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9장. 킹덤.
“잡아야 합니다! 이 기술은 혁명입니다!”
엘자그룹 회장실.
장주시에 돌아온 고자룡은 그 즉시 아들 고광문을 불렀다.
아직 어려, 때는 이르지만 미래에 엘자를 이끌어갈 회장으로 점찍고 있었다.
다른 형제나 가족들과 달리 겸손하고 동시에 능력이 넘치는 고광문.
고자룡의 장주시 방문 소감과 내용을 듣고 단번에 혁명이라 외쳤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건 장태산 회장이 맛있고 영양가 높은 죽을 쒀서 우리에게 그릇째 주는 것과 같아요.”
고연지도 옆에서 고광문을 거들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온 장주시의 연구 단지.
2014년, 아직은 누구도 실현하지 못한 미래 기술들을 장태산 연구소는 실용화시켰다.
바로 상품화가 가능할 정도로 뛰어난 대규모 신기술.
무조건 선점한 자가 50%를 먹고 들어갈 게 빤했다.
아니, 99% 이상의 독과점이 될 것이 확실했다.
“세상에……. 모든 오염물질을 정화해 산소로 바꿀 수 있다니……. 이건 신들도 못 하는 일일 겁니다.”
흥분한 나머지 고광문은 침까지 튀겼다.
장태산이 개발했다는 정화시스템은 말로만 전해 들어도 놀라웠다.
해당 정화시스템만 가동하면 지구촌에 쌓이고 있는 쓰레기들 대부분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이산화탄소 배출 사업까지 연결할 수 있다.
“태양광 발전소도 마찬가지에요. 일반 가정이나 상가에서 특별한 장치 필요 없이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니…….”
고연지 머릿속을 가득 채운 장주시 연구소의 신기술들.
특허권만 팔아도 장태산은 대대손손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기술들이었다.
“문제는 이사회다.”
한껏 고조된 분위기와 달리 고자룡의 인상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장주시 연구소에서 맛봤던 감동은 사라지고 괴로움만이 남아 있었다.
‘무서운 녀석이야.’
이런 상황까지 모두 예상하고 엘자를 넘기라 말했던 장태산.
아무리 고자룡이 추진하고 싶은 사업이라도 해도 대주주들이 포진한 이사회를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다.
“회장님.”
그때 고광문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자룡을 불렀다.
인상을 쓴 채 고개를 돌려 아들을 바라보는 고자룡.
할 말이 있는 듯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봐.”
“이제…… 정리할 때가 됐습니다.”
“뭘 말이냐?”
“작은아버지들과 사촌, 그리고 협조하지 않는 이사들과 임원들을 과감하게 엘자그룹에서 쫓아내십시오!”
“광문아!”
고자룡은 아들의 생각지 못한 발언에 깜짝 놀랐다.
평소 친척들과 사이가 좋았던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의 입에서 그들을 엘자에서 내치자는 파격적인 폭탄선언이 터졌다.
“두고 보거나 의리로 챙길 단계를 지났습니다. 그룹 책임 경영을 위해서는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필연적 과업입니다.”
“으음…….”
“오빠 말이 맞아요. 제가 그룹에 들어와 일해 보니 알겠어요. 할아버지 유훈대로 서로 힘을 합쳐 경영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요. 다른 식구들 밥그릇에 눈독 들이느라 다들 바빠요. 이런 이유 때문에 장태산 회장이 엘자를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이제는 정리할 타이밍이 맞아요.”
고연지도 고심 끝에 고광문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고자룡이 두 눈을 감았다.
엘자의 돌아가는 사정을 알고 있지만 그런 형제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신도 회장의 자리를 지키는 데 한계가 있었다.
아버지 생전에 이미 그룹 계열사 주식은 잘게 쪼개졌다.
최고 경영자인 회장직을 맡고 있지만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엘자는 주식회사다. 그리고 내 지분은…….”
“장태산 회장이 도와주기로 했어요.”
“뭐라고?”
“저에게 태산이가 말했어요. 필요하면 도와주겠다고 말이에요.”
“연지야…… 그 말 정말이야?”
고광문이 크게 놀라며 물었다.
“아마…… 그렇게 말했을 정도라면……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는 말일 거야.”
“분명 내 앞에서는 엘자 주식은 맛이 없다고 했다.”
고자룡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고연지를 바라봤다.
“아빠…… 그 말을 믿어요?”
“!!!”
고연지의 말에 고자룡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회장님. 장태산 회장은 투자자입니다. 엘자에 이런 선물을 넘겼다면…….”
‘당했구나!’
고광문의 말에 고자룡은 확실히 깨달았다.
요즘 들어 엘자 주식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눈에 띄게 가격이 오른 것은 아니지만 주식 매매가 활발했다.
그건 보이지 않는 곳의 손 바뀜이 시작됐다는 의미.
“아빠 당황하는 모습…… 오늘 여러 번 보는 것 같아요~.”
