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6장. 첫눈 그리고.
“미, 미친놈!”
임주황의 입에서 욕이 터졌다.
오정도 함부로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몸집이 커진 KI그룹.
오정의 규모만큼은 아니어도 KI그룹도 그동안 정치 장학생들을 많이 키워왔다.
그만큼 탄탄한 KI그룹을 향해 무서운 줄 모르고 선전포고를 던지는 장태산.
“!!!”
지켜보던 모두가 경악에 빠진 채 놀라고 말았다.
‘저런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황라현은 장태산의 입에서 나온 6개월이라는 말에 내심 놀라며 당황했다.
일반 개인 사업체도 최종 부도가 나는 데까지 몇 개월은 걸렸다.
그런데 영업이익이 짱짱한 그룹을 상대로 6개월 만에 박살내겠다고 했다.
‘6개월이라…….’
임준형은 장태산의 말을 몇 번이고 음미했다.
생각할수록 은근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단언하듯 뱉어낸 6개월이라는 저 기간이 오정을 향할 수도 있었다.
대주주 로버트 라이언이 장태산의 절친한 친구다.
‘장태산…… 당신 뭐야?’
임아진은 팔뚝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언제 어디서나 불물 가리지 않고 큰소리를 치던 임동철도 두 눈을 부릅뜨고 벌벌 떨었다.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기선을 제압한 장태산 만이 홀로 여유가 넘쳤다.
강자만이 부릴 수 있는 여유.
임아진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장태산을 살폈다.
‘태산 씨…….’
겪으면 겪을수록 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장태산이었다.
그를 향한 임윤아의 심장은 벅차게 뛰었다.
오정그룹 입사도 장태산을 믿고 결심한 일이다.
그가 뒤에 있어준다면 경영뿐만 아니라 경력이 탄탄하게 쌓인 형제들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도 집안에서 까다롭기 그지없는 큰아버지를 몇 마디 말로 제압했다.
아버지가 병환 중에 있긴 하지만 오정에는 희망찬 서광이 비췄다.
“임동철 회장님. 떠나기 전에…… 참회하고 새로운 삶을 사십시오. 어차피 지옥에 가시겠지만…… 감형은 받아야지 않겠습니까?”
듣기 거북한 죽음과 지옥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뱉는 장태산.
그 말을 들은 임동철 회장의 얼굴은 흑색으로 변했다.
전혀 농담이 아닌 것처럼 느꼈다.
“못 느끼십니까? 바로 뒤에…… 저승사자가 명부를 들고 대기 중인데…….”
임동철의 뒤쪽 허공을 응시하며 그를 협박하는(?) 장태산.
“이…… 이이…….”
거짓말처럼 등 뒤에서 감지되는 서늘함에 이를 악물고 공포를 억누르는 임동철.
요즘 들어 계속 몸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한동안 모진 굴곡이 있긴 했지만 지금까지 원하는 욕망을 채우며 무난하게 살아온 그에게 죽음은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나이가 들어 얼굴에 검버섯이 펴고 기력도 많이 쇠했다.
예전 같지 않게, 백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낸 산삼을 먹어도 효과는 잠시뿐.
점차 죽음이 다가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잠이 들 때마다 이대로 내일 아침 눈을 못 뜨고 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에 날을 새기도 했다.
안면이 있던 재계 거물들도 하나 둘 떠났다.
속에 숨겨놓은 임동철의 가장 아픈 구석을 콕콕 찍는 장태산.
여유를 잔뜩 부리고 있는 그를 당장 때려죽이고 싶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조화는 큰 놈으로 보내겠습니다.”
실실 비웃음 섞인 웃음을 지으며 장례식장에 꽃까지 보내겠다고 했다.
“네, 네…… 이노오오오옴!”
거의 발작하듯 소리를 지른 임동철.
“멀리 배웅하지 않겠습니다.”
사람을 가지고 장난하듯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장태산.
그리고 임동철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회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본인이 모시는 사람도 아닌데 임성철 회장 가족들을 향해 당부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이상하게 장태산의 그 당부의 말이 어색하지 않았다.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또 황라현을 돌아보며 고개를 숙이는 장태산.
“어? 그래요…….”
“윤아 씨는 연락하세요.”
장태산은 임윤아를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인사를 했다.
“네.”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임윤아.
“그럼.”
임준형과 임아진에게도 인사를 빠뜨리지 않은 장태산이 밖으로 나갔다.
뚜벅뚜벅.
난장 같았던 분위기를 일시에 잠재우고 인사를 남긴 채 걸음을 옮기는 장태산.
