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0장. 백수. (777/1,284)

780장. 백수.

“윤아가 장주시에?”

“넵. 부사장님.”

“그게 남자에 미쳐서……. 아버지 병환 중인데…… 거기가 어디라고!”

오정모직 부사장 임아현이 앙칼진 목소리로 성을 냈다.

요즘 들어 부쩍 마음에 들지 않는 막내 여동생.

쥐 죽은 듯이 조용히 공부나 할 것이지 분수도 모르고 그룹 경영에 뛰어들었다.

과거와 달리 윤아의 행보에 신경이 팍팍 쓰였다.

게다가 엄마와 오빠까지 합세해 윤아를 두둔하고 나섰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도 잘하고 어른들의 예쁨을 한몸에 받아온 막내.

덮어놓고 다들 예뻐라 했다.

아빠인 임성철 회장은 눈에 띌 정도로 윤아를 편애했다.

임아현은 그때부터 삐뚤어졌다.

여동생에게 느끼는 질투로 시작해 매사 어긋나게 행동하며 살았다.

뒤늦게 인생이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다.

공부도 때가 있다고 했지만 그 시기를 놓쳐 버렸다.

어설픈 학벌이라도 갖고 있어야 해 돈을 주고 사다시피 해 구색을 맞췄다.

그룹의 계열사 하나라도 제대로 물려받기 위해 언론사 쪽으로 줄을 대 똑똑한 사주 아들과 결혼했다.

나름 머리를 굴려 일궈낸 혼사였지만 아쉽게도 남편은 사업가 체질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아버지 임성철 회장은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었다.

아들에게 중요 계열사 주식들을 물려줬다.

승계 작업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그룹 속사정을 알고 있는 임아현은 화를 꾹꾹 누르고 맡은 사업을 전투적으로 추진했다.

그룹에서 자랑할 만한 인재들을 뽑아 직원으로 뒀다.

언젠가 성과를 보이면 아버지도 인정해 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번번이 추진하던 사업은 실패로 돌아왔다.

언니인 임아진에게도 밀렸다.

부사장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그 자리도 위태로웠다.

그런 상황에서 막내 임윤아까지 그룹 일에 참여하겠다고 돌아왔다.

그것도 생각지 못한 장태산이라는 엄청난 거물을 남자친구 삼아서…….

“고자룡 회장과 그의 딸 고연지……. 그리고 연대 전문구 회장도 방문했다고 합니다.”

오너 일가의 구성원인 만큼 그룹 내에 접수되는 정보가 빠르게 전달 됐다.

임아현을 따르는 비서실 직원이 가져온 특급 정보.

“왜?”

“정확하지는 않지만…… 모종의 사업 계약이 이뤄진 것 같다고 합니다.”

부사장 비서가 정보를 풀었다.

“사업 계약이라…… 도대체 그 연구소는 뭐 하는 곳이야?”

“차세대 배터리와 같은 신기술이 개발된다는 것 말고는 거의 알려진 정보가 없습니다.”

“미치겠네.”

임윤아처럼 나이라도 어렸다면 장태산을 상대해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이가 딸린 유부녀.

누구보다 욕심이 많은 임아현은 입술만 깨물었다.

임원회의 때마다 모진 말로 여동생을 몰아붙였지만 전혀 동요하지 않던 막내.

장태산이 뒤에 있어 더 꿋꿋이 버텼던 것이다.

‘만약 여기서 뭐라도 월척이 걸리면…….’

임윤아와 장태산은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

이미 엄마가 사위로 인정했을 정도.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다.

유일하게 자기편이라 여겼던 오빠도 두 손 들고 패배를 선언했다.

임아진은 눈치 빠르게 조용히 지켜만 봤다.

현재 상황에서 오직 답답한 건 임아현뿐.

“장한수 실장님이 장태산 쪽에 붙은 게 확실해?”

“……그렇습니다.”

“그 자식 스파이 아냐? 우리 오정 날로 먹으려고 월가에서 파견한 스파이!”

임아현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비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말을 보탤 자리가 아니었다.

