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3장. 앓던 이(2).
으드득.
기력 없이 병상에 누워 있던 임성철 회장은 노기를 띠며 이를 갈았다.
누군가를 겨냥해 ‘놈’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죽음 목전에서 임성철 회장은 깨달은 바가 있었다.
태생이 개새끼인 자는 절대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사실.
한 뱃속에서 나온 사이지만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됐다.
아니 차라리 원수보다 못했다.
자신을 이런 상태에 놓이게 만든 원흉.
그동안 피를 나눈 형이라는 명목으로 많이 봐줬다.
거의 무일푼으로 별 볼일 없는 주식만을 상속받았던 형.
아버지를 배신하고 권좌를 차지하려 했던 대가가 꽤 컸다.
평소 성품도 온화하지 못하고 거칠었다.
본인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랫사람은 물론 형제들에게도 주먹을 휘둘렀다.
장남이라는 이유로 집안에서 아버지 다음으로 왕처럼 굴었다.
아버지께서 잠시 자리라도 비울라치면 온 집안이 살얼음판을 걷는 듯 돌아갔다.
술에 취하기라도 하는 날은 더 가관이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임성철에게도 손찌검을 했다.
그런 일은 고등학교 때도 반복됐고 상처받은 임성철은 가출을 하기도 했다.
형의 포악질은 부모님은 결코 알 수 없을 정도로 상상을 불허했다.
그럼에도 모든 과거를 임성철은 용서했다.
폭력배 같은 형이었지만 성인이 된 후 그의 과오를 잊어줬다.
타의 반으로 형이 독립을 한 후 가치 없던 주식을 탄탄한 식품 계열사 주식으로 바꿔 조카들과 먹고 살 수 있도록 배려도 했다.
형수가 조카들과 함께 찾아와 애원하며 살 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그룹 차원에서 지원할 수 있는 부분들을 모색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형의 회사는 승승장구했다.
사업 수단은 나쁘지 않아 20년 만에 대기업 수준이 됐다.
기반을 마련하고 그 정도면 됐다 싶었지만 형 임동철은 생각이 달랐다.
술만 마셨다 하면 저를 향해 입버릇처럼 형을 배신한 파렴치한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아버지 제사 때는 물론 잦지 않은 가족 행사에서 참석해서도 그 버릇은 여전했다.
생존한 사람들 중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지만 날이 갈수록 추태가 더 심해졌다.
집안 망신에 화가 나는 건 사실이었지만 임성철은 끝까지 형으로서의 대우를 해줬다.
무엇보다 임씨 집안사람들 누구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게 싫었다.
그렇게 유지해 오던 관계에 기어코 사달이 났다.
쓰러지기 직전 술에 취해 전화를 해온 형.
다른 날과 같이 통화는 욕으로 시작됐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음에도 내색하지 않고 상대 해주다 폭발하고 말았다.
후폭풍이 컸다.
임성철은 한바탕 욕을 거나하게 퍼붓고 쓰러졌다.
이후는 기억나지 않았다.
눈 뜨니 지금 이 순간.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먼저 보내야 해!’
생각할수록 이가 갈렸다.
장태산이 비법도 시행하기 전에 저승길로 가는 강을 건널 뻔했다.
남겨두고 가면 두고두고 가문에 해가 될 형을 기필코 먼저 정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누워만 있어야 하니 전혀 힘을 쓸 수가 없다.
형을 저대로 두었다가는 자식들뿐만 아니라 임씨 집안 모두에 수치가 될 것이다.
이만 형과의 인연을 끝내고 싶었다.
사태로 보아 이미 늦었지만 임성철은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살 만큼 다 산 두 사람이었다.
형과 자신과의 인연을 정리한 뒤 두 사람이 떠나면 사촌들만 남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사촌 관계는 가까운 이웃만도 못했다.
더욱이 경쟁 구도에 있는 기업인들 집안.
형제와도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더러운 싸움을 하는 판에 사촌은 남보다 못했다.
“설마…… 사채 빌렸어요?”
장태산은 이런 와중에 농담을 던졌다.
진짜, 나쁜 놈이다.
죽다 깨어난 사람에게 던지는 말이 전부 장난 섞인 말뿐이다.
밉지 않았다.
이 순간부터 자신의 연장된 목숨이 장태산에게 저당 잡혔다는 걸 임성철은 알고 있었다.
쓰러질 당시의 순간을 떠올리면 그대로 이 세상을 떠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 상태의 임성철을 다시 살려낸 장태산.
