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6장. 병아리와 후라이.
스윽 스윽.
검버섯이 핀 주름진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손에 들린 새하얀 면포가 은은한 향기를 풍겨내는 난초 잎을 스쳐 지나갔다.
3월에 꽃망울을 터트리는 춘란은 긴 겨울을 버티고 소박한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황금 줄무늬가 눈에 띄는 변이종.
한 촉에 수억을 호가할 것 같은 난을 쓰다듬는 손길은 한없는 정성이 들어있다.
또로로록.
지리산 하동 산사에서 채취한 첫물 우전차가 맑은 차향을 풍기며 잔을 채웠다.
해가 바뀌었지만 아직도 작년 봄의 향기를 그대로 품고 있는 녹차.
명인이 제조한 구증구포 녹차의 향기는 그윽했다.
하물며 녹차를 우려내는 물도 알아주는 약수.
“차 드십시오. 아버님.”
부친의 호출에 본가를 찾은 리앤장 이사 손대균.
방석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예를 다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마주할 때면 행하던 자세가 자연스레 습관이 되었다.
깊은 얘기를 나눌 때마다 아버지 서재에 들어와 이렇게 마주앉아 시간을 보냈다.
단 한 번도 허투루 그냥 입을 열지 않는 손국중.
“…….”
굵은 안경테로 눈동자를 가린 그는 말이 없었다.
서재에 퍼지는 무언의 기세.
손대균은 조심스러웠다.
이런 분위기가 흐르는 날에는 꼭 큰일이 벌어졌다.
어떤 일에도 인자함을 잃지 않던 아버지 손국중의 얼굴에 감정이 없었다.
큰 결단을 내리시는 게 분명했다.
‘왜 이렇게 심기가 불편하시단 말인가.’
벌써 1시간 째 그 어떤 말도 없었다.
난을 치며 녹차를 마시는 일을 사랑하는 손국중의 침묵은 손대균을 숨막히고 답답하게 만들었다.
찻물에 손도 대지 않았다.
“아버님…….”
재차 손국중을 부르는 손대균.
“난 본래 매화 체질이다.”
느릿느릿한 말투로 그제야 손국중의 입이 열렸다.
“국가와 가족, 내 친우들을 보호하며 맡은 일에 헌신하는 타입이었지. 법관이라 꼼꼼하고, 인내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가 하면 보수적이기도 했다. 매서운 한파를 이겨내고 봄에 꽃을 피워내는 매화처럼…… 나는 인생의 풍파를…… 끈기와 인내로 버텨냈다.”
아들에게 시선도 두지 않고 손국중은 자신의 할 말을 이어갔다.
“한번 마음먹고 시작한 일은 끝까지 책임을 졌다. ……신중하게 말과 행동을 했으며 내가 뱉은 말은…… 반드시 지켰다. 주어진 규율에 순응했다. 작고 사소한 것들을 기억했고 일관성 없는 자들을 경계했다. ……선견지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결코 일을 어긋나게 만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자랑하듯 손국종은 자신의 기질을 설명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나니…… 난초처럼 성격이 변하더구나……. 세상이 날 간섭하는 것도 싫고…… 나 또한 그러했다. 자연과 풍류가 마음을 가득 채워주니…… 이렇게 태평함을 즐겼다. 힘도 약해지니……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게 좋았다. 여러 사건이 벌어져도…… 다 한때려니 생각하며 낙천적으로 변했다.”
뚝.
난을 손질하던 움직임이 멈췄다.
스윽.
고개를 돌려 아들 손대균을 바라보는 손국중.
무심한 듯한 눈동자 저편에서 또렷하게 보이는 은은한 분노.
“…….”
손대균은 아버지의 준엄한 눈빛에 긴장했다.
존경스럽지만 동시에 두렵고 또 어려운 존재.
아버지의 가면 속 진면목을 알고 난 뒤 반항도 하고 딴 마음도 품었었다.
그러나 결코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은 가르침과 습관이 무서웠다.
“난을 키우는 재미 중 하나가 변이종을 보기 위해서다. 평범한 난 속에서 가끔 특출나게 태어나는 녀석들이 날 심심치 않게 만들었다.”
손국중의 말투는 여전히 무심했으나, 손대균에게 향한 시선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 압박감에 손대균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짓누르는 압박감과 숨막히는 감정도 오랜만이었다.
아버지 덕에 날 때부터 호시절을 누리며 살아온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곡절의 시절을 살아온 손국중.