“내가 지시한 거 어떻게 됐어?”

“……은밀히 처리하고 있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왜?”

“주식 가격이 M&A 설로 급등했습니다.”

“얼마나 모았는데?”

“2% 정도 됩니다.”

“……3%로 맞춰.”

“부사장님.”

“은행에 융통 자금 있지? 그거 사용해.”

“너무 위험합니다.”

“어차피 장태산 그 자식을 밀어내지 못하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야. 이럴 때 큰아버지를 도와준다면…… 그쪽에서도 섭섭지 않게 챙겨줄 거야.”

임아현은 KI그룹 주식을 매집하고 있었다.

장태산이 KI그룹을 노린다는 소문에 개인 자산을 털어 넣었다.

“자칫 횡령 문제가…….”

“부사장이자 오정 오너 일가인 내가 그 정도 회사 자금 융통도 못 해? 기껏해야 2달 정도 빌려 쓰는 거잖아!”

임아현은 신경질적으로 비서에게 쏘아붙였다.

“아, 알겠습니다.”

힘없는 비서는 고개를 숙였다.

“알았으니까 나가봐.”

“쉬십시오.”

비서가 밖으로 나갔다.

“아오! 답답해……. X발.”

부사장실에서 혼자 욕을 퍼붓는 임아현.

“장태산 그 자식을 어떻게 해야 돼?”

임아현의 힘으로도 어떻게 대처할 수 없는 장태산.

인상을 잔뜩 쓴 임아현의 이마에 힘줄이 돋으며 푸르게 변했다.

“그래……. 그 방법이 있네!”

그때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낸 임아현.

곧바로 인터폰을 눌렀다.

- 네. 부사장님.

“광고 담당 윤 상무 좀 오라고 그래.

- 알겠습니다.

사악한 음모를 꾸미는 듯 임아현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장태산……. 너 여자 좋아하지? 흐흐흐.”

***

왼쪽 귀가 또 간지럽다.

나 없는 자리에서 누군가 또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귀가 간지러웠던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4G를 넘어 다들 5G를 경쟁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 이익이 되는 곳에 엄청나게 빠른 이합집산이 벌어지고 있어.”

세상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바쁘게 움직였다.

한국 IT산업을 따라 잡기 위해 일본의 소니와 NTT, 인텔, 화웨이, 알리바마 등등이 동맹을 맺거나 기술 절도를 벌이고 있었다.

이제 나도 본격적으로 힘을 드러낼 때.

회의는 잘 끝났다.

길게 붙들어 두고 전달할 내용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핵심 대표들만 모았다.

왕성에서 주관하는 첫 번째 고관 회의.

다들 내가 밝힌 포부에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내가 벌이는 사업은 사익을 넘어 공익과 만민 보편적 이익을 위한 일이라는 걸 밝혔다.

목적이 뚜렷해야 힘이 응축되고 그만큼 행동은 빨라지는 법.

각자에게 목표를 정해줬다.

TS 하관우 회장, 천일 황효관 대표, 삼룡자동차 현동영 대표, 투자법인 도도희, M.T.S 황연태와 A.T 씨큐리티 한진웅 대표, 우리들 은행 현준규 행장.

그들 모두를 불렀다.

대웅 조선을 인수하기 위해서 전문가도 섭외했다.

대웅맨들의 충성심은 겪으면 겪을수록 만족스러웠다.

조직 생활에 익숙한 그들에게 우리는 한몸이라는 걸 각인시켰다.

물론 굳이 밝히지 않은 조직도 제법 있다.

삼우와 JS로펌, 시은 바이오텍, 대국재단, 드워프 공장도 내 거다.

그리고 월가의 핵심 파트너인 로버트 라이언까지.

그들 모두가 내 사람이었다.

든든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흡수할 그룹이나 기업도 아직도 몇 개 더 있다.

더 이상 오너들의 방만 경영을 지켜 볼 시간이 없다.

돈만 밝힐 뿐 서로가 상생하는 세상을 등진 무능력자들이 태반이다.

그들을 솎아내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울해지지 않는다.

