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9장. 뒤통수와 뒤통수.(2)
“베커 공작이란 자와 붙어먹은 제국 황녀와의 결혼이라고? 하아아……. 미치겠네.”
파라라라랏.
겨울바람이 쉼 없이 불어오는 벌판 한가운데 세워진 거대한 막사.
천막 입구가 활짝 열려있음에도 안쪽 공기는 훈훈했다.
병사들은 모닥불에 의지해 몸을 녹이고 있는 상황.
반면 기온 조절 마법이 가동되고 있는 큰 막사 내부는 따스한 봄날 같았다.
막사 안쪽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는 이십대 초반의 금발 청년.
잔뜩 인상을 쓰며 화를 냈다.
“세자 전하. 깊게 생각할 것 없사옵니다. 결혼은 명목일 뿐입니다.”
왕세자 테이란을 지지하는 요른 후작이 웃는 얼굴로 그를 달랬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더러운 계집과 결혼이라니요.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왕세자도 왕실 마탑주에게는 예를 갖춰 경어를 사용했다.
“그럼 제가 국왕 전하께 말씀드려 다른 왕자님과 결혼을 시키는 방향으로 해볼까요?”
요른은 왕세자 테이란을 은근히 자극했다.
“끙…….”
대번에 테이란이 신음을 흘렸다.
왕세자가 분명했지만 권좌의 주인인 부왕을 거역할 정도의 힘은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과 위엄으로 왕국을 지배해 온 바이클 국왕.
그의 명령을 거스르는 순간 아무리 왕세자라 해도 극형을 피하기 어려웠다.
“황녀의…… 미모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아니지요. 얼굴에 아주 보기 흉한 흉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황녀에 대한 소문은 이미 대륙에 쫙 펴져 있었다.
“마법으로 감출 수 있는 상처입니다. 제가 충분히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테이란이 금방 흥미를 보였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왕국 사교계에 왕세자가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귀부인들과의 염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강한 자가 모든 걸 차지한다는 왕가의 규칙은 사교계에도 낱낱이 적용됐다.
상대는 다양했다.
귀족들 스스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알아서 상납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아직 왕좌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테이란은 강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호흡법으로 상급 마력 기사가 됐다.
“제가 세작들을 통해 직접 확인했습니다. 황녀는 대륙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대단한 미녀입니다.”
“흐음…….”
테이란이 갈등하며 고민에 빠졌다.
“황가의 이름만 빼앗으면 그만입니다. 그 뒤에는…… 조용히 처리하거나 비싼 값에 노예로 팔아도 될 겁니다.”
요른은 악마처럼 속삭였다.
‘제국의 황실 마탑주가 되겠어! 반드시!’
요른은 중소 규모의 마탑에 속한 제자였다.
그러다 보니 뛰어난 실력에도 제대로 되 지원을 받지 못했다.
4서클에 도달했을 때 들뜬 마음으로 황실 마탑에 지원했다.
그러나 그때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받았다.
확인도 하지 않고 실력도 안 되는 중소 마탑 출신이라고 대놓고 무시를 했다.
요른은 마족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그 순간의 수모를 갚겠다고 마나에 맹세했다.
팰트론 왕국에 투신하며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오늘의 자리에 올랐다.
마법 공식 하나를 위해 동료를 바보로 만들고 전장에서 경쟁자를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다.
그렇게 차지한 왕국 마탑주의 자리.
다음 목표는 명실상부한 황실 마탑주다.
‘황녀는 분명 황실 마탑주 사그논이 빼돌렸을 것이다. 황녀를 통해 사그논의 비밀 연구실을 손에 넣어야 돼!’
요른의 또 다른 목표.
이동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는 7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되면 비밀 연구실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그곳에 자신만의 마법 핵심과 각종 귀한 보물들을 보관한다.
오로지 마법사 자신만이 아는 공간.
요른은 사그논의 비밀 연구실을 노렸다.
8서클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 공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도 아린 황녀와 왕세자는 결혼을 해야만 했다.
왕에게 전쟁을 적극 독려한 이유도 거기 있었다.
‘다른 마탑들도 움직이겠지만……. 너희들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할 것이다. 흐흐흐.’
비밀리에 후작성에 침투시켜 놓은 팰트론 왕국의 정예 기사들과 마법사.
밤이 깊어지면 포획 작전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저자들 미친 게 아닐까요? 아바마마를 상대로 전면전이라니……. 쯧.”
분지 구릉 위에 설치된 막사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의아함을 드러내는 왕세자.