“난을 감상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꽃을 보는 화예품과 잎을 보는 엽예품……. 그중에…… 넌 무엇을 보고 키우고 있더냐?”
“네?”
뜬금없는 손국중의 물음에 손대균은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손대균은 한 번도 난을 키워본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아버지가 모를 리 없음에도 무엇을 보고 키우고 있느냐고 물었다.
“네가 키우는 난의 품종도 모르고 감상할 줄도 모르면서…… 행복하더냐?”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손대균은 아직도 아버지가 하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임주혁 회장에게 연락이 왔다.”
“임주혁 회장요?”
“빼달라고 하더구나.”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적당히 시간을 봐서 작업을 하는 게…….”
상류층의 범죄를 무마해 주거나 교도소에서 빼주는 브로커의 핵심이 바로 리앤장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넓은 인맥과 권력에 줄이 닿아 있는 곳이었다.
차후 세금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계산된 거액의 현금을 대가로 받았다.
“그 정도 힘도 없느냐?”
“아버님…… 과거와 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국민들을 속이는 게 쉽지 않습니다.”
“빼내 주거라.”
“아버님…….”
평소와 다르게 강하게 주문하는 손국중.
“장태산 때문이더냐?”
“!!!”
갑자기 튀어나온 장태산이라는 이름.
‘설마!’
손국중이 조금 전 물었던 선문답은 결국 장태산을 향하는 것이었다.
“그놈은…… 네가 키우는 변종 난 같더구나.”
손국중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리앤장 핵심 변호사들에게 장태산을 건들지 말라 경고해 놨다.
그런 장태산에 대해 뭔가 아는 듯 언급하는 손국중.
이렇게 됐다면 문제가 심각했다.
아버지 손국중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상황이라면 어느 정도 결심이 섰다는 의미.
“앞으로 크게 도움이 될 녀석입니다.”
손대균이 방어에 나섰다.
“도움이라…….”
손대균의 말을 따라 읊조리며 입을 굳게 닫는 손국중.
스윽.
그리고 잠시 뒤 옆에 놓여 있는 날카로운 가위를 집어 들었다.
싹뚝.
그리고 수억을 호가하는 난의 밑동을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
“아……버님!!!”
손국중의 예기치 못한 행동에 손대균이 놀라 소리쳤다.
가격을 떠나 그동안 애지중지 키워온 난초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난을 말릴 사이도 없이 과감히 잘라버렸다.
“가끔 살다보면 이런 난처럼 특이한 녀석들에게 마음을 빼앗길 때가 있다. 온 정성을 다해 키우는 재미가 제법이지. 하지만…….”
손국중의 새파랗게 서늘해진 눈빛이 아들 손대균을 향했다.
“내 마음을 빼앗아 번뇌가 된다면……. 과감하게 잘라야 한다. 그게 난이든 사람이든…….”
“!!!”
손국중이 말하는 바를 손대균은 이제야 정확히 알아챘다.
장태산을 쳐내라는 말.
“그놈은…… 위험한 자다.”
“아버님…….”
“힘들면…… 내가 처리하겠다.”
이미 단단히 마음을 먹은 손국중.
“…….”
두 사람이 마주한 공간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런 말 입에 담기가 외람되지만……. 아버님이 다치실 수도 있습니다.”
격동하는 마음을 다스리며 손대균은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손대균이 아는 장태산.
아버지 손국중의 말이 맞았다.
그는 진짜 위험한 녀석이다.
“다친다라……. 어차피 곧 죽을 마당에 뭐가 그리 대수겠느냐.”
어떤 수를 써도 돌이킬 수 없을 게 확실한 손국중의 마음.
“결심이 확고하신 것 같으시니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게 분명한 손국중에게 한 발 물러나 있겠다고 선언한 손대균.
물끄러미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손국중.
“쯧쯧……. 못난 놈.”
그리 하겠습니다, 입 발린 대답을 하더라도 아들의 변심을 눈치 채지 못할 손국중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손대균은 과거처럼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겠다고 기계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리지는 않았다.
누가 뭐라 해도 장태산은 손대균이 키우는 특별한 변이종 난초가 맞았다.
그러나 결코 자기 손으로 베어낼 수 없을 만큼 이미 깊은 정이 들고 말았다.
***
그렇게 불러봐야 소용없다.
연대가 싼 똥은 연대가 치우는 게 옳다.
지금껏 대한민국 그룹들은 자신들의 설사 똥을 국민들에게 떠넘겼다.
