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0장. 보물창고.
“장태산……. 이 개놈의 새끼를…… 흐읍…… 흡.”
별장에 머물고 있는 임동철 명예회장.
소파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동생이 쓰러져 병상에 있는 모습을 확인하러 갔다가 도리어 화병만 얻었다.
몇 달 동안 잠을 못 이뤘다.
장태산, 그놈의 얼굴이 쉼 없이 떠올랐다.
목숨을 바쳐 키워낸 KI그룹을 동네 작은 구멍가게 말하듯 비웃었다.
그리고 남은 목숨에 대한 협박까지.
임동철이 그토록 회피하고 싶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장태산을 만난 뒤부터 더 진하게 따라 다녔다.
마치 등 뒤에 저승사자가 와 있는 것만 같았다.
“나…… 안 죽어! 아직 안 죽는다고! 성철이 그 자식 먼저 보내고 가도 갈 거야……. 억울해서 못 죽어!”
무일푼이나 마찬가지 신세로 집안에서 쫓겨날 때부터 키워온 응어리였다.
이성계에게 쫓겨난 이방원의 심정이었다.
인생을 바쳐 오정을 위해 일했는데 돌아온 건 패륜아라는 딱지였다.
만약 오정이 자신의 손에 의해 키워졌다면 적어도 지금보다 더 엄청난 그룹이 되었을 것이다.
임동철은 그것만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6개월이라고? 네놈이 날 우롱한 죄는…… 기필코 다시 묻겠다.”
악만 남아 있는 임동철의 눈빛이 반짝였다.
순간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여러모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장태산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아봤다.
지독한 놈이었다.
장태산 가족들과 주변인에 대한 경호가 빈틈없이 철저했다.
종종 써먹던 조직 놈들도 장태산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떨었다.
강남 하나회 구광필을 처리한 장본인이 장태산이라는 말까지 들렸다.
자살이라 판명이 났지만 조폭 내 조직원들은 믿지 않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에는 구광필은 삶에 대한 탐욕이 남달랐다.
부산을 휘어잡고 있던 조직도 장태산에게 당했다.
대한민국 2대 조직이 그 장태산이란 놈한테 무릎을 꿇었다.
“가장 뼈아픈 방법으로 놈을 괴롭혀야 해. 가장 뼈아픈 방법……. 쿨럭……. 크으.”
폐기능이 상당히 나빠진 임동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숨이 가쁠 정도로 악화된 건강 상태에서조차 임동철은 악마적 본성을 털어내지 못했다.
지금껏 이 정신으로, 악으로, 오기로 KI그룹을 키워왔다.
상대의 허점을 발견한 즉시 빈틈을 파고들어 목덜미를 물었다.
60개가 넘는 계열사들 중 상당수를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제 손아귀에 쥐었다.
기술 좋은 중소기업들을 물색해 대기업이라는 이름으로 짓눌러 사냥했다.
비겁한 술수로 얻어낸 승리의 재물들.
“장태산 니가 웃고 있을 때…… 지금이 좋을 때다. 너만은…… 꼭 데리고 가마.”
때 아니게 임동철은 악랄한 희망을 품었다.
똑똑.
그때 문 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
“들어와.”
KI그룹을 키울 때부터 수족처럼 움직이며 따라왔던 비서 조정열이 들어왔다.
임동철 옆에서 온갖 시중을 들며 필요하다 싶은 중요한 정보들을 물어왔다.
아직까지 KI그룹 주식 상당수를 소유하고 있는 임동철.
“회장님…….”
비서 조정열이 임동철을 조용히 불렀다.
어두운 표정이다.
“왜? 무슨 일이야?”
30년 넘게 보필을 받아온 만큼 임동철은 조정열 얼굴만 봐도 낌새를 알았다.
“회사가 시끄러울 것 같습니다.”
“시끄러워? 왜? 혹시 주황이가 사고 쳤어?”
둘째 아들 임주황은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 임동철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게 아닙니다.”
“그럼 뭐야?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봐.”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온 임동철.
“몇 개 언론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희가 수입 중인 식품들의 안정성에 관한 뉴스가 보도될 거라고 합니다.”
“뉴스?”
“식용유와 사료를 비롯해 여러 식료품에 첨가된 유전자 원재료에 대한 검증 문제라고 합니다.”
“무슨 헛소리야! 유전자 변형식품이 뭐가 어때서! FDA도 인정한 먹거리를 왜!”
뜬금없는 얘기에 버럭 큰소리를 치는 임동철 회장.
문득 과거 식료품 밀수 사건으로 모든 걸 박탈당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식품 원재료에 관련한 일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만큼 격하게 반응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조정열이 차분하게 짐작되는 부분을 언급했다.
