말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내심 걱정이 됐다.
“이곳입니다.”
웨이터가 가장 안쪽까지 나를 안내하고 한 곳을 가리켰다.
한눈에 봐도 VVIP 룸.
“수고했어요.”
지갑에서 5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 건넸다.
이런 곳에 처음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건넨 팁을 받아 돌아서는 웨이터.
“에휴.”
한차례 숨을 고르고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쨍하고 해 뜰 날~♪. 대균이가 왔어요~♬.”
구성지게 울려 퍼지는 트로트.
생각지 못한 상황에 부끄러워 빨리 문을 닫았다.
그리고 확인하게 된 광경.
“!!!”
30년 산 양주 몇 병이 커다란 탁자 위에 빈병으로 뒹굴고 있었다.
머리에 넥타이를 질끈 묶은 채 마이크를 잡고 잔뜩 심취해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남자.
“조…… 이사님?”
손대균 이사가 아니었다.
나와 인연이 무척 깊은 한 남자.
“어~ 후배님~ 오셨어~.”
가죽 의자에 비스듬히 다리를 꼬고 양주를 마시고 있던 손대균 이사가 나를 보고 반갑게 손짓했다.
“오! 우리 사랑하고 존경하옵는 장태산 후배님! 오셨습니까~.”
마이크를 잡고 열창하고 있던 조윤태 이사가 나를 보고 고개를 숙이며 넙죽 절을 했다.
“두 분…… 뭡니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어이가 없었다.
직접 전화를 해 술 취한 목소리로 백수가 됐다며 빨리 와 술상을 대령하라던 손대균 이사.
차라리 그는 의외로 멀쩡했다.
그에 반해 기분 좋게 취해 있는 조윤태 이사.
두 사람이 한국대 법학과 선후배 사이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친분이 넘치는 관계인 줄은 몰랐다.
1학년 때 학교 주점에서 우연히 조우했던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했었다.
“뭐가…… 말이야?”
손대균 이사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이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리앤장과 삼우로펌은 법조계에서 라이벌 관계였다.
상대편과 대결 구도에 놓일 때가 많았다.
이렇게 사석에서 만나 편하게 술을 마시는 게 쉽지 않은 관계다.
“학교 선후배잖아. 내가 후배일 때 조 선배님이 밥도 사주고 술도 사줬어.”
“정말요?”
“흐흐. 맞아. 저 손 이사 집안이 잘사는 줄을 처음에는 몰랐다니까.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느새 마이크를 내려놓고 테이블로 와 술잔을 잡는 조윤태 이사.
그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그럼 두 분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지 저는 왜 부른 겁니까?”
진심으로 궁금한 두 사람의 의중.
“너…… 여자랑 있었지?”
손대균 이사가 훅 치고 들어왔다.
“사생활입니다.”
절대 휘말려 들지 않았다.
“유리에게 안 찔려?”
“!!!”
아오! 손대균 이사 진짜 밉상이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알면서 능청스럽게 발을 뺐다.
“그런 이사님은 안 찔리십니까?”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다.
비 내리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다.
법대 로비에서 만났던 예쁜 미대생 누나.
털털하게 점퍼를 걸치고 나타나 캔 커피를 사 달라고 말하던 손유리.
그녀의 그 풋풋한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한 잔 주십시오.”
“오케이!”
조윤태 이사가 아주 신났다.
콸콸.
잔에 맥주를 채우듯 양주를 부었다.
꿀꺽.
단숨에 원 샷.
“뭐야? 선배들하고 짠도 안 하고 마셔?”
“선배님. 놔두십시오. 속이 바짝 탈 겁니다. 흐흐흐.”
두 사람 꿍짝이 잘 맞았다.
“한 잔 올리겠습니다.”
빈 잔을 조윤태 이사에게 건넸다.
“그렇지!”
기다렸다는 듯 잔을 받는 조윤태 이사.
잔에 술을 넘치도록 따랐다.
“카야~! 우리 후배님 사랑 넘치는 거 봐라.”
조윤태 이사가 행복한 표정으로 넘치는 잔을 단숨에 비웠다.
공식 자리가 아닌 만큼 회장이라는 호칭은 쓰지 않았다.
“선배님도 한잔하시죠.”
“가득 채워봐.”
불콰하게 얼굴이 달아올라 취기가 꽤 돌았는데도 잔을 거부하지 않는 손대균 이사.
그의 잔이 채워졌다.
“크으…….”
손대균 이사 역시 단숨에 잔을 비웠다.
“후배님 안주 드세요~.”
사과 안주 하나를 콕 찍어 손대균 이사의 입에 넣어주는 조윤태 이사.
“역시 선배님이 사주는 술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습니다.”
“그렇지? 내가 그때 어렵게 과외 해서 너희들 많이 먹여 살렸다. 다들 잘 먹더라.”
“오래된 추억입니다.”
“그때가 좋았다. 강의실에서 노트 복사하고…… 시험 문제 돌려보던 녀석들이…… 먹고 살겠다고…… 어찌나 들이받던지…….”
“어쩔 수 있습니까. 밟아야 올라설 수 있는 사회 구조가 문제죠.”
“그래도 오늘 좋다. 후배님이 이렇게 불러주셔서…… 보기 힘든 장 회장 얼굴도 보고.”
“4시간 안 지났으니까…… 내기는 제가 이겼습니다.”
“인정!”
뭐야? 나를 두고 두 사람이 내기를 한 거야?
냉정하게 미워하고 싶었지만 미운정도 정이었다.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나이 차이가 제법 되지만 동문 선후배로 끈끈하게 뭉친 자리.
아무리 공정하라 외치지만 혈연, 지연, 학연은 인연의 또 다른 모습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과 같은 당연한 이치.
“바쁜 후배 불러서 두 분 행복하십니까?”
“좋잖아. 백수 된 첫날…… 이렇게 불러서 술 마실 사람이 있다는 게…… 난 진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손대균 이사의 마음이 과거와 달리 많이 열렸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알코올 기운도 빌렸을 테지만 무언가 개운한 심리 상태가 엿보였다.
“진짜…… 짤렸어요?”
“짤린 게 아니라 자발적 퇴사.”
“선배님 로펌이잖아요.”
“아니지. 내 거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
정확하게 포인트를 짚는 손대균 이사.
손국중과 뭔가 틀어진 눈치였다.
먼저 말하기 전에는 물어보기 난감한 상황.
얽히고 꼬일 대로 꼬여 있는 친일파의 대부 손국중과 나와의 관계.
아직 부딪치지 않았지만 그와의 긴장 관계는 과거부터 계속됐다.
“장태산…… 회장.”
손대균 이사가 날 불렀다.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다.
“취직 시켜드려요?”
“부탁 한 가지만 해도 되냐?”
“부탁요???”
“만약 말이야…….”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