“무슨 생각해?”

“석양이 좋아서…… 잠시 쉬고 있었어.”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붉은 비단이 지평선 너머로 펼쳐지는 듯 아름다웠다.

“정말 그래. 이곳에만 오면 마음이 편해.”

회의를 하는 동안 임윤아는 본가에 머물렀다.

앞으로 나설 때와 한 발 물러날 때를 기가 막히게 잘 알았다.

“회의 내용 안 궁금해.”

“태산 씨 비즈니스잖아.”

참하고 단아하게 조용히 웃는 임윤아.

“그래도 정 알려주고 싶다면 말해도 돼. 귀를 열고 경청해 줄게.”

임윤아는 역시 현명했다.

“곧 봄이 오네.”

“입춘 지났으니까…… 봄이지.”

“그래……. 2014년 봄. ……잔인한 그 봄.”

“응? 무슨 소리야?”

임윤아가 순식간에 가라앉는 내 목소리에 놀라 물었다.

회귀한 자만이 알 수 있는 2014년의 잔인했던 봄.

다시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러나 결코 발설할 수 없는 일.

지금도 그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말하는데…… 되게 슬퍼보였어.”

임윤아 눈치도 빨랐다.

“저녁은?”

“그게…….”

허를 찔렀다.

입을 급하게 다무는 임윤아.

“어머니야 내일 오실 것 같고…… 아버지는?”

“아버님은 약주 한잔하고 오시겠대. 우리 먼저 먹으라던데?”

임윤아가 꼬리를 말았다.

요리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그녀.

“날이 차니 칼칼한 된장국 생각나네.”

“…….”

더 이상 말이 없는 임윤아.

공포 아닌 공포가 그녀 얼굴에 언뜻 비쳤다.

“뭐 먹고 싶어?”

“태산 씨가 해줄 거야?”

나의 한마디에 활짝 얼굴이 펴지는 그녀.

“당연하지. 우리 집에 온 손님이잖아.”

“으흐흐. 그럼 매콤한 제육볶음에 나도 칼칼한 된장국!”

신이 난 목소리가 금세 짜랑짜랑 울렸다.

“막걸리는?”

“당근 콜!”

임윤아와는 술로 인한 인연이 많았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마셨던 즐거웠던 첫 만남.

모르는 이와 달콤한 값비싼 와인을 기울이는 것보다 친구들과 마시는 막걸리 한잔이 더 맛있는 법이다.

스윽.

임윤아가 팔짱을 껴왔다.

자연스러운 행동.

그녀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좋다~. 으흐.”

임윤아가 무게를 실어 매달리며 웃었다.

“딸기가 직장을 잃으면…… 뭐가 되는 줄 알아?”

“딸기가 직장을 다녀? 어떻게 되는데???”

집에 돌아가는 길에 살짝 던진 가벼운 아재 농담.

“딸기…… 시럽~.”

“딸기…… 시럽? 으아아아아아! 그게 무슨 농담이야!”

임윤아가 아재 농담에 적응을 못 하고 울상이 됐다.

“모기가 감기 걸리면?”

“……모기도 감기 걸려?”

디시 걸려드는 순진한 임윤아.

“목이 아파~.”

“…….”

내친 김에 한 박자 더 뺐다.

“파리가 아프면?”

“설마…… 팔이 아파?”

“와아! 천잰데!”

“뭐지……. 이 바보가 된 느낌은.”

임윤아 표정이 보기 좋게 썩어갔다.

“당신이 그러니까…… 내 매미가 아프잖아. 내 맴이~”

“으아아아아! 장태산!!!”

오랜만에 터져 나오는 임윤아의 고함 소리.

“하하하하하하.”

그래도 즐겁게 깔깔 웃으며 집에 도착했다.

띠리리리리리리.

그 순간 울리는 싸한 느낌의 전화 벨소리.

그리고 화면에 뜨는 익숙한 이름.

띠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선배님?”

- 야~ 장태산……. 너 때문에 나 백수 됐다~. 그리니까 당장 이리와…… 술상을 대령하라!!!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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