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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8장. 인연은 돌고 돌아.(2) (765/1,284)

768장. 인연은 돌고 돌아.(2)

“자, 장 대리?”

고자룡 회장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 나왔다.

고자룡은 눈앞의 장태산의 아버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진심으로 놀랐다.

그동안 장태산에 대한 정보를 적지 않게 수집했다.

물론 가족 관계에 관한 정보도 있었지만 그 부분은 간단하게 보고 받는 수준이었다.

장대국이라는 이름 석 자도 오늘 처음 눈에 들어왔다.

보고서에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주설란까지만 중요 인물로 표기가 됐다.

장태산 아버지는 IMF 시절 명퇴를 당하고 귀농해 유기농 과수를 재배한다고만 기록되어 있었다.

1997년은 참 어려운 시절이었다,

상당수 직장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회사에서 명퇴를 당했다.

무수한 퇴직자들 틈에 섞여 사라졌던 장대국.

장대국은 한때 엘자전자 기술사업부에서 근무했다.

당시 엘자전자의 전무로 근무했던 고자룡.

그때의 장대국을 기억하고 있었다.

IMF가 터지기 몇 달 전.

대리였던 장대국의 보고서를 고자룡이 봤다.

오정을 이겨보겠다고 전투적으로 뛰던 시점이라 직원들의 의견을 많이 수렴했던 시기였다.

고자룡은 장대국이 제출한 보고서가 흥미로웠다.

보고서는 그때는 미처 생각하기 어려웠던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장대국의 보고서는 2,000년을 기점으로 초격차 선도적 반도체 기술을 소유한 기업만이 살아남게 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폭 넓은 경제 전망을 점치는 시야를 갖고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에서 제시한 경제 정책의 문제점을 꼬집는 부분도 눈에 띄었다.

방만한 환율 정책과 섣부른 자본 시장 개방으로 일정 시간이 지난 뒤부터 대기업에도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더불어 엘자그룹은 하루 빨리 방만한 계열사들을 정리하고 부채를 선제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비축된 힘은 반도체를 비롯해 무선 사업부에 올인해야 한다는 파격적 견해로 작성된 보고서였다.

당연히 보고서를 검토한 부장급들 선에서는 오만하고 건방지다는 말이 오갔다.

대리는 그룹 내 조직에서 말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고자룡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장대국의 보고서를 흥미롭게 살폈다.

차후 직접 불러 면담 시간도 가졌다.

고연대 전자학과를 졸업한 인재로 인상이 좋았던 장대국.

간단하게 그와 차를 마시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그의 해박한 식견에 속으로 감탄하며 그를 눈여겨봤었다.

내심 고자룡은 그를 자기 라인 사람으로 심으려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IMF 폭풍이 매섭게 몰아쳤다.

엘자에 불어 닥친 바람은 더 거셌다.

산업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으로 엘자반도체가 한순간에 날아갔다.

고자룡도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고 장대국을 챙길 여력조차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무심히 또 흘렀다.

난파선을 뭍으로 끌어올리고 다시 항해를 준비할 때쯤 그를 찾았지만 이미 장대국은 회사를 떠나고 없었다.

그렇게 흐른 세월이 오늘에 이르렀다.

이렇게 인연이 돌고 돌아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마주하게 됐다.

“아직 절 기억하고 계십니까?”

장대국이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물었다.

“……물론이네.”

고자룡은 옛 부하 직원을 대하듯 편하게 입을 열었다.

사업차 만나러 온 장태산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장대국과는 과거의 인연이 더 깊었다.

“회장님이 되실 줄 알았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자가 그룹을 맡아 어려워.”

“아랫사람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던 분이셨습니다. 잘되실 겁니다.”

흐른 세월만큼 장대국도 고자룡을 편하게 대했다.

당시 세계정세에도 관심이 많아 여러 방면으로 공부를 했던 장대국이었다.

일찍 샴페인을 터트린 대한민국을 살면서 이미 먼저 깨어있던 대학 친구들은 걱정이 많았다.

당시 의기가 넘쳤던 장대국은 나름 철저한 조사를 통해 장문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운도 좋았다.

평소라면 과장과 부장 선에서 건방지다며 쓰레기통으로 처박혔을 보고서.

열린 의견 청취라는 명목으로 무리 없이 임원들에까지 전달됐다.

사실 별 기대는 없었다.

엘자 경영 시스템도 수직적 조직 구조였기에 신임 대리의 보고서를 면밀히 살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을 벗어나 회장 직계 자손인 고자룡 전무가 보고서를 봤다.

개인적으로 불러 의견을 묻기도 했다.

직급 상 전무와의 개인 면담은 꿈도 못 꿀 입장이었지만 연배가 비슷하다 보니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차를 나누기까지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장시간의 대화가 진행됐다.

장대국의 설익은 지식과 보고서에 관한 얘기를 경청하던 고자룡.

마지막에는 오랜 벗처럼 악수까지 하고 웃는 얼굴로 헤어졌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간은 편안한 회사생활이 이어졌다.

