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5장. 앓던 이(4).
“!!!”
모두의 시선이 임동철의 팔을 붙잡은 손을 향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성인이 된 조카에게 손찌검이라니요.”
임윤아의 뒤에 있던 장태산이 어느 틈에 앞으로 나섰다.
“넌…… 뭐야!”
임동철은 팔목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압력에 당황했다.
싸가지 없이 말하는 조카 뺨을 후려쳐야 직성이 풀릴 판이었다.
그러나 처음 보는 불청객이 앞으로 나서며 나댔다.
“태산 씨!”
임윤아도 깜짝 놀랐다.
어차피 뺨 정도는 맞을 각오를 했다.
억눌렸던 지난 세월의 분노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폭발했다.
식구들 모두 지금까지 아버지를 봐 너무 예의를 차렸다.
탐욕에 눈멀어 부모와 형제도 집어 삼키려 들었던 살모사를 너무 인간적으로 대했다.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난 이유도 뻔했다.
쓰러진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고 결정타를 날리기 위한 방문.
알고는 그냥 참을 수 없었다.
장태산이 언젠가 충고했었다.
분출되어야 하는 정당한 분노는 참으면 참을수록 깊은 병이 된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한바탕 뱉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두려움은 없었다.
멀지 않은 시간 안에 본격적으로 그룹의 일에 뛰어들 것이다.
오늘과 비슷한 사건이 수시로 일어날 게 빤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장태산이 나설 줄은 미처 몰랐다.
처음에는 편하게 하대로 시작된 가벼운 관계였지만 지금은 분명하게 존중받아 마땅한 한 남자가 된 의미 있는 사람.
든든한 방패처럼 임윤아의 앞을 막아섰다.
“뭐야! 이 손 안 놔!!!”
임동철이 인상을 잔뜩 쓰며 손을 빼기 위해 힘을 썼다.
“연세에 비해 힘이 좋으십니다.”
장태산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손에 좀 더 압력을 가했다.
웃고 있지만 눈빛은 차디찬 파충류 같았다.
‘이 자식 뭐야?’
오늘의 KI그룹을 일궈낸 임동철은 장태산의 꼿꼿한 태도를 대하며 흠칫 놀랐다.
젊은 녀석의 기운이 만만치 않았다.
오정그룹 오너 일가 일에 뛰어들 만큼 대담했다.
젊은 녀석을 말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너 뭐야! 감히 네 까짓 게 뭔데 아버지께 위력을 가해!”
효심 지극한(?) 임주황이 나섰다.
임윤아의 행동에 당황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강한 척 말을 뱉었다.
“그럼 당신은 뭡니까?”
장태산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KI그룹의 임주황이다!”
“임주황이라면……. KI그룹의 여러 계열사 중 겨우 이름만 올리고 있는 아트 캐스트 대표를 말하는 겁니까?”
“뭐라고! 야! 너 뭐야!! 죽고 싶어!!!”
장태산의 한마디에 임주황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멋모를 때 저지른 사고로 겨우 계열사 대표를 맡고 있는 임주황이었다.
임주황의 아킬레스건을 제대로 건든 장태산.
‘이 새끼…… 죽여 버려?’
세상 그 누구도 모르게 집안에서 고용한 조폭이 몇 있었다.
아버지 때부터 뒤를 봐주기 시작하며 키워온 제법 잘나가는 조직.
연예계 사업을 하다 보면 필수적으로 그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임주황은 눈을 치뜨며 속으로 장태산을 죽여 버릴까 생각했다.
“눈빛이 안 좋네요. 혹시 뒤에서 저를 어떻게 해볼 생각이라면 집어치우세요. 특히 어설픈 조폭들을 동원하는 건 꿈도 꾸지 마십시오.”
“!!!”
‘이 새끼 뭐야! 어떻게…….’
임주황은 오늘 여러 번 놀라고 있었다.
오정그룹 사촌들의 태도를 보며 생각보다 대가 세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
거기에 여기 눈앞에 있는 놈도 보통내기가 아니다.
“조용히 뒤로 물러나십시오. 임주황 씨가 나설 자리가 아닙니다.”
“다, 닥쳐! 네가 뭔데 남의 집 일에 끼어들어!”
“조카님. 내 막내 사위에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그때 조용하게 목소리를 깔며 입을 여는 황라현.
“사, 사위요???”
임주황은 기겁했다.
작은아버지 댁의 막내 사위라니 처음 듣는 얘기였다.
“큰아버지! 오늘이 이렇게 만나는 마지막 자리가 될 것 같으니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저와 미래를 약속한 장태산 대표입니다.”
“……장태산!”
임주황은 장태산이라는 이름을 다시 한 번 되뇌었다.
그리고 잠시 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재계의 저승사자라 불리며 소리도 없이 조용히 떠오르는 투자회사의 대표 이름이다.