사라지는 그를 보고 누구 하나 다른 말을 건네지 못했다.
스스슥.
오정그룹 소속 경호원들도 그의 앞을 비켜줬다.
처음 병원을 찾아왔을 때와 달리 돌아가는 그의 신분이 아주 달라졌다.
‘젠장…….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판이야!’
임준형 오른팔 오광연 비서는 누구보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 짧은 사이 임준형과의 사이에 모종의 딜이 있었음이 확실했다.
처음 대면했을 때 너무 강하게 나갔다.
돌아가는 정황을 미루어 보아 임윤아가 회사 일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게 된 이상 라인을 재점검해야 할지도 몰랐다.
회장 패밀리의 눈 밖에 나서 성공한 케이스는 거의 전무했다.
그러나 이미 단단히 찍혀버린 오광연.
멀어져 가는 장태산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리고 확신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여기 자리한 사람들 중에서 장태산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는 것을.
***
“식품그룹요?”
도도희가 빨간 안경을 매만지며 물었다.
“네.”
“왜요?”
“맛있는 두부가 먹고 싶어서요. 콩나물도 좋아합니다.”
“……회장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두부와 콩나물이 먹고 싶어서…… 그룹을 인수하겠다니…….”
도도희가 어이가 없는 듯 물었다.
하지만 내가 마음먹었으니 말 된다.
“진짜 고추장 맛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 할머니가 시골에서 담가놓은 재래식 고추장을 이제 전 국민이 맛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달달하면서도 맵고 칼칼한 순창 고추장이면 금상첨화겠죠.”
말하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쫙쫙 돌았다.
현대식 공장에서 못 만들 게 없었다.
과학이 접목된 기계설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발전했다.
대기업 이윤을 빼고도 수지타산이 남았다.
박리다매의 마술은 기업 영역에서는 요술봉과 같다.
“핵가족을 넘어 1인 가족 시대입니다. 식품 기업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불어야 합니다. 일에 지치고 또 갑자기 몸살이 오거나 했을 때 뜨끈하고 간편한 1인용 육개장 같은 국물을 먹을 수 있다면 몸도 마음도 개운해지지 않을까요?”
아직 크게 성장하지 않은 1인용 국, 탕 등의 식료품.
혼자 몸 건사하기도 벅찬 청춘들에게 건강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이익이 적게 남더라도 건강한 먹거리를 책임지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야 할 이유였다.
미래가 불안한 청춘들에게 줄 수 있는 나의 건강 프로젝트.
“솔직히 말하세요. 어떤 기업이에요?”
“뭐가 말입니까?”
시치미를 뗐다.
“회장님에게 찍힌 기업 말이에요.”
도도희, 원래 눈치도 빠른데다 또 많이 컸다.
몇 마디 던지지 않았는데 바로 알아챘다.
“제가 기업 깡팹니까. 거슬린다고 기업들 여기저기 인수하게…….”
“어머 그럼 아니에요? 대한민국 재계에는 소문 쫙 났어요. 장태산 회장에게 찍하면 국물도 없다고 말이에요.”
도도희가 다 알면서 뭘 그러느냐고 웃는다.
똑똑한 여우는 눈치도 기가 막히게 빠르다.
“그게 아니라…… 다 대한민국 국민들 건강과 미래 복지를 위해…….”
“KI그룹이네요. 맞죠?”
“!!!”
단박에 찍어내는 도도희.
손에 들린 커피잔이 잠깐 흔들렸다.
“맞네. KI.”
“그런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흔들리는 회장님 눈빛? 그리고 조금 전 오정 회장님 면회를 다녀왔다면 연관되어 있을 그룹은 딱 한 곳. 그리고 황연태 대표님에게 잠깐 들었던 소스. 모든 사항이 일치하는 그룹은 KI죠.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두부, 콩나물, 고추장 만드는 종합 식품 기업이 많지는 않죠.”
MBA 출신은 이래서 다른가보다.
흐뭇함이 가슴을 촉촉하게 적셨다.
이런 도도희는 나에게 1급 수행비서와 같다.
“우리들은행 인수 건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주제를 돌렸다.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은 은행 인수 건.
“산업은행에서 지분 전부를 예금보험공사에 넘겼습니다. 우리들은행 지분 51.08% 가운데 30%를 부분 매각하는 방안을 지난 달 공고했습니다.”
도도희의 똑 부러진 답변.
은행 인수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IMF 이후 대규모로 정리된 은행 간 인수합병으로 몇 개 대형 은행만 남았다.