“미안하다.”
“뭐가 말입니까?”
“자식들…… 싸가지 없는 거.”
“……윤아는 빼시죠.”
미안하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욕심에 눈멀어 귀인을 몰라보는 어리석은 자식들.
특히 아들 임준형과 둘째딸 아현이 문제였다.
오늘만 봐도 장태산에게 단단히 찍힌 게 확실했다.
“아직 어려서…… 걔들이 세상 물정을 몰라.”
“어려요? 저보다 한참 연배가 있는 분들입니다.”
“넌…… 정신연령이 높잖아.”
“그래서…… 참으라고요?”
“그럼 팰래? 나 아직 눈에 흙 안 들어갔다.”
누구보다 편안한 대화를 장태산과 나누며 임성철은 그만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방금 전까지 의식도 없이 생사를 넘나들었지만 지금은 거짓말처럼 농담을 주고받았다.
“하는 거 봐서요. 마음에 안 들면 싹 빼앗아 윤아 누님 줄 겁니다.”
“…….”
장태산의 말이 농담이 아닌 것 같아 임성철 회장은 입을 닫았다.
뱉은 말대로 하고도 남을 장태산이었다.
“그런데…… 앓던 이는 누굽니까? 혹…… 임동철 회장입니까?”
“아, 알고 있었어?”
임성철은 순간 당황했다.
장태산의 눈치와 직관, 정보력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두 분 사이…… 매우 돈독(?)하시잖아요.”
뭔가 이미 아는 듯 장난스럽게 웃는 장태산.
“살아봐야 덕이 안 되는 사람이다. 보내줘야지.”
반송장처럼 침대에 누워서도 싸늘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임성철 회장.
“KI그룹이라…….”
장태산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앓던 이만 빼줘. 다른 건 두고.”
약간의 불길함에 임성철 회장이 급하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왜요?”
“조카들은…… 죄가 없어.”
사실 임성철은 조카들과는 정이 돈독했다.
미운 털이 박힌 형과 달리 조카들은 어린 시절 삼촌 임성철을 곧잘 따랐다.
업어주고 무등도 태워주며 놀았던 추억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엄하기만 했던 가풍 아래서도 조카들은 웃음꽃을 선물해 줬다.
비록 지금은 망나니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지만 다른 재벌가 자식들도 대부분 그 정도 문제는 몰고 다니며 산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장 대표…….”
심상치 않는 분위기가 엿보이자 가만히 장태산을 부르는 임성철 회장.
“회장님. 계획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타이밍이 빨랐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잘된 일입니다.”
“그럼…….”
“이제 진짜 죽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잔인하군.”
“원하지 않으시면…… 지금 살려드리겠습니다.”
“그럴 수 있나?”
“물론입니다. 다만 보장 AS 기간은 길어야…… 한 달입니다.”
“끙…….”
임성철 회장이 앓는 소리를 냈다.
보기와 달리 의외로 독한 구석이 있는 장태산.
그에게 말려들어봐야 머리만 아팠다.
“한숨 푹 주무시고 일어나십시오. 몇 달만 조용히 계시면……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몇 달이면…… 되나?”
“물론 그 이후로도 쭉 살아 계셔도 산 게 아닌 것처럼 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다행이야. 이렇게 대화라도 할 수 있어서…….”
“유언은 아니시죠?”
“나쁜 놈…….”
“그만 주무십시오. 괜히 사람들 눈에 띄면 좋을 게 없습니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것 같아. 좀 쉬고 싶어…….”
갑자기 밀려드는 수마의 기운.
“한숨 푹 주무십시오.”
“장 대표……. 자네를 믿네.”
씨익.
대답 대신 묘한 웃음을 짓는 장태산.
“그럼…….”
장태산의 손이 임성철 회장 머리위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찾아오는 짙은 암전.
거짓말처럼 임성철 회장은 깊은 어둠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
“그동안 예의 없이 던진 말들에 대해 사과하겠습니다.”
사과? 천하의 임준형이?
임준형의 말투가 변했다.
임성철 회장이 누워있는 병실에서 나왔다.
카르마 포인트를 사용해 집을 나갔던 정신을 불러와 깨웠다.
간단한 대화는 가능했지만 몸은 온전치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화타의 침술과 성수 등을 이용해 몸도 말끔히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때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이 시점에 거인은 잠시 퇴장해줘야 흐름상 맞았다.
미래를 위한 한 발짝 후퇴라는 지혜로운 포석.
그리고 예측한 대로 변화가 시작 됐다.
