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8장. 정신교육.(4)
“너 뭐야!”
엄철동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라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서 곧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전직이라지만 조직의 수장급이었던 자신에게 굴하지 않고 대드는 구서현에게 화가 잔뜩 났다.
이제 부정할 수 없이 피부에 와 닿는 현직과 전직의 차이.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현역에서 물러났어도 감히 선배 그림자도 밟지 못하던 검찰 조직이었다.
그런데 일개 부부장 검사 따위가 손가락 욕을 날렸다.
하도 어이가 없어 입도 다물어지지 않았다.
한 술 더 떠 웬 젊은 놈이 겁도 없이 한선옥 여사 앞을 막아섰다.
이 또한 엄철동 자신을 무시한 데서 나온 태도라 여겼다.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현역 검사는 아니지만 아직도 현 총장과 가볍게 어울리며 룸살롱에서 만나 술을 마시는 사이다.
총장보다 기수가 높아 조직에서 물러났음에도 친했던 후배들이 현재 검찰을 꽉 잡고 있었다.
일반 국민들은 상상도 못 할 검찰의 엄청난 파워.
전관예우 기간에는 살인죄를 제외하고 웬만한 범죄에서 불구속 수사에 최소 구형을 얻어낼 수 있었다.
어차피 후배 검사들도 언젠간 옷을 벗어야 하기에 상부상조의 정신이 싹틀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공무원 검사 월급으로는 하룻밤 술값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위로는 선배를 대접하고 아래로는 후배들을 키우려면 한 달 유흥비로 최소 한 장 이상이 필요했다.
로펌에 몸담지 않고 KI그룹을 선택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5년 근무 계약금으로 현찰 40억을 받았다.
거기에 연봉이 20억.
생각지 못한 추가 수당도 두둑했다.
KI그룹에 헌신한 뒤로 그나마 물질적 괴로움에서는 자유롭게 해방된 엄철동.
한선옥 여사가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양심을 팔고 충성을 맹세한 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확인시켜줘야 할 타이밍.
엄철동은 장태산을 향해 사나운 이를 드러냈다.
“그런 당신은 뭔데?”
장태산이 엄철동을 향해 구서현이 그랬던 것처럼 웃으며 물었다.
‘이것들이 쌍으로 미쳤나. 날 핫바지로 봤다 이거지!’
엄철동의 두 눈이 야생성을 드러내며 번들거렸다.
나이도 한참 어린 것들이 건방지기가 하늘을 찔렀다.
과거 엄철동 초임 검사 시절만 해도 이 따위로 굴었다면 바로 취조실로 끌고 갔을 상황이다.
“이 새끼가 어디서 이죽거려! 죽고 싶어!”
룸에 엄철동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당신께서도 반말하셨잖아요.”
장태산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과거 장태산이 주구장창 봐왔던 상황.
권력과 부를 거머쥔 자들의 횡포가 당연하다는 듯 곳곳에서 연출됐다.
“그리고 같은 변호사끼리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변……호사?”
엄철동이 변호사라는 말에 흠칫 놀랐다.
나이가 꽤 어린놈이다.
재학 기간을 고려해보면 로스쿨 출신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법시험을 패스한 인재.
“엄철동 씨.”
장태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엄철동을 불렀다.
“너…….”
“까불면 다칩니다.”
“이 새끼……가 뒤지려고…….”
“와우! 우리 감찰부장님 패기가 좋으시네요. 앞에 있는 장태산 변호사님은 청와대에서도 섣불리 건들지 않는 분인데……. 직접 죽이기라도 하시게요?”
허보영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몇 마디 던졌다.
“장……태산……. 허억!”
그제야 장태산의 이름을 곱씹다 신음을 터트리는 엄철동.
요즘 검사들이 절대 건들지 말아야 할 인물 중 하나로 뽑고 있는 인간이 장태산이었다.
그를 쳐내기 위해 여러 검사들이 멋모르고 달려들었다 모조리 추풍낙엽 신세가 됐다.
수도권에서 잘나가던 검사들이 하루아침에 지방으로 좌천당했다.
리앤장은 물론 삼우로펌까지 나서서 가드를 쳐주는 자.
미국 백악관이 뒤를 봐준다는 어이없는 소문까지 파다했다.
검사들 수준에서 처리할 인물이 아니었다.
또로록.
엄철동의 이마에 금방 식은땀이 맺혔다 흘러내렸다.