그중에서 덩치가 큰 몇 개는 산업은행이나 예금보험공사 소유였다.
거기서도 몇 개 은행이 정리되고 대형 은행들 중 남은 건 우리들은행 정도.
“……국가에서 계속 관여하겠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을 거예요. 세금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고…… 은행을 쥐고 있으면 여러 정책을 펼칠 때 과감하게 딜할 수 있답니다.”
“나라도 쉽게 안 팔 겁니다.”
금산분리법으로 철저하게 은행의 기업소유를 막고 있었다.
대형 은행은 기업의 상대편 목을 벨 수 있는 흉기나 다름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민간은행을 준 국영으로 남겨놓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은행이 필요했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은행만큼 좋은 무기가 없다.
“매각 방식은 어떻게 됩니까?”
“과점주주 방식입니다.”
“과점주주라면…….”
“과점주주는 주요 주주들이 이사회를 통해 경영에 각자 참여하는 형태의 지배구조입니다. 예보 보유 지분 30%를 4에서 8%씩 쪼개 파는 게 이번 매각 안의 핵심입니다.”
“아쉽게 블록딜 방식은 아니군요.”
“외자 자본에 대한 경계가 심합니다. 하지만 장점도 존재합니다. 지분 4% 이상을 낙찰 받는 투자자에게는 사외이사 추천권이 부여돼 행장 선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예보는 보유지분 2억 만주를 희망 수량 경쟁 입찰 방식으로 매각할 방침입니다.”
보고를 하는 도도희는 차가운 금융 투자자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냈다.
공과 사를 구분해 철두철미하게 일하는 그녀는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사모펀드를 만들어야겠습니다.”
“어차피 돈 싸움입니다. 입찰 희망자는 매입을 원하는 주식 수량과 주당 가격, 매도자가 요청하는 정성평가 요소를 포함한 투자의향서를 다음 달 23일까지 제출하면 됩니다.”
“우리들 금융지에 속해있던 증권사들과 지방은행 매각은 다 끝났나요?”
“순조롭게 매각이 마무리 됐습니다.”
“그럼 우리는 최소…… 8%만 먹으면 되겠군요.”
“네? 그 정도 수준으로는…… 인수가 어렵지 않나요?”
의문을 표하는 도도희.
“도도희 대표. 우리들은행 지분은 예보만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씨익.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아!”
감탄하며 바로 알아채는 도도희.
눈동자에서 총기가 번뜩였다.
“현준규 회장에게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 지켜야죠.”
동룡을 무너트릴 때 그의 도움을 받았다.
은행장을 약속했으니 그 약속을 이행해야 했다.
“그럼…….”
확인을 바라는 도도희.
“세상이 망하지 않는 이상 꽃 피는 봄이 오면 우리들은행은 우리 소유가 될 겁니다. 그러니까 도도희 대표는 KI에 집중해 주십시오.”
“넵! 회장님 명을 확실히 접수했습니다!”
전투 의지로 활활 불타오르는 도도희의 눈빛.
기업 인수 합병만큼 투자회사에게 짜릿한 게임은 없었다.
인수한 기업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대웅증권이나 금융 파트에서 근무했던 인재들 추천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하관우와 황효관이 아닌 도도희 라인에 힘을 실어줬다.
같은 대웅맨 출신이라고 해서 한 줄에 엮을 생각 없다.
조직은 적절한 균형과 견제가 필요한 법.
자칫 중요 임원들의 변심으로 눈뜬장님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경영 파트너들의 욕심을 적절히 조절해 끌고 가는 것도 경영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명단 뽑아서 제출해 주십시오. 최근 찍은 사진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거대 공룡이 쓰러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아직도 뒤에 먹을 게 이렇게 많았다.
대웅이라는 브랜드 명이 점점 잊혀져 가는 시점에도 여전히 인재는 남아 있다.
어차피 특출한 성과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금융 쪽은 리스크 관리가 핵심이다.
그만큼 충성심이 가장 중요했다.
“어!”
그때 도도희가 갑자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입니까?”
창밖을 향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사라라락.
“첫눈이에요…….”
방금 전까지 깐깐한 사업가의 모습이었던 도도희 얼굴에 홍조가 보였다.
첫눈치고는 제법 큰 눈발이 날렸다.
감성을 소유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을 빼앗길 만한 첫눈 풍경.
“…….”
나풀나풀 내리는 첫눈에 나도 푹 빠져들었다.
그리고.
파아아앗!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