그가 사촌동생 임윤아의 약혼자가 돼 나타났다.
“끼어들 자격이 될 것 같은데…… 아직 부족합니까?”
덩달아 조용히 묻는 장태산.
“…….”
임주황이 입을 다물었다.
“어른도 몰라보는 놈이…… 사위? 집안 꼴 잘 돌아간다. 어디서 족보도 모르는 자를 데려와서 임씨 집안에 들여!”
임동철은 아직 앞뒤 사태를 분간하지 못했다.
명예 회장이라는 직함으로 뒷방으로 물러난 지 몇 년째.
대한민국 재계 판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아버지……. 이 자식이 안아그룹을…… 삼킨 놈입니다.”
임동철에게 다가와 속삭이듯 말하는 임주황.
“뭐야? 안아를?”
정신이 번쩍 든 임동철.
장태산을 다시 한 번 살피는 그의 시선에 경계심이 가득 담겼다.
‘제법인데?’
황라현은 장태산의 적절한 개입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막무가내로 행동해도 집안 어른이라 대하기가 어느 정도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장태산은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오정도 두려워하지 않는 장태산이 고작 KI그룹 따위에 고개를 숙일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막내딸의 앞을 가리고 폭력을 행사하려는 임동철을 막아서는 모습은 특히 듬직했다.
늙어가고 있지만 황라현도 여자였다.
여자를 보호하는 남자의 행동은 언제 봐도 멋있었다.
그것도 남편이 귀하게 여기는 막내딸을 거친 손속에서 구했다.
호감도가 팍팍 상승했다.
‘준형이와도 화해한 것 같고…….’
아들이 조금 전과 달리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시선에서 장태산에 대한 적의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둘이 가진 짧은 시간에 속을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눈 게 확실했다.
그만큼 든든한 우군이 생긴 셈이다.
그에 반해 불청객들의 안색은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안아그룹을 날려버린 장태산에 대한 소문은 아직도 재벌가에서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였다.
안아뿐만 아니라 동룡과 천일도 꿀꺽 삼킨 장태산.
뒤에 월가의 로버트 라이언이 버티고 있다는 정도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안.
아무리 현역에서 물러나 들어앉은 명예 회장이라 해도 그 큰일을 임동철이 모를 리 없다.
황라현은 가슴을 쫙 폈다.
임윤아는 무한 감동에 젖었다.
임준형의 표정은 블록버스터급 영화를 보듯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임아진은 뭔가 아쉬워하는 눈치로 한숨을 내뱉었다.
여자라면 누가 봐도 탐낼 만한 인물의 장태산.
그가 임씨 집안일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시작했다.
***
막장 드라마는 보는 것에만 만족하는 게 좋다.
하지만 그래도 기회가 되면 직접 경험해 보는 것도 그 진한 맛을 알 수 있어 나쁘지만은 않다.
대한민국 재계의 넘버 원 집안도 돈 앞에서는 여실히 자신들의 본성을 드러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임동철 회장이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날 노려봤다.
검버섯이 핀 노안에 아직도 가득 끼어 있는 저열한 욕망.
독 두꺼비가 따로 없었다.
그러니 자식들이 모두 그렇게 개판이었던 거다.
임씨 집안 가장 열성 인자들이 임동철 회장의 피를 타고 대를 이어 흘렀다.
사업수단은 집안 내력이라 타고 났을지 몰라도 사회적 기업이 되기는 글렀다.
갑질이 집안 내력이었다.
품격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 정도면 하늘도 무심치 않을 것이었다.
임동철 회장을 포함해 3대면 KI그룹은 공중분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쌓은 덕이 거의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어른이라는 핑계로 꼰대 짓을 서슴없이 벌였다.
가풍은 보나마나 개차반.
“윤아 저것이 그래서 집안 어른을 무시했구나! 건방진 놈을 믿고!”
한편으로 임동철은 기꺼이 존경할 만(?)했다.
나의 정체를 알면서도 꿋꿋하게 언성을 높였다.
“…….”
황라현 여사를 비롯해 모두가 나를 주시했다.
뭔가 특단의 조치를 기대하는 눈빛.
아무래도 집안의 큰 어른이라 나서기가 껄끄러운 듯했다.
하물며 경호원들도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임윤아에게 뺨을 맞은 임준형의 비서 오광연의 시선이 복잡했다.
담담하게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임동철을 쳐다봤다.
링에 올라갈 선수가 자연스럽게 교체됐다.
거부하지 않았다.
임성철 회장님의 긴한 부탁도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대면하게 된 ‘앓던 이’.
썩을 대로 썩어 아주 심한 악취가 났다.
“임 회장님,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존경받을 짓을 해야 대접을 받습니다. 이렇게 땡깡 놓으려고 외출하시면 안 됩니다.”
