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4장. 무조건.
‘힘?’
부지점장 안태정은 예사롭지 않은 말을 내뱉은 남자를 다시 쳐다봤다.
사실 변호사라하기에는 너무 젊어 보였다.
외모는 눈에 띌 정도의 연예인급.
가볍게 걸친 듯한 모직 롱 코트 차림은 얼핏 봐도 탄성이 나올 만큼 잘 어울렸다.
‘JS로펌은 신생 같은데…… KI그룹과 상대가 돼?’
CCTV에 증거 자료가 남아 있지만 삭제가 필요할 수도 있다. VIP 개인 간 분쟁으로 갈 경우 골치 아파진다.
이럴 때를 대비해 비상 매뉴얼에 ‘삭제’가 있었다.
백화점이 양측에 발을 넣었다가는 자칫 곤란해질 수 있었다.
날이 갈수록 가진 자들의 횡포가 도를 넘었다.
VIP는 VVIP를 원했고 VVIP는 VVVIP로 대접받기를 청했다.
감정 노동의 수위가 갈수록 장난 아니었다.
부지점장인 자신을 불러 놓고 버젓이 다시 지점장이나 대표를 찾는 고객들.
강남 명품 백화점인 이곳에서는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진짜 알짜배기 상류층들은 차라리 겸손했다.
백화점에서도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필요한 쇼핑만 하고 사라졌다.
최상위 그룹 고객은 따로 담당 VIP 전담직원이 팸플릿을 들고 집으로 가 결제를 받았다.
그러나 졸부나 가풍이 개차반인 부자들은 백화점에 방문해서도 대놓고 갑질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KI그룹도 그중의 일부.
오정과 한 핏줄인 것은 분명한데 이상하게 행동은 쌩 양아치 수준이었다.
아직 살아 있는 명예 회장부터 시작해 그 집안사람들의 갑질 일상은 강남에서 유명했다.
암암리에 오정의 진정한 핏줄이라 우기며 같은 대우를 받기 원했다.
돈은 물처럼 써줘 고마웠지만 인격 때문에 다들 뒤에서는 손가락질을 퍼부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그들의 갑질.
타인을 고개 숙이게 만들고 짓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이었다.
오늘 그 타깃에 새로운 먹잇감이 포착된 것뿐이었다.
KI그룹의 열성 유전자를 한꺼번에 물려받은 임서라.
자신도 구하지 못한 명품 신상 가방에 심사가 뒤틀리고 말았다.
‘근본도 없는 게 어디서 명품을! 재수 없게!’
임서라는 진짜 화가 났다.
돈 주고도 구할 수 없었던 딱 100개 한정 명품 백이었다.
그것도 부와 명예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들만 획득할 수 있는 레티아노 헌정용 한정판.
대한민국에서는 아무도 얻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그렇게 귀한 백을 아무렇지 않은 듯 들고 다니는 장주아를 보고 임서라는 눈이 돌아갔다.
앞뒤를 재지 않았다.
지금껏 상류 모임에서 임서라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녀였다.
익히 얼굴을 알고 있는 대한민국 상류층 자제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기껏 변호사 패밀리.
물론 장태산이라는 변호사가 호감형임은 인정했다.
그래서 더 기분 나빴다.
자신도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만나본 스타일의 남자다.
임서라는 본인의 신분으로 그들을 확 누르고 싶었다.
확 피어오르는 우월의식.
“그래. 힘으로 해봐. 얼마나 잘나가는지 똑똑히 봐줄게.”
임서라는 두려울 게 없었다.
당돌한 태도로 입가에 비웃음이 베어 물었다.
KI그룹은 중견 그룹에서 어느새 대한민국 재계순위 10위 근처까지 치고 올랐다.
계열사 60개에 자산총액 20조가 넘었다.
누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수준의 그룹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금융 범죄 혐의로 교도소에 있긴 하지만 그룹은 문제없이 돌아갔다.
내수 기반이 그만큼 탄탄했다.
소유한 계열사 재무 상태도 무척 양호했다.
“최 비서. 연락했어?”
“지금 연락 중입니다.”
“우리 그룹 담당이 리앤장이지?”
“넵!”
“실력 있는 변호사 보내달라고 그래.”
“알겠습니다.”
리앤장을 언급하며 거들먹거리는 임서라.
“풋.”
리앤장이라는 말에 변호사 장태산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식 뭐야? 리앤장이 뭐 하는 데인 줄은 알고 그러는 거야?’
대한민국 법조계 서열 1위인 리앤장.