직속 선배들이 개인 면담에 관한 일을 부러워하면서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대해 왔다.

당시 고자룡 전무의 위세가 그 정도로 대단했다.

‘자존심이 뭔지…….’

장대국은 지나간 과거를 회상했다.

보고서에 언급한 내용처럼 하룻밤 사이에 거짓말처럼 국가적 위기가 찾아왔다.

해결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구조조정 여파가 쓰나미처럼 밀어 닥쳤다.

장대국은 그 물살에 많은 다른 직원들과 함께 쓸려 나왔다.

눈엣가시처럼 장대국을 견제하던 윗선에서 제일 먼저 명퇴 통보를 전했다.

인사과장과 친분 있던 직속 과장의 농간질이었다.

끌어주던 라인이 없던 장대국은 빌어먹을 회사라고 욕하며 자존심을 세웠다.

사실 그때 고자룡을 찾아갔다면 회사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이 버티면 다른 동료가 대신 퇴사해야 할 판.

끈임 없이 하부로 전달되는 희생과 상부로 올라가는 데 한계가 있던 조직 생활에 질려 있던 장대국.

잠시 쉬자는 심정으로 일가를 이끌고 시골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재기에 자신 있었다.

국가 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면 다시 취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운명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느새 부모님은 연로해졌고 노환으로 병세는 악화됐다.

한해 두해 돌보며 생활하다 보니 재취업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쳐 버렸다.

날이 갈수록 빚은 쌓여만 갔고 아이들은 한창 지원을 해 줘야 할 나이.

새로운 일을 찾지 못하고 잠시만 하고자 했던 일로 오늘까지 와 버렸다.

“고 회장님이…… 아시는 분입니까?”

상황을 지켜보던 장태산이 놀라워하며 물었다.

“엘자전자 근무 당시에 유일하게 말이 통하시던 직속 임원 분이셨다.”

“…….”

장태산이 장대국과 고자룡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러세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자룡 회장을 보며 장태산이 물었다.

“???”

장대국은 아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

반면 고자룡 회장은 얼굴을 붉혔다.

묘한 기류가 흐르는 세 사람의 분위기.

“식사하세요~.”

안주인 주설란 여사가 밝은 목소리로 잠깐의 어색한 분위기를 깼다.

***

선인들께서 인연은 돌고 돌아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르니 차카게(?) 살라고 했다.

진짜 깜짝 놀랐다.

고자룡 회장님이 아버지 직속 상사였을 줄이야.

아버지가 대기업에 근무했던 것까지는 알고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딱히 궁금해한 적은 없었다.

회귀한 뒤에는 과수 농가 일에 전념하셨기에 굳이 물을 필요도, 기회도 없었다.

IMF 시절에 직장에서 쫓겨난 이가 아버지 한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근무하던 회사가 엘자그룹인지는 몰랐다.

“한 잔 받으시죠.”

“내가 한 잔 따르겠네. 시간 나면 술 한잔하자고 약속했건만……. 20년 가까이 흘러버렸군.”

“그 약속도 잊지 않으셨습니까?”

“섭섭한 소리 말게. 어느 정도 회사가 안정되고 난 뒤 장 대리 자네를 찾았건만 퇴사하고 없더군. 나도 정신이 없어서…… 챙기지를 못했네.”

“이렇게 기억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미안하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또로로록.

오정 임 회장님이 과거 선물로 보낸 산삼주가 도자기 잔을 채웠다.

시간을 한참 건너뛰어서도 화기애애한 두 분.

입장이 묘하게 됐다.

한때 아버지께서 모셨던 임원이 그의 아들에게 살려달라고 청원하러 직접 걸음했다.

임윤아는 깊은 생각에 빠진 표정이었다.

이 상황이 얼떨떨한 고연지는 조신히 젓가락을 놀렸다.

“장 회장도 한잔하지.”

고자룡 회장이 나를 한결 편하게 대했다.

“그래 한 잔 받아라. 고 회장님은 그렇게 꽉 막힌 분이 아니다.”

뭔가 눈치를 챈 아버지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고자룡 회장님은 지금보다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가 먼저 올리겠습니다.”

“그럴까?”

고자룡 회장이 가볍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또로로로록.

잔에 채워지는 황금빛 산삼주와 훅 코를 파고드는 특유의 주향.

“아들. 엄마도 한 잔~.”

“어머니, 저도 산삼주 좋아해요~.”

“……그럼 저도.”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은 고지식한 집안이 아니다.

10인용 넓은 테이블에 둘러 앉아있던 엄마와 임윤아, 고연지가 약속이나 한 듯 잔을 들었다.

“그래. 다들 한잔씩 하지.”

그 모습에 아버지가 흐뭇해하셨다.

과거에는 아버지도 꿈만 꿨을 엘자 회장님과의 술자리.

“산삼주가 피부에 그렇게 좋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이 잔 받으시고 만수무강하십시오.”

돌아가는 분위기 상 너스레를 좀 떨었다.

“고마워, 아들.”