고연지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웃었다.
평소 신중하기로 유명하던 고자룡의 이미지가 산산이 깨졌다.
“아빠도 이제 나이를 먹었잖아. 너희들도 다 컸는데…… 언제까지 폼만 잡고 살 수는 없지 않겠냐.”
변명 아닌 변명을 하게 된 고자룡.
“좋다! 한번 해보자. 장태산 회장이 도와준다면……. 우리 개혁 한번 꿈꿔보자!”
왕자나 왕족이 아닌 왕 스스로가 꾸미는 엘자그룹의 개혁.
“최선을 다해 플랜을 짜겠습니다!”
“장태산 회장과 접촉해 볼게요.”
고자룡은 고광문과 고연지를 번갈아 바라봤다.
어느새 다 성장한 자식들이 고자룡의 든든한 조력자가 돼 있었다.
***
처저저적.
하관우 회장을 비롯해 모든 인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연출된 광경.
나이는 어리지만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을 이끄는 진정한 리더가 나타났다.
대놓고 그룹이라 이름 붙이지 못했지만 그 어떤 그룹보다 더한 결속력을 품고 있었다.
“다들 자리에 앉으십시오.”
자연스럽게 중앙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는 장태산.
어느새 블랙 계열 슈트 차림으로 바꿔 입었다.
입가에 번진 여유로운 미소가 보기 좋았다.
“감사합니다!”
가장 연배가 높은 하관우 회장이 한차례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착석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 뒤를 따라 전직 대웅맨 출신 대표들이 고개를 숙이고 착석했다.
‘이 정도라니!’
오늘 처음 회의에 참석한 우리들 은행 현준규 행장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우리들 은행 주식이 순차적으로 매각됐다.
여러 곳에 쪼개져 팔렸지만 은행장 자리는 보존됐다.
장태산 회장이 뒤에서 모든 걸 조종했다는 사실을 현준규는 알고 있다.
대한민국 사채 시장 큰 손도 꼼짝 못 하게 했던 장태산의 자금 동원 능력.
내로라하는 그룹들도 이런 사실을 알면 배가 아플 것이다.
웬만한 기업들은 은행을 품지 못했다.
금산분리 원칙에 의거해 그것만큼은 철저히 막았다.
그러나 장태산은 여러 루트를 이용해 결국 우리들은행을 삼켰다.
현준규가 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냥 스쳐 들어도 될 만한 허언이었다 해도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태산 회장은 현준규와의 약속을 지켰다.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리에 모인 인사들 모두가 장태산 회장을 향해 존경의 눈빛을 보인다는 것.
“갑작스럽게 회의를 소집했음에도 먼 길을 찾아주신 여러분께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장태산 회장의 인사가 시작됐다.
조용하게 울리는 목소리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도저히 이십대 중반의 젊은 청년이 품을 수 있는 카리스마가 아니었다.
행장으로 있는 동안 재계 거물급들을 많이 만나 봤던 현준규였다.
그런 그에게도 장태산이 주는 중량감은 남달랐다.
“아닙니다. 회장님!”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충성심으로 유명한 대웅맨들은 영광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요즘 세대들과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지만 이 자리에서는 무척 잘 어울렸다.
“고맙습니다.”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고마움을 전하는 장태산.
현준규와도 눈이 마주쳤다.
꾸벅.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 현준규.
“본래 몇 달 뒤에 정식으로 초청하려 했지만 여러 사업이 복잡하게 얽히는 바람에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담담하게 흐르는 장태산의 설명.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장태산의 말에 초집중했다.
“이곳 장주시 종합연구소는 앞으로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신기술을 개발하는 최전선이 될 것입니다.”
장태산은 먼저 연구소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세계는 본격적으로 IT시대에 접어들어 하루가 다르게 격변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세상 곳곳이 연결되면서 정보는 시시각각 개방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확실한 기술과 비전을 갖지 못한다면 기업이나 국가는 국제 경쟁에서 뒤쳐져 영원한 낙오자 신세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몇 년 동안 초창기 IT 공룡 기업들이 대거 쓰러졌습니다. 정상에 도달했다고 안주하면서 혁신하지 않는 순간 뒤쫓아 온 다른 공룡에게 목을 물리게 됩니다.”
묵직한 힘이 담겨 있는 장태산의 목소리.
모인 인사들 모두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귀를 열어 경청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장내 공기는 조용했다.
다른 인물이 저런 말을 했다면 교과서적인 말이라고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앙 상석에 앉은 장태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게감이 달랐다.
“앞으로 몇 년 후면 WTO 체제의 세계 무역 규칙은 흔들릴 것입니다. 세계 경찰관이자 돈 주머니 역할을 맡아왔던 미국이 역량적 한계에 부딪칩니다. 그 뒤를 따라 성장한 중국을 비롯해 여러 신흥 국가들이 패권을 놓고 대립하며 아우성이 터질 것입니다. 국제 정세가 그같이 흘러가면 기술이 없는 국가는 뒤쳐져 영원한 3류 국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국민들은 가난해 질 것이며……. 기존 질서는 파괴될 것입니다.”