부딪쳐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불타던 전투의지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자…… 장태산!”
한선옥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이제야 정확하게 듣게 된 기생오라비의 이름 석 자.
‘저 자식이……. 그룹 저승사자라고?’
다시 한 번 장태산을 살피는 한선옥.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안아그룹 안주인이 하루아침에 거지꼴이 됐다.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이 통째로 외국 자본에 넘어가 버렸다.
횡령과 배임으로 있는 것 없는 것까지 탈탈 털리고 숨겨 놓았던 비자금까지 모두 빼앗겼다.
뇌출혈로 쓰러졌던 오승혁 회장이 기적적으로 깨어나긴 했지만 곧 감옥에 들어갔다.
멀쩡했던 아들들 모두 구제불능의 폐인이 됐다.
10대 그룹 총수 일가의 공중분해를 보고 강남 상류층은 공포를 느꼈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부터 심심치 않게 언급되었던 장태산이라는 이름.
고위 공직자나 법조계, 기업인들 모두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뒷배를 두고 있다는 말과 함께 장태산은 절대 건들지 말아야 할 인물 1순위가 됐다.
청와대의 실세나 마찬가지인 주순자마저 한수 밀렸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이름의 당사자를 오늘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조카 임윤아와 연인 관계라는 소식도 언뜻 들었다.
깐깐한 황라현도 마음에 들어 했다는 장태산.
갑자기 온몸을 휘감는 지독한 공포.
휘청.
한선옥은 갑작스러운 현기증에 이마를 짚었다.
“엄마!”
임서라가 한선옥을 부축했다.
“…….”
룸 안의 공기를 짓누르는 침묵.
‘천하의 KI그룹 안주인이 저 정도로 충격을 받다니…….’
백화점 부지점장 안태정은 다시 한 번 놀라고 있었다.
무서울 게 아무것도 없어 보였던 KI그룹 안주인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사실 이 자리에 있는 인물들 모두가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리앤장 수석 변호사에 중앙지검 검사, 전직 고위 검사장, KI그룹 안주인과 맏딸, 대한민국 사채왕의 외동딸까지.
‘지점장님 말씀이 맞았어. 회장님처럼 대하라는…….’
무조건 지시를 따르라고 했다.
지점장님은 이미 알고 있었던 장태산 대표의 힘.
안태정도 이렇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장 변이…… 그렇게 대단해?’
구서현도 상황 돌아가는 분위기로 장태산을 다시 봤다.
자신이야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불온한 인생이지만 장태산은 달랐다.
검사장급 퇴직 변호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장태산.
KI그룹 사모가 그의 이름을 듣고 놀라 휘청거릴 정도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장태산이 한선옥과 임서라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닥쳐!!!”
역시, 아직도 상황을 이해 못 한 임서라.
“후훗.”
예상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는 장태산.
“닥치라면…… 닥쳐야죠. 그럼 오늘은 보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 이후 평안한 일상은 당신들에게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장태산이 모녀를 보며 저주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끄응…….”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한선옥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자신이 감당할 수준의 인물이 아니라는 걸 이름을 듣고서야 알았다.
하지만 이미 쏟아진 물, 주워 담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라도 물러서야 할 때.
“가……자.”
임서라의 부축을 받으며 한선옥은 지옥문을 열 듯 백화점 VIP 룸에서 빠져 나갔다.
***
“오빠! 저 사람들 저렇게 보내도 돼?”
주희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눈빛으로 모녀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경호원들과 함께 뒤를 돌아보며 힐끔 노려보던 엄철동 일행도 모두 사라졌다.
“부귀이노췌(富貴而勞悴) 불약안한지빈천(不若安閒之貧賤)이라.”
문득 떠오른 장조의 유몽영(幽夢影) 중의 한 문장을 읊조렸다.
여러 신선들의 잡다한 선지식은 나를 순간순간 현자로 만들었다.
“오빠!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주아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부귀하면서 애를 쓰며 초췌한 것은, 편안하고 한가하면서 가난하고 천한 것만도 못하다는 뜻이야.”
“…….”
여러 생각이 교차하게 하는 심오한 문장이 주아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쌍둥이 너희들은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소리야.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 하늘이 보기에 모든 사람은 다 똑같아. 나 잘 먹고 너도 잘 먹고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꿈꿔야 해. 배곯지 않고 마음 편하면……. 그게 행복인 거다.”