VVIP 특실 옆방에 위치한 회의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임준형이 사과를 했다.
억지로 하는 행동과 표정은 아니었다.
얼굴에 진심으로 반성하는 기미가 감돌았다.
내가 대주주라는 걸 알고도 당당하게 나올 뻔뻔한 경영자는 없었다.
천하의 오정도 마찬가지.
“글쎄요. 사과를 받아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임윤아 오라버니라고 내가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었다.
첫 만남 때부터 어긋난 사이.
어설픈 쫀심 내세우며 나를 자극했던 그에게 걸리면 부셔버린다고 경고했었다.
“아버지께서 저렇게 되시니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쓰러지시기 전에 몇 차례나 장 대표님과 절대 척을 져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셨는데 말입니다.”
역시 임성철 회장은 촉이 좋다.
내가 무서운 인간인 걸 제대로 알고 있는 양반 중 한 분이다.
“제가 뭐라고……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치미를 뗐다.
쿨하게 오늘 일에 대한 사과를 받아주기에는 과거에 그가 남긴 실수의 흔적이 컸다.
기회가 온 만큼 이번에 손을 봐야 했다.
어설프게 그냥 지나쳤다가는 대주주를 우습게(?) 볼 수 있었다.
“장태산 대표님. 진심으로 다시 한 번 사과하겠습니다.”
급기야 임준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또 다시 고개를 깊숙이 숙여왔다.
이번에는 정중함이 흘러 넘쳤다.
“!!!”
예상 밖의 행동.
앉아서 임준형의 사과를 받으려니 졸지에 나는 싸가지가 부족한 사람이 됐다.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됩니다. 그 사과 받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임준형 손을 잡아 앉혔다.
문득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TV에서 봤던 범생이 스타일 임준형과 느낌이 달랐다.
방금 전 병실에서 보였던 불같은 성격도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다.
행동도 굵고 과감했다.
임성철 회장이 괜히 차기 회장으로 추천한 게 아니었다.
“그 말씀 믿겠습니다.”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는 임준형.
사람 다시 보인다.
골프장에서 보였던 기세등등한 임준형의 모습이 아니었다.
귀티 나는 중년 남자로 돌아와 내 손을 마주 잡아왔다.
“무섭습니다.”
“제가요? 하하하하.”
임준형이 다시 한 번 활짝 웃었다.
“대주주께 잘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넉살도 좋다.
“로버트 라이언이 대주주죠.”
“장태산 대표님과 친분이 엄청나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버님이 병환 중이라 그룹을 노리는 세력들이 준동할 게 뻔합니다. 백기사 부탁드립니다.”
원하는 바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그의 태도가 싫지 않았다.
그 누가 천하의 오정그룹 황태자에게 사과를 받겠는가.
“그룹에 투자 가치가 있다면 우호적인 관계는 지속될 겁니다.”
원론적인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다.
황태자의 사과 한마디에 황송해하며 고개 숙일 군번이 또 아니었다.
“지켜봐 주십시오. 오정전자를 비롯해 그룹 계열사 전부 흑자를 계속 유지할 겁니다.”
자신감이 아주 넘친다.
“기대가 큽니다.”
나도 투자한 자금이 꽤 된다.
이익이 창출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법.
“그런데…… 병실에서 아버지는 왜…….”
10분 정도 병실에 머물렀던 상황이 궁금한 듯했다.
“회장님이 몇 번 귀한 술을 대접해 줬습니다. 이것저것 고마워 빨리 쾌차하시라 응원해드렸습니다. 비록 누워 계시지만 제 마음은 전달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그랬군요.”
병실에 CCTV는 없었다.
정황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내 말을 믿어야 했다.
“임아현 부사장님은 보이지 않던데…….”
나 뒤끝 있다.
병실에서 닭처럼 날 쪼아대던 임아현 부사장.
“갑자기 조카가 아파서 집에 갔습니다. 다음에 날을 잡아 정중하게 사과시키겠습니다.”
“아닙니다. 마음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사과 받는 일, 제가 더 불편합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한 까칠하다는 걸 은연중 돌려 어필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회장님도 일단 위험한 고비는 넘기신 듯합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한의학을 독학했습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아! 한의학까지!”
한의학 정도가 아니라 화타 수제자다.
“날 왜 막아!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내가 이 집안 어른이야. 그런 나를 우습게 봐!”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고집스런 노인의 격한 목소리.
“!!”
순간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임준형.
“성철아! 성철아아아아아아아아!”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