경영 실패로 무너지는 회사를 국민들 세금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다.
정부와 언론을 비롯한 각종 권력을 휘둘러 세금으로 위기를 탈출한 기업들은 법정관리 등의 여러 명목을 방패삼아 그 이익만을 다시 자신들이 챙겨갔다.
앞으로 내가 눈 뜨고 있는 한 그 꼴은 안 볼 것이다.
연대상선은 대한민국 빅3 해운업체다.
한국해운과 연대상선, NTX 팬오션.
세계적으로 호경기 시절 무리하게 시세를 확장했다.
호황에 취해 불황을 예견하지 못하고 방만하게 고가 장기용선 계약을 맺었다.
업자들에게 휘둘려 멍청하게 봉이 된 세 해운업체.
그렇게 연대상선은 법정관리를 신청해 산업은행 소유가 된다.
한국해운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침몰한다.
무리한 시세 확장의 대명사인 NTX도 마찬가지.
수출로 먹고 사는 대한민국 해운 업체 빅3가 방만 경영과 정부의 무관심으로 초라한 상태가 된다.
국민들 모두가 실소했다.
한때는 오대양을 누볐던 한국해운이 몇 년 사이에 이렇게 엉망이 될 거라 누구도 예측 못 했다.
미래를 예견하고 운반 이용이 저렴한 대형 컨테이너선을 발주하지 않은 채 어리석게 빌려만 썼던 대가는 참혹했다.
투자는 하지 않고 쏙쏙 돈만 빼먹은 멍청한 해운업체 사주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고 이가 갈렸다.
몇 년 후 세계 해운업을 좌지우지하는 공룡 업체인 2M의 종이 되어버리는 해운업체들.
그 꼴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자체 해운업체가 있네. 그런데 굳이 레드 오션에 들어갈 메리트가 없어.”
전문구 회장의 판단은 정확했다.
다만.
“애국하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망해가는 판에 들어가는 짓은 바보나 하는 행동이야.”
“땅 사려고 10조 쌓아두셨지 않습니까.”
“그건 미래를 위한 투자네.”
“회장님 욕심이겠죠.”
“그렇게 말해도 할 말 없네.”
“연대상선 책임지십시오.”
강하게 나갔다.
“장 회장!”
전문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고 전준영 회장님이 아끼시던 회사입니다. 대한민국은 수출로 먹고산다는 걸 알고 진심으로 껴안고 보듬었던 연대상선입니다. 그런데 그깟 몇 푼 손해 때문에 버리시겠다는 겁니까?”
“연대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만 이제는…… 남과 같네.”
아버지에게 적통을 물려받지 못한 한이 아직 남아 있었다.
고집불통 전문구 회장의 고집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피식 실소가 나왔다.
아직도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내가 누군지 정확히 모르고 있는 전문구 회장.
“배가 부르셨습니다. 전문구 회장님.”
부드러웠던 나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눈빛이 흔들렸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
전문구 회장이 당황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꿈틀대는 게 엿보였다.
장남인 자신을 믿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연대상선에 투영됐다.
미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들은 모두 다 부질없는 것.
“애국을 가려서 하면…… 그게 애국입니까?”
툭 내뱉은 질문.
“끄으응.”
고집불통 곰이 신음을 흘렸다.
“매국노 새끼들이 판을 짰습니다. 중국과 일본, 유럽의 대형 해운업체들이 선주들과 짜고 판을 깔았습니다. 거기에 말려든 멍청한 오너들 때문에 대한민국 자산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보고만 있겠다고요?”
나는 눈빛을 사납게 부릅뜨고 물어뜯을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연대상선에 대해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전문구.
몇몇 오너들 때문에 자율협약에 들어가고 애꿎은 직원들만 거리에 나앉는다.
수십 년 동안 바다에서 목숨을 걸고 지켜온 대한민국 해운업의 멸망.
“돌아가셔도 됩니다. 제가 인수하면 그만입니다.”
“장 회장…….”
“제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준영 회장은 전문구 회장의 저런 고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 같다.
형제를 돕지 않고 욕심이 하늘을 찌르는 큰 아들.
자식 중에서도 아픈 손가락에게 더욱 재산을 물려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물론 그 선택이 잘한 일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겠네. 시간을 주게.”
전문구 회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 그거 아십니까?”
“???”
그냥 이대로 떠날 수 없었다.
전문구 회장에게 남기고 싶은 나의 충고.
“달걀을 스스로 깨고 나오면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면…… 후라이가 됩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