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3장. 이것들이!!!
“장한수 실장님이 왜…….”
강남에 위치한 오정그룹 본사.
오정그룹 핵심 사업부가 한 건물에 몰려 있었다.
물산 상무보 임윤아는 집으로 가지 않고 회사로 왔다.
장태산과 함께 보내던 시간과 분위가 좋았는데 갑자기 한 통의 전화로 계획이 깨졌다.
때맞춰 눈도 오고 오랜만에 두 사람 사이의 감정도 뜨거웠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장한수 실장의 전화 한 통에 좋았던 시간이 파토가 났다.
문제는.
“아빠 뜻일까? 그것도 아니면…….”
장한수 실장은 현재 그룹 내에서 계륵 신세가 됐다.
임성철 회장이 쓰러진 뒤 실질적으로 임준형이 그룹을 도맡았다.
임성철 회장 직속 비서 1팀이 대부분 일에서 손을 놓은 상황이다.
보좌할 대상이 사라진 만큼 당연한 수순.
대신 임준형을 담당하던 2팀이 보직을 꿰찼다.
계열사 사장단도 재빨리 줄을 갈아탔다.
그룹 전체가 떠오르는 태양이나 마찬가지인 임준형을 떠받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눈치 빠른 1팀 비서들은 줄을 갈아타거나 퇴직을 했다.
하지만 장한수 실장만큼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붙잡았다는 말이 맞았다.
과거 임성철 회장의 비자금을 비롯해 그룹 차원의 여러 가지 문제 해결을 그가 주도했다.
아무리 눈엣가시라 해도 당장 장한수를 쳐낼 수 없었던 것이다.
지주사 전환을 비롯해 승계 문제도 걸려 있다.
“하아아.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쉬웠어.”
임윤아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당당하게 경영에 개입하겠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말단부터 경력을 쌓지 않아 조직 돌아가는 원리를 깨우치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
끌어주는 라인도 없어 믿을 만한 사람들도 드물었다.
사실 상무보라는 위치도 애매했다.
물산에 속한 패션파트의 실질적 주인인 언니에게 회의 때마다 깨졌다.
실적을 내놓으라는 압박이 주였다.
임원들 앞에서 기업은 걸스카웃 교육 단체가 아니라는 훈계까지 들었다.
그런 언니를 따르는 자들이 제법 많았다.
엄마의 실드도 한계가 있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장태산이라는 카드를 뽑았다.
임윤아는 장태산을 믿고 이 판에 뛰어들었다.
“라인이겠지……. 새로운 동아줄을 잡고 싶은 거야.”
조직이 돌아가는 원리를 깨우쳐가는 임윤아.
장한수가 굳이 늦은 시간에 장태산을 만나려고 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회사 굴러가는 모양새도 가만 보면 암투가 넘치는 왕실과 같았다.
왕과 같은 회장을 중심으로 그 아래 각종 정치라인이 존재했다.
내관과 비유되는 비서실은 물론 몇 개 파벌이 서로를 견제하며 왕의 사랑을 받기 위해 꼬리를 흔들었다.
왕이었던 임성철이 쓰러졌다.
권력의 정점인 상선 장한수가 모시던 주인을 잃고 흔들리는 판.
불안한 만큼 새로 모실 주인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
오정의 2인자는 대한민국 재계 2인자라는 말과 통했다.
그런 권력을 하루아침에 놓쳐 버린 장한수 실장은 아직 궁을 떠날 준비가 안 된 것이다.
오정의 정보력을 통해 누구보다 장태산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었을 장한수.
그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을 임윤아도 직감했다.
“어떤 결말이 나도 난 태산 씨를 믿어…….”
임윤아는 냉정하게 부모보다 장태산을 더 믿었다.
부모도 몰랐던 자신의 위기 상황을 감지하고 다시 살게 해 준 남자.
이번 생은 그를 위해 살아도 전혀 아쉬울 게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의약 바이오라……. 태산 씨가 뭘 가지고 있을까?”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있는 장주시 연구소.
임윤아는 그곳에 정식으로 초대 받았다.
아빠가 병환 중이라 설에도 장태산의 부모님 댁에 안부 인사만 전했던 임윤아.
“선물로 뭐가 좋을까?”
인사를 핑계로 내일 아침 장주시로 내려갈 생각이다.