거대한 분지 한가운데서 양쪽 대군이 마주했다.
영지 깊숙이 왕국군을 끌어들인 황녀의 군대.
양쪽으로 커다란 산맥이 전쟁에 돌입하는 군대를 호위하듯 서 있다.
분지가 얼마나 넓은지 수십만 대군이 양쪽에 진을 쳐도 충분한 공간이 확보됐다.
이곳만 뚫으면 바로 그 뒤가 후작성이었다.
최후의 배수진.
농성전이 아닌 전면전을 선택한 황녀의 군대가 미련하다고 생각한 왕세자는 혀를 찼다.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봤자 변하는 건 없을 겁니다. 월등히 강한 무력은 그야말로 변수를 무력화하는 데 최상의 방법입니다.”
왕세자처럼 밖을 바라보던 요른이 대치중인 적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 밤이 다 지나기도 전에 적들은 모조리 무력화될 것이다.
야간 전투가 준비 중이다.
병사들에게 잠깐 동안의 휴식을 허락한 바이클 국왕.
무리 없이 내일 후작성에 입성하기를 그는 원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다.
뿌우우우우우웅! 뿌우우우우우우웅!
긴 고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대 정렬!!!”
처저적.
따뜻한 음식으로 식사를 마친 병사들이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전하, 가시지요.”
“그래야지요. 갑자기 황녀의 얼굴이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흐흐흐.”
고개를 든 욕망에 두 눈이 번들거리는 왕세자 테이란.
그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탐내기 시작한 황녀를 보호하는 한 남자의 정체를.
***
처벅처벅.
백작 자라스가 로브로 얼굴을 가린 세 명의 마법사들과 황녀의 집무실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딱! 딱! 딱!
뒤를 따르는 마법사들은 큼지막한 마력석이 박혀 있는 마나 스태프를 지팡이 삼아 바닥을 찍었다.
고위 귀족들인 그들을 경비병들이 무사통과 시켰다.
황실수호공작과 카이루 후작은 전장으로 떠났다.
현재 자라스는 남아 있는 귀족들 중에 서열이 가장 높았다.
그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자신의 성이라도 되는 양 황녀의 집무실로 향했다.
내성은 소란스러웠다.
전선에서 급박한 연락이 수시로 들어왔다.
예정됐던 분지에서 마주친 팰트론 왕국군.
오늘 밤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황녀는 잠깐의 휴식도 취하지 못했다.
후작성에 거주하고 있는 백성들도 숨을 죽이며 밖의 소식을 기다렸다.
가혹하게도 팰트론 왕국의 폭정은 아주 유명했다.
한 마음으로 황녀의 군대가 승리하기를 신께 기도했다.
“멈추십시오.”
처음으로 자라스 백작을 막아서는 기사들.
집무실 문 양쪽에서 네 명의 기사들이 은빛 갑옷에 붉은 망토를 걸치고 기립해 있었다.
말이 필요 없는 위엄이 넘쳤다.
베커 공작과 함께 나타났던 근위기사들이었다.
“경들은 내가 누군지 모르나?”
자라스가 싸늘한 시선으로 기사를 추궁했다.
과거 제국 시절이었다면 백작 따위가 황녀 집무실에 쉽게 걸음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근위기사들을 상대로 무례하게 말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대귀족이라 해도 황실에서 이 같은 불경한 죄를 지으면 참살을 면할 수 없었다.
“백작 각하. 이 밤에 어인 일이십니까?”
기사는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감정에 휩싸이지 않는 목소리로 야심한 시각의 방문 목적을 물었다.
‘건방진 놈들!’
근위기사들이라 해도 신분은 준남작 급에 지나지 않았다.
신분이 낮은 근위기사의 무표정한 모습에 자라스는 짜증이 났다.
‘흐흐. 기다려라. 이 밤이 가기 전에 네놈들의 가죽을 벗기리라!’
이들 모두가 아무리 상급 마력 기사들이라 해도 황녀를 인질로 잡으면 그만.
“폐하게 전하라. 황실을 돕기 위해 갈기오 마탑에서 장로 분들이 오셨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큰 소리로 외치는 자라스 백작.
별 볼일 없는 황녀가 감히 거절하지 못할 대륙 삼대 마탑의 이름이었다.
그것도 일반 마법사가 아닌 장로들이다.
지금 상황이라면 맨발로 쫓아 나와 맞이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근위기사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당당했다.
그 순간.
“안으로 모시세요.”
집무실 안쪽에서 들려오는 황녀의 고운 음성.