“뭐야!! 어떤 새끼가! 누가 날 건드려!!!”
임동철은 별장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최근 들어 주가 변동도 심합니다.”
“주가까지? 그럼…….”
늙은 너구리같은 임동철이 바로 의미를 파악했다.
“외국계 자본과 함께 오정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놈들이야 그런다 치고! 오정에서는 누가? 설마…….”
“임준형 부회장입니다.”
“으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신음을 흘리는 임동철.
동생 임성철을 잘못 건드린 죄를 오정 황태자가 물어왔다.
“그리고 장태산도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 장태산?”
“증권가에 찌라시도 돌고 있습니다. 장태산이……. KI그룹을 노린다고 말입니다.”
“!!!”
놀란 임동철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다시 뇌리를 스치는 6개월이라는 기간.
“개새끼……. 진짜 죽여 버려야겠어!!!”
***
“태산 씨. 변호사는 뭐야?”
“내 직업이잖아.”
“말투가 진짜 변호사 같았어.”
“변호사로도 밥 먹고 살겠지?”
“응.”
“다행이네. 의뢰가 많지 않아서 걱정이었는데.”
엄살을 떨었다.
“먹고 사는 일은 걱정 마. 나 취직했으니까 집에서 살림만 해.”
거침없이 당당하게 말하는 임윤아.
이래서 남자들이 연상에 대한 로망을 품는 거 같다.
엄마의 듬직함 같은 말투에 매료되는 초식남들이 많아지고 있다.
지그시 그녀를 바라봤다.
“…….”
많이 변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2008년이 떠올랐다.
선 자리를 위해 미국에서 날아온 그녀.
내 친구들에게 술과 밥을 쏴주던 친절한 그때 그 누나가 앞에서 배시시 웃고 있다.
어느새 서른이 넘은 여인이 됐지만 여전히 귀여운 인상은 그대로다.
노화 현상도 없다.
신전표 성수로 피부뱀파이어가 됐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뒤 발견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행복이 얼굴이 가득했다.
“태산 씨, 감동했어?”
말은 놓았지만 태산 씨라고 꼭꼭 불렀다.
얼굴도 예쁜데 늘 웃고 있는 미녀는 언제나 옳았다.
“일은 잘돼?”
어느 순간부터 나도 편하게 말을 놓았다.
만나자마자 뜨겁게 그림을 그리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첫날밤도 보냈다.
아직 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서로 간에 신뢰로 인해 익숙하고 편안한 감정이 흘렀다.
“할 만해.”
“오! 임 상무님! 그러고 보니 고위 임원의 포스가 느껴집니다.”
“아직 상무보야.”
“그게 그거지.”
금수저는 취업 방법도 남달랐다.
공부하다 말고 귀국해도 바로 임원급으로 취직이 됐다.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을 부러워 할 일이 없었다.
전생에 쌓은 자신의 업과 조상들이 쌓아놓았을 공덕이 열어주는 인생.
보이지 않는 세상 역시 또 다른 공평의 저울로 알아서 돌아갔다.
카르마 포인트라 불리는 선업과 악업의 균형은 전생과 이생, 다음 생까지도 결정짓는다.
그래서 무조건 덮어놓고 옳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선과 악에 대한 계산법은 인정사정을 보지 않는다.
선한 자에게는 언젠가 상이 온다.
또 무심코 던진 악한 말 한마디도 어느 날 부메랑이 되어 내 앞에 날아오는 것이 하늘이 정한 업의 법칙이다.
“어려운 건 없고?”
“그게…….”
회의 중에 임윤아의 전화를 받았다.
변호사 장태산이라고 하자 웃으며 저녁식사를 청했던 임윤아.
“어떤 의뢰야?”
통화 중에 임윤아는 의뢰가 있다고 말했다.
당연히 오정과 관련된 사건.
오정물산은 오정그룹 계열사에서 매출 비중이 그리 크지 않지만 그 의미 자체로 핵심 기업에 속했다.
그룹의 실질적 지주회사 같은 기둥 역할을 했다.
특히 물산은 오정 생명의 핵심 주주이기도 하다.
또 오정생명은 오정전자의 대주주다.
물고 물리는 순환관계에서 오정물산은 말 그대로 중심 뼈대였다.
동시에 오정물산은 그룹의 모태이기도 하다.
과거 오정상회라는 이름으로 농산물 판매에 이어 수출을 책임지던 종합 무역회사.
무역뿐만 아니라 레저와 건설과 패션까지 총망라해 아울렀다.
시대가 변해 현재는 무역보다는 건설이 주력이 되었지만 갖고 있는 이름의 무게는 변함이 없었다.