몇 년 동안 변함없이 자신을 예뻐해 주고 계시는 장태산의 부모님.
임윤아는 시댁을 방문하는 새색시마냥 깊은 고민에 빠졌다.
***
“…….”
장태산은 말이 없었다.
무심하다는 말이 적당할 정도로 무감정한 눈빛으로 장한수를 바라봤다.
‘짐작하고 있었단 말인가?’
마지막 패를 까고도 장한수는 상대편의 포커페이스를 읽지 못했다.
반면 장태산은 장한수의 폭탄 고백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다.
무서웠다.
오정 임성철 회장보다 더 대하기 힘든 거인이었다.
장한수 개인적으로 온갖 정보력을 동원해도 장태산에 대해 면면히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밖으로 전해지고 있는 얘기보다 장태산이 보유한 재력이 더 엄청나다는 사실이다.
“미련입니까? 욕망입니까?”
장태산이 잔을 입에 대며 물었다.
파르르르.
천하의 장한수가 몸을 떨었다.
사실 장한수를 잡지 못해 다른 그룹들은 난리가 났다.
지금까지 오정 회장 비서실장으로 쌓은 인맥이 장난 아니었다.
3선 이상 국회의원들 상당수와 고위 행정부 공무원과 검사, 판사까지.
그들 모두가 장한수의 손을 거쳐 용돈을 받았다.
뒤에서 임성철 회장의 지시가 있었지만 직접 전달한 장본인은 장한수 자신이었다.
그가 말 한마디 뻥끗하면 대한민국은 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되며 뒤집어질 것이다.
그런 천하의 장한수가 미련과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다.
모시던 임성철 회장도 섣불리 대놓고 할 수 없었을 질문.
장한수는 장태산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의 질문은 농담이 아니었다.
‘시험.’
과거 수십 년 전부터 수없이 겪어왔던 테스트가 다시 시작됐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고 또 같았다.
“회장님이 보시기에 미련이면 미련인 것이고 욕망이면 욕망인 것입니다.”
장한수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혼란한 감정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몸에 밴 온전한 복종.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장한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절대 1인자가 될 수 없는 운명.
누군가를 보좌할 때 차라리 안정감이 들고 추진력이 배가 됐다.
만년 2인자의 운명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 덕분에 편한 삶을 살아왔고 재산도 조 단위가 됐다.
해외에 본거지를 둔 사모펀드를 이용해 비자금을 조성하고 오정 주식을 모았다.
악재에는 팔고 호재에는 매입하기를 수백 수천 번을 거듭했다.
오정그룹 계열사 주식만으로도 장한수는 거부가 됐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왕좌가 흔들리면서 몇 달 동안 벌어진 가지치기.
몇 년은 버틸 줄 알았던 장한수의 손발이 하나둘씩 잘려나갔다.
피부를 뚫고 뼈까지 와 닿는 권력무상의 허무함.
장한수는 강한 자에게 자신의 남은 운명을 의탁하기로 작심했다.
임성철 회장도 내심 두려워하는 장태산이야말로 최적의 인물이었다.
“미련과 욕망, 둘 다 맞군요.”
꿀꺽.
장태산은 잔을 마저 비워냈다.
“…….”
그 모습을 보며 장한수는 묵묵히 던져질 대답을 기다렸다.
자존심 따위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오면서 다 내려놓았다.
“좋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장한수는 장태산의 승낙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인생에 펼쳐질 화려한 미래.
“단.”
하지만 역시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
“?”
“저와 인연한 후부터는 음지에 사셔야겠습니다.”
“네?”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정에서 퇴사하십시오.”
“…….”
“그리고 어떤 공식 석상에도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됩니다.”
‘감춰진 패…….’
장한수가 장태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자신은 이제 장태산의 감춰진 패로 살아야만 한다.
어렵게 선택한 길.
누구나 우러러보는 화려했던 오정의 2인자처럼은 살 수 없다는 의미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임시직입니다.”
“네???”
“아직 임성철 회장님이 살아 계십니다. ……아직은 예의가 아니죠.”
임성철 회장의 거취에 장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바입니다.”
임성철 회장은 언제나 장한수의 첫 주인일 수밖에 없었다.
쓰러지기 전까지 거인에게 받았던 은혜를 장한수도 잊지 않았다.
