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4장. 앓던 이(3).
“이게 지금 무슨 소리니?”
임준형과 장태산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병실에 들어와 있던 황라현과 그녀의 딸들.
갑자기 복도 쪽에서 들려온 고함에 기겁을 했다.
“성철아~ 형님이 왔다! 어서 썩 마중 나오지 못할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목소리는 귀에 익숙했다.
“큰아버지 같아요…….”
임아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아아…… 미치겠네.”
황라현이 골치가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시아주버니 임동철 명예 회장.
시집 올 때부터 집안에서는 골칫덩어리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 인사였다.
본인이 원하는 것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쟁취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형.
시아버지도 두 손을 들었을 정도다.
욕심도 이만저만 한 게 아니었다.
만약 임동철이 오정을 대표하는 회장이 됐다면 임성철 가족은 계열사 하나 얻지 못하고 쫓겨났을 게 뻔했다.
그 일만은 막겠다는 일념으로 황라현은 20년 동안 공을 들였다.
하늘도 무심치 않아 아들부터 떡하니 낳았다.
특히 시아버지는 옛날 분이라 아들손자를 드러내놓고 편애했다.
한집에서 모시고 살면서 꼿꼿하기 그지없던 시아버지의 수발을 다 들었다.
시아버지도 성격이 만만치 않았다.
유교적인 데다 누구보다 가부장적이었으며 성품 또한 대쪽 같았다.
집안에서 시어머니가 그나마 자상한 편이었지만 결국 시집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대기업 그룹 며느리라고 다르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더 엄격했다.
몇 년에 걸쳐 집안에 알맞는 예절과 요리 교육까지 받았다.
집안 어른 제사만 일 년에 열두 번을 치렀다.
인고의 세월을 참아내고 얻게 된 오정그룹 회장과 안주인 자리.
더는 세상 무서울 게 없었지만 시아주버니를 상대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지금까지도 오로지 자신만이 오정의 진짜 후계자라고 주장하고 다닐 정도다.
소송까지 제기했는가 하면 패소하고 난 뒤부터는 거침없이 막말을 뿌리고 다녔다.
“엄마! 큰아버지와 전화 통화하다 쓰러진 거 맞죠?”
임윤아 눈빛에 분노가 어렸다.
“……맞아. 그동안에도 아버지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다.”
“너무한 거 아니에요? 지금 누구 때문에 아빠가 이렇게 됐는데!”
조용한 성품의 임아진도 화를 냈다.
어릴 때부터 무시로 봐왔던 큰아버지라는 사람.
조카인 자신들에게 선물 한 번 제대로 건넨 적이 없었다.
물론 좋은 덕담도 기대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 사후 각종 행사에 참여하게 되면 인상부터 썼다.
매사 모든 것을 탐탁해하지 않아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곤 했다.
임씨 집안의 대표 민폐 덩어리다.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호시탐탐 오정그룹을 노렸다.
“증거가 없으니 몰아세우지 말자. 괜히 꼬투리 잡히면 피곤해진다.”
황라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당부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회장님은 지금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라…….”
짜아아악.
오광연 비서의 만류하는 소리 끝에 곧바로 뺨을 후려치는 타격음이 들렸다.
“안 비켜! 형이 동생 병문안 왔는데 감히 일개 비서 따위가 건방지게 날 막아? 너 죽고 싶어!”
오정그룹에서 이미 내놓은 인사임에도 보란 듯이 큰소리를 빵빵 치는 임동철.
아프다는 소문은 거짓말 같았다.
마치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렸다.
VVIP 병실이 일반인들에게 차단돼서 망정이지 가족의 치부가 온 천하에 드러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임윤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심하기 그지없던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
“윤아야, 참아! 오빠가 있잖아.”
황라현이 서둘러 임윤아를 불러 세웠다.
남편이 누워 있는 상태에서 맞서기라도 하면 더 날뛸 게 뻔했다.
이보다 좋았던 상황에서도 몇 번이나 난리가 났던 전례가 있었다.
형이라고 꾹꾹 참아주던 임성철 회장 때문에 습관이 더 나빠졌다.
“다들 비키라고! 우리 아버지 말씀 안 들려? 형이 동생 병문안 왔다는데 너희들이 왜 막아!”
임동철 회장의 둘째 아들 임주황의 목소리도 들렸다.
“작은 망나니도 왔네……. 하아아.”
임아진이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잔칫집도 아니고 초상을 치를 뻔한 병원에서 두 부자가 난동에 가까운 소란을 피웠다.
물불 가리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큰아버지 식구들.
“뭣들 해! 막아!”