고위 마법사인 아린도 자라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를 들었다.
“들어가십시오.”
스르르르릇.
두툼한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오는 장면.
회의장을 겸한 대형 집무실에서 황녀 아린이 고풍스런 탁자 위에 놓인 여러 서류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 아린 황녀 주변으로 또 포진해 있는 10여 명의 근위기사들.
들어서는 자라스 백작과 마법사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허튼짓이라도 하며 당장 검을 뽑아 달려들 것 같은 분위기.
‘재수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자라스는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여 확 짜증이 일어났다.
“황녀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그럼에도 자라스는 예의를 갖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어서 오세요. 자라스 경.”
평소와 달리 잔뜩 경직되어 있는 아린 황녀.
근심 가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폐하. 귀한 손님들이 찾아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 갈기오 마탑의 장로님들이라고 했나요?”
“맞습니다. 갈기오 마탑에서 장로님들이 제국과 황실, 황녀님을 돕기 위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자라스의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7서클 마법사들로 구성된 마탑의 마법사들.
평민은 평생 한 번 보기도 어려울 만큼 대면하기 힘든 존재들이었다.
“그렇군요.”
아린은 아직도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장로들을 바라봤다.
“황녀 폐하를 뵙습니다.”
장로들이 로브 모자를 뒤로 벗어 넘기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그중에서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반백의 마법사가 반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갈기온 마탑의 수석 장로 듀보스라고 하옵니다.”
“귀 마탑의 방문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아린도 정중하게 마법사들을 상대했다.
“황공하옵니다.”
“전장 상황이 급박합니다. 지금 바로 도움을 주실 수 있는지요?”
과거 제국 황실이 온전할 당시라면 7서클 마탑 장로들이라고 해도 이렇게 정면에서 황족을 대면하지는 못했다.
“도움을 드리겠지만…… 전장은 아닙니다.”
“네?”
수석 장로 듀보스의 음흉한 미소가 스치듯 피어났다.
수상함을 감지한 아린.
퍼어엉! 퍼버버벙!
“저, 적이다!”
“폐하를 보호하라!!!”
그때 갑자기 내성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폭음과 경비병들의 아우성.
“이런! 다른 손님들이 찾아왔군요.”
듀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이게 무슨…….”
당황한 아린.
마법사들의 방문과 동시에 내성에 소란이 일어났다.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아린은 직감했다.
불순한 목적의 방문자들.
“폐하. 위기 상황인 것 같습니다. 마법사님들과 함께 갈기온 마탑으로 이동하시어 옥체를 보전하시옵소서.”
급박한 순간에도 자라스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수상한 행동.
“자라스 백작. 그게 무슨 말인가요? 성을 버리라는 말인가요?”
“흐흐. 그렇게 아둔해서야 어찌 제국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자라스 경!”
자라스의 거침없는 모욕적인 발언에 아린이 화들짝 놀랐다.
“저희 마탑은 황녀 폐하만을 보호할 생각입니다.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듀보스가 아린을 바라보며 본심을 드러냈다.
“무엄하다!!!”
차자자장.
근위기사들이 검을 뽑아들었다.
내성에 적이 침입했다는 소란에도 꿈쩍하지 않던 근위기사들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파아아아앗.
그 순간 마법사들의 마나 스태프에서 강렬한 마나의 빛이 터졌다.
동시에 묵직한 마나가 공간을 지배했다.
“경거망동 삼가고 움직이지 말라! 내 말을 거역하면…… 황녀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듀보스가 마나 스태프 끝으로 황녀를 가리키며 협박했다.
“…….”
근위기사들이 움직이려다 그대로 멈췄다.
7서클 마법사가 하나도 아니고 셋이다.
아무리 근접전에 뛰어난 근위기사들이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는 제압이 불가능했다.
파바밧.
팽팽한 긴장감이 집무실에 휘몰아쳤다.
“크아아아악!”
“막아라!!!”
그 와중에도 내성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들.
적의 습격은 한두 곳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아아…….”
한숨을 길게 내뱉는 아린 황녀.
“가시지요.”
듀보스가 황녀 가까이 다가갔다.
“무엄하다는 내 말이 우습게 들리나?”
황녀 뒤편에 서 있던 큰 키의 근위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파아아아아앗.
근위기사의 몸에서 한 번도 본적 없는 강한 빛이 터졌다.
동시에.
“허어억! 다, 당신은!”
갈기오 마탑의 7서클 마법사 듀보스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심정으로 서서히 모습이 변하는 근위기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