“능력도 보여주셔야죠.”
“하명하십시오.”
기다리던 바였다.
“알아서……. 잘게 다져서 양념까지 부탁드립니다. 광양 불고기처럼 달콤하고 부드럽게 씹을 것도 없이 말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해 못 할 장태산의 주문.
“제 전공입니다. 만족하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답하는 장한수.
그의 눈동자가 젊은 시절 그때처럼 전의로 활활 불타올랐다.
***
관록은 절대 무시하면 안 된다.
장한수 실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임성철 회장.
쓰러지기 전에 술자리에서 지나가는 말로 부탁했다.
자신에게 무슨 변고가 생기면 입마개를 잘 부탁한다고.
당시에는 흘려들었지만 장한수 실장의 전화를 받고 깨달았다.
모든 건 임성철 회장의 계획 하에 있었다.
장한수 실장은 오정과 임성철 회장에게는 아킬레스건과 같았다.
그가 잘못 입을 뻥긋하는 순간 그룹이 쌓아온 모든 것이 공중분해 될 수 있었다.
오정이 크는 동안 암암리에 저질렀을 모든 불법 행위가 장한수 실장 손을 통해서 진행됐다.
임성철 회장의 지시가 있었으니 두 사람은 공범이나 마찬가지.
그런 장한수 실장에게 입마개를 채웠다.
전 주인 임성철 회장이 분명히 살아 있지만 장한수 실장에게도 감춰야 했다.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일.
“태산 씨, 무슨 생각해?”
“응?”
“장한수 실장님 문제지?”
파란색 벤틀리를 타고 본가로 가는 길.
옆에 타고 있던 임윤아가 딴생각에 빠진 나를 훅 치고 들어왔다.
“비밀.”
“그러니까 더 궁금하잖아.”
임윤아를 장주시로 데려가는 중이다.
부모님께서 임윤아를 무척 보고 싶어 했다.
나와 뜨거운 밤을 보낸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엄마가 특히 더 적극적이었다.
부모님은 로리아나와 사라의 재산 규모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임성철 회장님에게 관리(?)되어 온 만큼 의리를 중시했다.
“회장님, 부탁이었어.”
“아빠?”
“어.”
“……그럴 줄 알았어.”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임윤아는 바로 알아들었다.
현 시점에는 장한수 실장을 오정 사람들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기업과 자신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장한수 실장을 덮어놓고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잘됐으니까. 걱정 마.”
“그럼 태산 씨 사람이 됐겠네?”
“당분간.”
“알아서 해. 난 태산 씨 믿어.”
신뢰를 듬뿍 담아 말하는 임윤아.
그녀의 그런 믿음이 고마웠다.
“아~ 해봐.”
임윤아가 통통하고 노릇하게 구워진 오징어 다리를 뚝 떼어 건넸다.
자동반사로 입을 벌려 오징어 다리를 받아먹었다.
아무리 벤틀리를 타고 다녀도 지역 휴게소마다 있는 맛있는 간식은 그때그때 먹어야 제 맛.
우동 한 그릇을 비우고 간식까지 챙겨 여유 있는 드라이브를 즐겼다.
많은 눈이 내리면서 다소 한가해진 서해안 고속도로.
제설작업으로 운행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한파에 도로는 많이 한산했다.
“맛있지?”
오정 막내따님이 손수 찢어 건네준 오징어 다리라 더 맛있었다.
“엄마는 휴게소 음식 먹지 말라고 하는데 난 이게 좋아. 특히 구운 오징어와 이 매콤한 고추장은 환상이야.”
많이 편해진 사이가 된 나와 임윤아.
오징어 다리 하나씩 나눠 사이좋게(?) 씹어 먹었다.
다만.
2차선을 막고 서로 경쟁하듯 비슷한 속도로 달리는 두 대의 트럭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앞쪽에 트럭이 나란히 차로를 점령한 채로 달렸다.
추월을 할 수 없어 속도가 자꾸 줄어들었다.
부우우우우우웅.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배기음.
속도를 줄이고 있는 나의 벤틀리를 향해 후방에서 무식하게 달려오는 또 다른 두 대의 트럭.
언뜻 봐도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건 마치 날 노리고 짜놓은 계획된 운행이 분명했다.
“이것들이!!!”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