오광연이 뭔가 결심을 한 듯 단단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간의 임동철 회장이 보인 막무가내 돌발 행동에 대해 화가 많이 난 듯했다.
“제수씨! 이거 뭐요? 지금 나 무시하는 거요!”
임동철이 황라현을 찾으며 소리쳤다.
KI그룹 역시 오정보다 못하긴 해도 꽤 쓸 만한 정보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미 병실에 황라현과 가족들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온 임동철.
스윽.
황라현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편이 해결하지 못했던 집안의 과제.
이제는 더 이상 이대로 방치할 수 없게 됐다.
“큰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때 들려오는 임준형의 날선 목소리.
“오! 우리 사랑하는 조카님이 드디어 나타나셨군. 흐흐흐.”
음흉하게 웃음을 토하는 임동철.
‘태산 씨도 있는데…….’
임윤아가 황라현보다 한발 먼저 병실 밖으로 튀어나갔다.
집안의 치부를 고스란히 들켜 버린 현장.
부끄러움은 임씨 집안사람들 중 정신이 온전히 박힌 식구들의 몫이었다.
***
‘다 기어 나오는구나. 흐흐흐.’
임동철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동생 임성철이 쓰러졌다는 소식만으로도 지난 밤 기분이 꽤 좋았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푹 잤다.
오정그룹을 눈 뜨고 빼앗긴 이후 처음으로 맛본 꿀잠.
당장 손에 들어온 것은 없었지만 속이 후련했다.
그간 묵었던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존중하는 척하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손아랫사람처럼 취급하던 거목 임성철이 쓰러졌다.
건방지기 이를 데 없던 피를 나눈 동생의 위중함.
그것은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준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오정 병원을 찾아왔다.
통화 중에 쓰러진 동생을 확인 사살하고 싶었다.
혹시라도 깨어나 의식이 또렷하면 다시 한 번 소란을 피워 화병으로 아주 보내버리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제 판은 벌어졌다.
아들 임주황에게 귀띔해 KI그룹 경호원들을 대동했다.
병실 앞에는 예상했던 대로 오정그룹 소속 경호원들이 있었다.
대놓고 임동철을 막지는 못했다.
눈치만 살살 보던 경호원들.
병실 바로 앞에서야 비서가 나섰다.
뺨을 세차게 후려쳐 기선을 제압했다.
복도는 일반인 통제로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눈치 보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할 수 있었다.
집안의 큰어른인 자신을 가문의 수치로 여기는 동생의 가족들.
어차피 아버지 생전에 이미 호로 자식으로 취급받았던 그였다.
애초에 부끄러움 따위는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오늘은 돌아가십시오. 아버지가 위중하십니다.”
임준형은 굳은 얼굴로 임동철을 상대했다.
철모를 때부터 자신만 보면 트집을 잡아 꾸짖던 못된 어른.
임준형이 기억하는 임동철의 모습이었다.
혈연의 정 따위는 오래전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버지와 피를 나눈 형제라는 이유로 참고 견뎌왔을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오정그룹을 책임지는 회장이 되면 KI를 공중분해로 날려버릴까 생각 중이었다.
임동철을 상대해 온 건 아버지의 몇 가지 안 되는 실수 중의 하나였다
사업가의 피는 이익 앞에서 푸른색으로 변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던 아버지.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임동철에게 그러지 못했다.
“그러니까. 봐야지! 형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동생이 어딨어. 옛날 같았다면 그게 바로 불효야! 불효!”
임동철의 큰 목소리는 거침없이 쩌렁쩌렁 울렸다.
두툼한 안경 너머로 감출 수 없는 희열이 번뜩였다.
“아주버니. 불효는 아니죠. 남편이 아주버니의 아들은 아니잖아요.”
어느새 나타난 황라현이 싸늘한 시선으로 임동철을 바라봤다.
‘나쁜 놈!’
황라현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병원을 찾아온 검은 속내가 다 보였다.
가족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긴 시간 동안 다른 길을 걸었다.
“제수씨. 불효 맞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큰 형이 아버지 노릇을 대신하는 법인데…… 동생이 아파 이렇게 먼저 병상에 누웠으니 이게 불효지 뭐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임동철.
“큰아버지! 그렇게 좋으세요?”
‘새로운 제거 대상 등장이군. 크크.’
임동철은 막내 조카 임윤아를 보며 예사롭지 않은 비웃음을 띠었다.
“이 버릇없는 년! 큰아버지를 봤으면 냉큼 인사부터 해야지. 어디서 망발이더냐! 네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임동철은 욕까지 섞어가며 훈계를 했다.
“그만하세요! 양심에 찔리고 부끄럽지 않으세요? 아직도 오정이 큰아버지 거라고 생각하세요? 할아버지를 배신하고……. 진짜 뻔뻔하시네요.”