아무것도 모르는 듯 눈앞의 남자, 장태산이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 모습에 임서라는 더 기분이 나빠졌다.
“태산아.”
그때 웅성거리는 사람들 옆에서 한 여자가 나타났다.
목까지 감싼 아이보리색 원피스에 타바코 색상의 캐시미어 롱 코트 차림이다.
‘얘는 또 뭐야?’
임서라는 막 나타난 여자를 경계의 시선으로 유심히 살폈다.
그녀가 입고 착용한 것들 모두 임서라도 쉽게 구할 수 없었던 명품들이었다.
딱 봐도 얼굴 역시 자연산 미인.
“보영 언니!”
장주아가 아는 체를 했다.
“무슨 일 있어?”
로스쿨 3년 차인 허보영은 오랜만에 시간을 냈다.
친구들과 잡은 쇼핑 약속 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한 허보영.
이것저것 아이 쇼핑 중에 장태산과 여동생을 발견했다.
학교에서 안면을 텄던 장주아와 말을 나눴다.
‘얘가 주희겠지.’
부드러운 인상의 미대생 장주아와 분위기가 사뭇 다른 쌍둥이 여동생.
잔뜩 화가 난 상태에서 한 여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랜만.”
장태산도 아는 체를 했다.
“살아 있었던 거야?”
“바빴어.”
“그랬겠지. 아빠가 청하는데도 얼굴 한 번 안 보여주고.”
“다음 주 중에 찾아가려고 했다.”
“그 거짓말 정말이야?”
장태산이 바쁘다는 건 허보영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따로 장태산에 대한 여러 소식을 매일 수집했다.
학교도 휴학하고 사업에 매진 중이었던 장태산.
미국과 인도를 비롯해 해외 출장이 무척 잦았다.
“누님과 가야금 한 번 맞춰봐야지.”
“그래 자주 좀 찾아와.”
허보영은 장태산과의 짧은 대화마저 즐거웠다.
뜻밖의 수확.
그런데 분위기는 영 아니었다.
팔짱을 낀 채로 쌍심지를 켠 낯선 여인이 장태산과 두 여동생을 번갈아 노려봤다.
‘겁도 없네. 미친 거야?’
허보영도 익히 알고 있는 장태산의 막강한 힘.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인 오정도 한 수 물리고 대하는 사람이었다.
“누구야?”
허보영이 장주아에게 살짝 물었다.
“나? KI그룹 임서라.”
임서라가 허보영의 말에 냉큼 대답했다.
“KI?”
허보영은 KI그룹을 떠올렸다.
몇 년 전 대규모 M&A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찾아왔던 KI그룹 회장.
아버지 앞에서 무척 공손했던 회장과 관련이 있는 여성 같았다.
“태산아~ 무슨 일이야?”
“제 언니 팔을 핸드백으로 가격하고 뻔뻔하게도 사과와 심심한 위로를 우리에게 요구하네요.”
장주희가 나섰다.
“사과와 위로?”
어이가 없어 허보영이 임서라를 쳐다봤다.
“미친 거 아냐?”
무심결에 툭 튀어나온 한마디.
“뭐, 뭐라고? 미쳐? 이것들이 단체로 돌았나! 야! 너 뭐야!!!”
“나. 허보영.”
“허보영? 그게 뭐?”
“너 임주혁 회장님 딸이지?”
허보영이 차분하게 임서라에게 물었다.
“……우리 아빠를 알아?”
“겁도 없네. 너 지금 누구한테 까불고 있는 줄이나 알아?”
“…….”
허보영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도 당차게 나오자 임서라는 순간 움찔했다.
“쯧.”
급기야 허보영이 혀를 찼다.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눈치를 보고 있던 부지점장 안태정이 허보영을 향해 고개를 팍 숙였다.
백화점의 진정한 VVIP 중 한 명인 허보영.
대한민국 사채 시장의 가장 큰손인 허대부의 딸.
과거부터 안태정은 이 여인에 대한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
지점장이 각별히 신경 쓰라고 귀띔해준 최상위층 고객 명단에 딱 들어 있던 고객 허보영.
“오늘…… 시끄럽네요.”
허보영이 한마디 툭 뱉었다.
“죄송합니다.”
‘명동 허대부님 딸도 알고 있다면……. 평범한 인물은 아닌 듯한데. 도대체 어느 집안 자제들이야?’
부지점장은 다시 한 번 삼남매를 살폈다.
착용한 명품들로 보아 공직자 집안은 아니었다.
리앤장을 언급했음에도 콧방귀를 끼던 장태산 변호사.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부지점장님…… 지정장님 전화입니다.”