사랑이 한껏 담겨 있는 시선으로 잔을 받으며 눈웃음을 짓는 엄마.

“나도 태산 씨 곁에서 오래 살고 싶어.”

덩달아 임윤아도 활짝 웃었다.

“나도…….”

고연지도 해맑게 웃었다.

또로록.

모든 이들의 잔에 산삼주가 채워졌다.

“낙인석일촉(樂人惜日促)이라. 즐거운 사람은 해가 짧아 애석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밤 귀한 인연들을 만나 행복합니다. 이 시골까지 찾아와주신 고 회장님과 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과거와 달리 한마디 한마디에 자신감이 넘치는 아버지.

잔을 들어 올리며 멋진 건배사를 날렸다.

영농 회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듯 풍월까지 읊었다.

“이렇게 환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추운 바깥에 서 있다 훈훈한 집에 들어온 고자룡 회장님도 분위기에 얼추 취했다.

“어르신들 모두 건강하세요~.”

싹싹한 임윤아가 모두를 대신해 화답했다.

“건배!”

아버지가 잔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건배!!!”

짧게 부딪치는 잔들.

그렇게 추운 겨울 밤 멀게 돌아온 인연으로 다시 만난 우리 여섯 사람은 밤이 깊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식탁 위에서 울리는 맑은 웃음소리.

오늘 밤은 복잡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의 인연.

몇 잔 술에 길고 길었던 시간들이 맛있게 녹아들고 있었다.

***

사박사박.

습관이라는 게 무서웠다.

어젯밤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셨던 고자룡은 이른 아침 새소리에 잠에서 깼다.

서울과 달리 뒷산이 병풍처럼 드리워진 장태산의 본가.

고즈넉한 한옥 호텔 스위트룸 같은 손님방에서 눈을 떴다.

옆방에서 자고 있는 딸을 깨우지 않고 고자룡은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여벌의 옷은 챙겨오지 못했다.

이곳에서 잠까지 자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장대국이 건네 준 편안한 일상복을 입고 아침 산책에 나섰다.

장태산은 비서들과 경호원들을 위해서 연구소 게스트룸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진짜 왕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

연구소 내부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별궁 같은 본채 뜰을 거닐며 고자룡은 장태산이 꿈꾸는 미래를 상상했다.

지금 같은 기세라면 대한민국 그룹들 모두를 인수하고도 남을 듯했다.

눈앞의 연구소를 장태산이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는 1도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요즘 들어 고자룡 회장은 장태산의 능력을 확실히 깨닫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그룹도 몇 달 안에 작업해 꿀꺽 삼키고도 남을 괴물이었다.

엘자는 맛이 없어서 구매 목록에 넣지 않았다던 장태산.

다행이면서 한편으로는 몹시 서운했다.

투자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건 기업에 매력이 없다는 말과 같았다.

“왕은 아닙니다.”

“!!!”

그때 뒤에서 조용히 들려온 장태산의 목소리.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장태산은 생각보다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들었나?”

“젊어서 그런지…… 귀가 밝습니다.”

몸을 돌린 고자룡은 장태산을 바로 바라봤다.

아침 운동을 다녀온 듯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이다.

한파가 상당한 수준인데 추위를 전혀 타지 않는 듯한 장태산.

“부럽네. 난 자네가 오는 소리도 못 들었어.”

“속은 괜찮으십니까?”

“산삼주가 괜히 산삼주겠나.”

어제 저녁부터 고자룡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장태산을 대했다.

관심을 갖고 있던 옛 직원의 아들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더 정감이 갔다.

장태산의 눈빛도 마찬가지.

과거의 날선 시선이 아닌 부드러운 시선으로 고자룡을 대했다.

“해장하셔야죠. 어머니가 끓여주시는 콩나물 국밥이 일품입니다.”

“자당께서 음식 솜씨가 대단하더군.”

고자룡은 진심으로 칭찬했다.

반주로 곁들였던 어제저녁 식사.

구수한 청국장을 비롯해 매콤한 고추장불고기, 정갈한 밑반찬들이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을 돋게 했다.

정말 오랜만에 밥그릇을 두 공기나 비웠다.

술은 술배로 따로 들어갔다.

꽤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다.

이렇게 마음을 내려놓고 편하게 술을 마셔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회장님.”

장태산이 짐작하기 어려운 미소를 지으며 고자룡을 쳐다봤다.

“그렇게 웃지 말게. 나 살 떨리네.”

엄살이 아니었다.

이곳에 찾아오기 위해 고자룡은 여러 날에 걸쳐 많은 걸 내려놨다.

마지막 남아 있던 자존심도 용궁 가는 토끼처럼 집에 빼놓고 왔다.

“인연이 참 무섭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연지도 그렇고…… 아버지까지……. 고자룡 회장님과 저도…… 인연인 듯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

꿀꺽.

고자룡 회장은 장태산의 말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비즈니스.

“뭐, 뭘 말인가?”

고자룡이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엘자…… 저 주십시오.”

“!!!”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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