“때, 땡깡! 지금 네가 감히 나한테 땡깡이라고 했느냐!”
대번에 으르렁거리는 늙은 사냥개.
“명심보감에 나온 말이 요즘 세상에는 맞지 않는 듯합니다. ‘모름지기 아랫사람은 일의 크고 작음과 상관없이 반드시 어른께 여쭈어 보고 행하라’ 하였는데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를 어른을 점점 만나보기 어려워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
내 말에 늙은 사냥개가 눈동자를 번들거렸다.
“너…… 지금…… 나를…….”
아주 바보는 아닌지 자신을 말한 걸 알아차렸다.
“오늘 아니면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 조언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세 싸움으로 팽팽하던 분위기는 나의 개입으로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앓던 이’를 다루는 일은 쉬웠다.
지금껏 내가 만났던 상대들과 비교하면 순위에도 못 들 정도다.
“홍콩의 거부 이가성을 아십니까? 많이 벌지만 많이 베풀어 덕이 큰 분입니다. 그분께서 칠불교(七不交)를 말했습니다.”
막상 임동철 회장에게 말하는 것 같지만 임씨 집안사람들 모두에게 던지는 충고.
“첫째로 불효하는 놈과 사귀지 말라. 두 번째로 사람에게 각박하게 구는 사람과 사귀지 말라. 세 번째로 시시콜콜 따지는 사람과 사귀지 말라. 네 번째로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자와 사귀지 말라. 다섯 번째로 아부를 잘하는 사람과 사귀지 말라. 여섯 번째로 권력자 앞에 원칙 없이 구는 자와 사귀지 말라. 마지막 일곱 번째로……. 동정심 없는 자와 사귀지 말라.”
내가 들어도 담백한 목소리가 병원 통로에 울렸다.
“회장님은 칠불교 중에서 단 하나라도 해당하지 않는 게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임동철 회장.
“네…… 이노오오오옴!!!”
벼락같은 호통이 터졌다.
얼굴이 홍시처럼 터질 듯 붉게 달아올랐다.
꼰대 임동철 회장이 나처럼 어린 사람에게 이런 충고를 듣는 건 처음일 것이다.
고상하게 문장을 사용해 훈계를 대신했다.
영혼과 내면이 아름답지 못한 임동철에게는 비수와 같았을 터.
부들부들 몸을 떨며 이를 갈았다.
바뀐 표정이 마치 악귀 같았다.
쓰러진 동생을 조롱하기 위해 직접 걸음한 늙은 악마.
전하는 말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임씨 집안을 떠나 대한민국 전체에 이롭지 못한 자였다.
악덕 사주가 주인으로 있는 기업은 크면 클수록 국가적으로 해가 됐다.
특히 식품 기업의 폐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이고 악영향이 컸다.
좋은 재료를 사용해 널리 국민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
유전자 변형 원료로 최대한 이익을 뽑기 위해 애를 쓸 뿐.
본인들은 유기농 식품을 섭취하면서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독을 먹였다.
아토피가 넘쳐나고 크롬 병이 유행하는 이유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좋은 걸 먹어야 몸도 건강해지는 법.
그런 몸이 튼튼한 정신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시중에 비도덕 기업이 유통하는 식품 대부분은 오염된 채로 소비자의 손에 들어온다.
온갖 화공약품과 색소로 포장된 식품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상품들이 여기 KI그룹에서 생산하는 제품들이다.
더욱이 KI그룹 일가는 갑질로도 유명했다.
눈앞의 임동철 회장부터 시작해 자식들과 손자들까지 언론에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냄새 나는 악업이 가족 모두를 오염시키다 못해 국민들도 죽여 갔다.
“장태산! KI그룹이 우습게 보여! 너 죽고 싶어!”
임주황이 버럭 화를 내며 외쳤다.
당연히…….
“그것도 그룹입니까?”
쓴 웃음을 지으며 답변했다.
“닥쳐! 이 썩을 놈이 뚫린 입이라고 망발을…….”
임동철이 다시 버럭거렸다.
부자의 합공이 볼 만했다.
“그렇게 화를 내시면 그렇지 않아도 짧은 수명 더 줄어들 텐데……. 괜찮으세요?”
“!!!”
짧은 수명이라는 말에 임동철 회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막상 죽음이라 하니…… 두려우십니까?”
저승사자처럼 임동철 회장의 떨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두렵기도 하겠죠. 태어나 선행을 쌓은 업이 없으니…… 갈 곳은 뻔한데…….”
“너…… 너…….”
죄 지은 자들은 누구나 두려워하는 죽음이라는 위대한 진실.
날 손가락질하던 임동철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6개월.”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 6개월.
“그 안에……. 썩은 이빨 시원하게 뽑아드리겠습니다. 나의 이름 ‘장태산’을 걸고 말입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