임윤아가 지금까지 마음에만 담아 두었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
임윤아의 태도에 모두 다 깜짝 놀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큰아버지인 임동철만 나타나면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사라졌던 임윤아였다.
그런 임윤아가 제거 불가능한 폭탄이 되어 나타났다.
“뭐, 뭐라고?”
예기치 못했던 막내 조카의 뼈아픈 일격에 임동철의 얼굴을 벌겋게 달아올랐다.
감히 누구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임동철의 부정할 수 없는 과거사.
임씨 집안에서는 암암리에 입 밖에 내는 걸 금기시 하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야! 임윤아! 어린 게 어디서 아버지께 망발이야! 너 제정신이야!”
보다 못해 임주황이 앞으로 나섰다.
‘흐흐. 기회야. 아버지께 점수 좀 따야지.’
교도소에 수감 중인 큰아들 임주혁 회장을 편애해 온 아버지 임동철 명예 회장.
최근 들어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
아버지가 아직 넘기지 않고 소유하고 있는 주식이 상당했다.
제대로 된 재산을 물려받은 게 없는 둘째 임주황은 좋은 기회를 포착했다.
오늘 병문안을 따라 온 게 신의 한수였다.
그룹 비서실의 연락을 받고 아버지와 동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투에 당당히 나섰다.
“오빠…… 아니 임주황 씨. 지금 어떤 상황인지 눈에 안 보여요?”
“뭐? 임주황 씨?”
임주황이 크게 당황했다.
자신이 아는 임윤아는 이렇게 강단 있게 나올 애가 아니었다.
그토록 오래 봐왔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임성철 회장이 특히나 어린 시절부터 끼고 돌았던 막내 사촌 여동생.
몇 년 사이 몰라보게 훌쩍 성장해 있었다.
과거에는 눈도 못 마주치던 임윤아가 쌍심지를 켜고 대들었다.
“제수씨. 도대체 애들을 어떻게 키운 거요? 우리 임씨 집안 욕 먹이려고 작정하셨소!”
황라현에게는 그래도 꼬박꼬박 제수씨라고 호칭하는 임동철.
‘그래! 물고 뜯어라. 이렇게 싸워야 제 맛이지!’
험악한 분위기에서도 임동철은 내심 행복했다.
자신만 나타나면 약속이나 한 듯 꼬리를 말고 모조리 사라지던 동생의 식솔들.
오늘 제대로 날을 잡았다.
임씨 가문이 낳은 장자의 위엄을 되찾을 때였다.
“틀린 말 한 것 같지 않은데……. 저만 그렇게 느껴지나요?”
황라현도 전투에 본격 참가했다.
평소 말다툼이라도 날라치면 말리기 바빴던 남편이 쓰러져 버린 마당에 두려울 것도 눈치 볼 것도 없었다.
사실 황라현 성격도 만만치 않았다.
까칠한 성격을 지난 세월 동안 수행하듯 누르며 살아왔다.
그러나 오늘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터졌다.
뻣뻣한 시선으로 임동철을 바라보는 황라현.
오정의 진짜 안주인 포스를 강하게 뿌렸다.
‘이것들 봐라…….’
임동철의 전투의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영영 올 것 같지 않다는 불안감도 동반됐다.
죽기 전에 싸그리 불태우리라 다시 한 번 다짐을 했다.
“허어……. 아버지가 살아 계셔서 집안 돌아가는 이 꼴을 보셨어야 하는데…….”
끌끌 혀를 차는 임동철.
보이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다 계획적이었다.
“이만 돌아가십시오. 아버님 상태가 호전되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임준형은 맏이답게 끝까지 예의를 지켰다.
오늘따라 더욱 막중하게 느껴지는 집안의 장남이라는 무게감.
장태산을 만난 뒤 조금씩 각성된 무게감이었다.
“됐다. 내가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못 간다! 너희들이 내 동생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는지 어떻게 알아?”
“아주버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황라현의 뾰족하게 날이 선 말이 날카롭게 울렸다.
“내가 틀린 말했소? 그룹 경영권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부모 자식 간이 무슨 소용이요. 차지하는 놈이 왕이지.”
비뚤어진 임동철의 생각이 순화되지 않고 그대로 튀어나왔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더니…….”
임윤아가 북풍한설 같은 목소리로 임동철을 향해 쏘아붙였다.
“네 이녀여여어어어언!”
막내 조카의 막말에 눈이 홱 돌아간 임동철.
쇄애앳.
둔중한 몸으로 성큼성큼 다가서며 굵은 손을 날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치욕감.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턱!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