멀어져간 모녀는 죽어도 깨닫기 힘들 것이다.
전생의 두터운 업과 이생에 쌓은 악업이 일말의 깨달음마저 방해할 것이다.
순탄치 않은 삶을 마주하면 누군가는 자신을 뒤돌아보고 재점검하고 심기일전 다시 일어선다.
하지만 또 저 모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그러기보다 무조건 남을 원망하기 바쁠 터.
개과천선의 기회마저 얻지 못할 그들을 위해 뜨거운 복수를 다짐했다.
잠시 후부터 직면하게 될 화근.
입가에 절로 웃음이 번졌다.
“장 변. 나 왜 불렀어?”
구서현 검사가 평소 말투로 돌아왔다.
“부지점장님, 백화점 내 맛집 한 곳 예약 부탁드립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눈치 빠른 부지점장이 밖으로 나갔다.
룸에는 나와 관련된 사람들만 남게 됐다.
“선배님이 먼저 절 찾으셨습니다.”
“그랬나?”
“발령 받으셨습니까?”
“……고마워. 이 은혜 잊지 않을게.”
“공짜 아닙니다.”
“알고 있어. 법적 테두리 안에서 지원 확실히 해줄게.”
중앙지검에 나의 사람들을 능력껏 꽂았다.
지리산 팔미호를 비롯해 점점 세력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직은 말단 검사에 부부장 검사가 다였지만 큰 사건이 터지면 충분히 변수가 될 것이다.
“그럼 오늘 밥부터 사시죠.”
“내가?”
“네.”
“나 수당 빼고 기본 봉급이 450이야. 사대보험 제하고 나면 겨우 400인데…… 그걸 빼먹겠다고?”
황당한 표정을 짓는 구서현 검사.
“공무원에게 밥 한 번 얻어먹는 게 소원입니다.”
“통영에서 구내식당 식권 쐈잖아!”
“그건 통영이고 여기는 강남 아닙니까. 신고식 해야죠.”
“……있는 사람들이 더한다더니. 진짜네. 방금 전에 없는 사람들 무시하면 천벌 받는다며 그건 안 두려워?”
“부부장 검사님이 왜 그러십니까. 동생들 앞에서 오빠 체면 좀 살려주십시오. 쌍둥이들 인사드려. 내가 통영에서 근무할 때 여러모로 도움을 주셨던 미모의 여검사님이다.”
“안녕하세요. 태산이 오빠 여동생 장주아라고 합니다.”
“전 막내 장주희입니다. 언니 잘 부탁드립니다~.”
쌍둥이들이 싹싹하게 인사했다.
“하아.”
한숨을 푹 쉬는 구서현 검사님.
여러모로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래. 만나서 반가워. 보아하니 오빠 성격 안 닮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늘 그랬던 것처럼 구서현 검사도 금세 씩씩함을 찾았다.
“네!!!”
쌍둥이들은 내심 능력 있는 예쁜 검사 언니를 환영했다.
“그리고 이쪽은 한국대 로스쿨에 재학 중인 허보영 씨. 나이는 저와 동갑입니다.”
허보영을 소개했다.
“장 변~ 애인?”
자신보다 어리다는 말에 구서현 검사는 사전 탐색에 들어갔다.
“그러고 싶지만…… 주변에 경쟁자들이 너무 많아서요.”
허보영이 대답을 하며 나를 돌아봤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외면했다.
“알고 있었어?”
“네.”
“포기는 하지 마. 안 되면 찍어서 넘어뜨려.”
“…….”
누가 형사부 검사 아니랄까 봐 말투가 참 살벌하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감찰국장 출신이라면…… 인맥이 장난 아닐 텐데요.”
“괜찮아.”
“정말요?”
“내 뒤에 너 있잖아.”
뭔가를 알았다는 듯 씨익 웃는 구서현 검사.
통영에서 죽다 살아나더니 세상사는 법을 제법 깨우친 것 같다.
“그럼요. 저만 믿으십시오. 화려한 불꽃 길을 걷게 해 드리겠습니다.”
검사에게 꽃길은 가당치 않았다.
세상을 위해 활활 정의를 불태워야 그게 진짜 검사다.
“넌 괜찮아? KI그룹이라면……. 역시 만만치 않을 텐데.”
구서현 검사가 걱정하듯 나를 봤다.
“저한테 신경 쓸 정신 같은 거 없을 겁니다.”
“왜?”
“아마 지금쯤이면…….”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