미래를 비관적이고 어둡게 예견하는 장태산.
“가난하면서 관대하기란 어렵습니다. 지갑이 풍족하지 못하면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 마음도 가난해집니다. 일명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던 미국과 유럽은 지금 가난한 상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곧 대한민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의 생존 문제와 연결될 것입니다.”
지금의 발언들은 결코 일개 투자회사의 회장이 내뱉을 만한 말들이 아니었다.
국정을 다루는 정치인이나 입에 담을 만한 이야기들.
국민의 가난과 국가적 위기, 세계 경제 동향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다.
“그리고 그 투쟁의 핵심에 미중 무역 전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국 수출의 대다수를 차지한 두 국가 간의 전쟁에 지정학적, 경제적 이유로 참전할 수밖에 없음이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입니다.”
장태산의 발언은 무역전쟁까지 확장되었다.
M.T.S 황연태 대표는 장태산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숙연해졌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그가 알던 장태산이 아니었다.
한때 돈이 많아 시작했을 거라 짐작했던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대한 오해.
하지만 겪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물론 돈만 많은 졸부들과 뭔가 다를 거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렇게 큰 포부를 품고 사는 인물이란 사실은 몰랐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본인이 따르고 있는 아직은 젊디젊은 청년이 이렇게 멋질 줄 몰랐다.
“곧 대한민국은 무역 1조 달러 클럽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여러 국가들의 본격적인 시기를 받으며 꿋꿋하게 버텨야 할 시절이 찾아옵니다. 지금껏 승승장구했던 반도체와 자동차, 디스플레이, 조선, 석유화학 전 부분에서 추격자들과 피 튀기는 한판 승부를 벌여야만 합니다. 패배하는 순간 대한민국은 중진국으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얘기는 이곳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내용.
나라 안 문제가 아니라 나라 밖의 피 튀기는 전쟁터가 문제였다.
‘회장님…….’
하관우는 감동했다.
한창 피 끓던 시절 대웅의 도운중 회장이 꼭 저런 모습이었다.
자신의 경쟁 상대는 한국이 아니라 세계라고 말했다.
작은 나라에서 아웅다웅 싸우지 말고 수출 전선에서 피를 흘리겠다고 말이다.
그래야 국가와 민족이 풍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룹 신년회 때마다 ‘수출이 곧 목숨’이라고 외쳤다.
아무것도 손에 쥔 것 없이 맨손으로 시작해 거대한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던 대한민국 산업 역군들.
장태산 회장의 모습 속에서 도운중 회장을 비롯해 여러 수출 거인들의 젊은 시절 모습이 엿보였다.
‘그래…… 장태산! 당신은 그래서 멋있는 거야.’
도도희의 가슴도 뜨겁게 타올랐다.
아버지를 파렴치한으로 만든 대한민국에 복수하고 싶었다.
정부의 실수와 정치권의 야합으로 한순간에 멀쩡한 사업가를 도적으로 만들어 버린 대한민국에 처절하게 복수하고 싶었다.
나라를 난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멋지게 재기에 성공해 다시 기업을 일으키는 일.
도도희가 꿈꾸는 복수 방법이었다.
장태산을 만난 뒤부터 꿈은 현실이 되어갔다.
아버지를 따르던 충신들을 모아 장태산은 새로운 왕국을 건설 중이다.
지금은 얼마 안 되는 인원이지만 내년이 되면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지난 몇 년 동안 일궈낸 사업체가 상당했다.
암중으로 추진 중인 사업도 대단하긴 마찬가지.
도도희도 전부를 다 알지 못할 정도다.
여기저기 몇 발 걸치고 있지만 장태산이 그리는 큰 그림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오늘 장태산이 그 포부를 드러냈다.
“기술이 미래입니다. 기술이 무기입니다. 기술이 명예입니다. 기술이…… 곧 평화입니다. 그 기술들을 만들고 완성하고 지켜내기 위해 저는 장주시 이 자리에 터를 잡았습니다. 보았습니까? 그리고 들리십니까? 지금 이곳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열정을 다 바쳐 헌신하는 이들의 땀방울과 심장 소리가 말입니다.”
쿵! 쿵! 쿵!
장태산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엄청난 힘이 실렸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도와주십시오. 저 혼자 힘으로는 이제 벅찬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합니다.”
장태산의 뜨거운 눈길이 좌중을 휩쓸었다.
마치 어전회의가 열리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
경청하는 신하들은 그 분위기에 압도됐다.
만민을 굽어 살피는 어진 임금과 같은 장태산.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이곳 장주시 연구소는 장태산이 꿈꾸는 테크노피아 킹덤임을!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