비서가 조심스럽게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난처한 듯 부지점장이 스마트폰을 들고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점장님.”
- 무슨 일이야?
“KI그룹 회장 따님 임서라 양과 다른 고객과의 사이에 일이 좀 발생했습니다.”
- 또? 상대방도 VIP라며?
지점장은 임서라라는 이름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정확한 신분은 아직 파악을 못 했습니다. 다만…….”
- 다만 뭐?
과거부터 선후배 사이로 허물없이 지냈던 지점장의 편한 물음.
“상대 고객들이 명동 허대부 따님과도 알고 있는 분들입니다.”
- 허대부님 따님과?
화들짝 놀라는 지점장.
“그리고 피해자 쪽 남자분이 변호사입니다.”
- 어디 로펌이야?
“JS……로펌이라고 했습니다.”
- JS로펌이라……. 이름은?
“장태산이라고.”
- 뭐라고? 장태산! 지금 장태산이라고 했어?
전화기 너머에서 고함을 치다시피 다시 묻는 지점장.
“아, 아시는 분입니까?”
안태정은 지점장의 놀란 목소리에 더 당황했다.
평소에 선비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감정 변화가 심하지 않은 지점장.
장태산이라는 이름에 다소 과하게 반응했다.
- 지금 가고 있으니까. 최대한, 아니 무조건 편의를 봐드려! 그쪽에서 요구하는 일은…… 모든 걸 회장님 명령과 동일하게 취급해!
지점장은 다급한 목소리로 예상치 못한 지시를 내렸다.
“네? 회, 회장님요?”
- 부지점장! 공부 좀 해. TS그룹 회장님을 지금 자리에 꽂은 분이 바로 그 장태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젊은 분이야. 투자 회사 대표란 말이야!!
“!!!”
지점장의 말에 부지점장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지점장급이 아닌 이상 고위 정보를 알 수 없는 그룹 내부 사정.
스마트폰을 든 채 안태정은 장태산을 돌아봤다.
아직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장태산.
꿀꺽.
안태정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KI그룹이 문제가 아니었다.
재계 순위 10위권 그룹도 날려버린 엄청난 투자자.
멍청하게 시비를 털고 있는 KI그룹의 딸 임서라가 오늘따라 불쌍하게 보였다.
- 내 말 알아들었지. 그분 지시에는 무조건이야! 무조건!
***
“죄송합니다! 대표님!!!”
통화를 마치고 난 뒤 다시 돌아온 부지점장의 허리가 90도로 꺾였다.
이제야 내 정체를 파악한 듯했다.
“부지점장!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아니나 다를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싸가지의 눈이 돌아갔다.
일반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대접을 받아왔을 싸가지도 그만한 눈치는 있었다.
“철모르는 언니. 보면 몰라?”
허보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조우한 허보영.
그녀의 정체만으로도 KI는 위태로울 수 있었다.
깨끗하게 손 씻었다지만 허대부의 영향력은 아직 그 위세가 대단했다.
마음먹고 그룹 하나 작업하려 들면 KI도 위험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허대부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지금도 KI에 대한 작업은 진행 중이었다.
임성철 회장님에게 약속했다.
썩은 이를 확실히 뽑아주겠다고.
로버트 라이언을 통해 KI그룹 주식을 야금야금 매입하는 중이다.
회장의 교도소 행으로 주가가 바닥을 기고 있었다.
다른 작업도 병행 중이다.
며칠 이내로 KI그룹 이미지를 크게 훼손할 큰 사건이 인터넷 중심으로 터질 것이다.
폭락하는 주식에 공매도를 던지면 난리가 날 터.
그렇게 때를 기다리는 사이 싸가지 집안의 싸가지 딸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됐다.
하늘이 확인 차 보낸 선물 같다.
오염된 피는 쉽게 깨끗해 질 수가 없는 법.
가문이 망해 자손들이 다시 흙바닥부터 시작해야 조상의 업이 그나마 정화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무거운 업 을 해소하는 데 동참할 생각이다.
“보안팀에 CCTV 자료가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바로 제출하겠습니다.”
부지점장은 확실하게 노선을 잡았다.
“부탁합니다. 고의로 상대를 타격한 행위는 폭행죄입니다. 그리고 사과 대신 뻔뻔하게 발뺌을 하고 도리어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으니……. 심심한 위로와 배상도 같이 이루어져야죠.”
CCTV라는 말에 안색이 변한 싸가지녀.
아주 바보는 아닌 모양이다.
띠리리리리리.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딱 이 순간에 필요한 인물의 이름이 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장태산입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