“언니가 피곤하게 시비 거는 거 빼고는 만족해.”
“그렇겠지. 굴러온 여동생을 욕심 많은 언니가 반길 리가 없지.”
“이럴 때마다 여러 생각이 들어. 돈이 뭔지…….”
성장과정에서 보인 행보가 달랐다. 오정 일가에서 생각이 별나다고 할 수 있는 임윤아.
“많으면…… 좋지”
“태산 씨도 돈 좋아해?”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까?”
“그래?”
“나도 사람이야. 내 밥그릇이 차야 남의 밥그릇을 살필 여유가 생기는 법이니까.”
가난한 자는 남을 돕고자 해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일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착한 부자들도 많다.
자신들이 일궈낸 엄청난 수익으로 공익 재단을 설립하고 사후에 전 재산을 기부하기도 하는 멋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이 생을 마감하고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면 엄청난 카르마 포인트를 받아 금수저로 환생한다.
물론 다시 태어난 생에서 전생과 달리 짠돌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본인이 새로이 선택한 삶일 뿐이다.
짠돌이로 살며 전생에 쌓은 포인트가 떨어지면 한순간 흙수저가 되기도 한다.
영원한 것 없이 돌고 도는 게 바로 생이고, 그 생은 바로 윤회인 것이다.
살아있을 때 포인트의 소중함을 눈곱만큼도 몰랐던 신계의 신들이 보이는 노력이 얼마나 눈물겹던가.
“맞아. 그렇게 살 거야. 오정을 사회적 기업으로 만드는 게 내 소망이야.”
임윤아, 멋졌다.
그런 의미에서 오정은 중요했다.
대한민국의 산업 중추 뼈대를 이루고 있는 오정전자.
“확실히 도와줄게.”
“정말?”
“나 못 믿어?”
“믿어……. 그래서 가끔 실망이(?) 커.”
임윤아가 뭔가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입맛을 다셨다.
믿어서 실망한다는 말이 의미심장했다.
같이 있던 순간마다 틈틈이 나를 노렸던 임윤아.
오늘 밤도 왠지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의뢰 내용이 뭘까?”
임윤아와 서울 외곽으로 나왔다.
점점 도시화가 되고 있는 미사리 강변.
도도히 흘러가는 한강 야경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데이트는 차 안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는 꽤 괜찮다.
디링 티리링~♫.
귀에 조용히 감도는 감미로운 바이올린 선율과 한강,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설경.
따뜻한 차안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아 좋았다.
임윤아가 한국에 있어서 이런 데이트도 가능했다.
“태산 씨가 도와줬으면 해.”
“응?”
“실적이 필요해. 회사 임원들뿐만 아니라 언니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어.”
임윤아가 전투의지를 보였다.
임성철 회장의 유전자는 그냥 흐르는 게 아니었다.
한때 형제들 중에 가장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임동철 방문 때도 밀리지 않고 대차게 나가던 임윤아.
“오정물산에 도움이라…….”
오정물산 주력 계열사들을 떠올렸다.
건설이 중심인 만큼 딱히 도와줄 게 떠오르지 않았다.
주총이라도 열린다면 임윤아를 상무보가 아니라 대표로 만들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의미가 없다.
내가 소유한 건설사들과 시너지 효과를 낼 부분이 적었다.
다 합쳐도 오정건설만 못했다.
물건을 주문하기에는 소화할 물량이 없다.
“장주시에 가보고 싶어.”
“장주시?”
“아버님이랑 어머님이 놀러오라고 성화셔.”
임윤아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 부모님.
임성철 회장님의 명절 선물 공략도 크게 한몫했다.
“솔직하게 말해.”
쉽게 속을 내가 아니다.
임윤아 눈동자 깊은 곳에서 관찰되는 욕심.
어차피 임윤아를 도와야 했다.
오정이 잘되면 그건 다 내 자본으로 돌아온다.
그룹 최대주주가 나다.
직원이 열심히 하겠다는데 오너 입장에서 도와주지 못할 것도 없다.
“태산 씨, 그곳에 엄청난 보물을 숨겨 놨더라?”
뭔가 안다는 듯 씨익 웃는 임윤아.
오정의 정보력은 인정한다.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다면 거짓말.
“소문이…… 났어?”
“아직은……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았어.”
“관심 있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임윤아가 또 웃는다.
회사 임원이 되더니 사회생활의 맛을 제법 안 모양이다.
“뭘 원하는데?”
보물 창고는 아직 개봉 전이다.
배터리 말고는 세상에 알려진 게 없다.
그 와중에 냄새를 맡은 임윤아.
날 예사롭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녀.
천천히 부드러운 입술이 열렸다.
그리고.
“바이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