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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장. 초심(2). (728/1,284)

731장. 초심(2).

타앙!

나무 책상을 세차게 내리치는 단단한 손.

“도대체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는 거야? 당신들 아마추어야? 도청 장치가 갑자기 해킹을 당해 불타버렸다고? 대한민국 국정원이 언제부터 이 꼴이 난 거야!”

국정원장 한재기가 길길이 날뛰었다.

국군 방첩대 장교로도 근무해 본 그는 지금 일어난 일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몸소 느끼고 있었다.

일개 개인도 아니고 야당의 중진의원과 중요한 경제인이 나누는 대화 도청이었다.

걸리는 순간 정치 탄압 프레임에 걸릴 게 자명했다.

여당에 큰 부담이 될 일.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전임 국정원장 꼴이 날 수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1차장 오택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도 전혀 예상 못 한 사건이 터졌다.

보안이 생명인 국정원 도청 차량 내부 설비가 모조리 파괴됐다.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이 나왔다.

국정원에 달랑 두 대 있는 고가의 자산이 개박살 났다.

그것도 컴퓨터 프로그램 해킹으로 인한 발화.

어떤 수법인지 아는 팀원이 없었다.

현장을 확인한 컴퓨터 전문가도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이면 되는 일이야! 도대체 어떻게 수습할 거야? 그리고 어떤 새끼가 감히 국정원 프로그램을 해킹해! 당장 잡아와!”

한재기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지만 오택수는 선뜻 답할 말이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해킹했는지 감도 잡지 못했다.

다만.

“장태산를 보호하려는 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장태산?”

“정확하지는 않지만 장태산이 추진하는 종합 연구소에 슈퍼컴퓨터가 들어간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IT 쪽으로도 인맥이 대단합니다.”

“슈퍼컴퓨터를 누구 마음대로?”

“그 연구소가 미국 실리콘 밸리 기업들과 합자 회사로 운영됩니다. 과기부나 기타 행정부가 거부할 힘이 없습니다.”

“장태산이라 이거지…….”

해킹을 통해 자료만 빼돌리는 게 아니었다.

해당 컴퓨터에 과부하를 일으켜 아예 전소시켜 버리는 엄청난 능력이었다.

한재기가 아는 나국찬 주변에는 이 정도 실력을 갖춘 자들이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그놈들 아직 그곳에 있어?”

“아직 있습니다.”

“뭔가 대단한 수작질 중인 것 같은데…….”

“식당 주인을 포섭해 작업할까요?”

1차장이 넌지시 물어왔다.

“1차장 당신 바보야? 요즘 같은 세상에 누굴 믿어! 믿었다가 다른 놈이 인터넷이나 SNS 올리면 책임질 거야?”

“……죄송합니다.”

오택수는 다시 고개를 깊이 떨구었다.

세상 변하는 속도가 빨라 과거처럼 작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지만 뒤로 물러나. 그래도 꼬리를 잡았으니…… 다음에 기회가 올 것이야. 그때는 절대…… 실수하면 안 돼.”

한재기 원장은 한 발 몰러날 때를 알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이번에는 꼬리를 잡은 것만으로 만족했다.

‘만만한 놈이 아니야. 하지만 잡아낼 수만 있다면…….’

장태산을 떠올리며 불굴의 의지를 불태우는 한재기.

그의 비상한 머리는 이 순간에도 빠르게 회전했다.

***

‘초심…….’

초심이라는 말에 나국찬은 1996년도를 떠올렸다.

아직 검찰과 군사정권의 힘이 남아 있던 시절.

서울 관악구에서 어렵게 초선에 당선됐다.

4선을 이루었지만, 단 한 번도 쉬운 적이 없었다.

과거 민주화 시위 이력 덕분에 한동안 빨갱이라는 말을 수시로 듣고 살았다.

대한민국을 위해 피를 흘렸지만 잘못된 이념에 사로잡힌 자들은 무조건 빨갱이라는 말로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의 말을 묵살해왔다.

4선이 되는 세월 동안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또 잊혀졌다.

한없이 많은 정을 나누었던 동료에게 쓴 배신도 당했다.

정권의 협박도 여러 번.

같은 당에서도 당권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당한 적도 있다.

공천권을 못 받아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총선 때마다 당의 이름이 바뀌었다.

대통령 탄핵도 경험했고 정권을 잡았던 시절에 여소야대도 맛봤다.

그사이 바른 길을 간다고 신념을 세웠지만 알게 모르게 권력욕에 오염됐다.

어렵게 잡은 천재일우의 기회는 당권 분란으로 날렸다.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국민들의 판단은 냉정했다.

여론이 비호의적이었다지만 국민들 역시 바보가 아니었다.

정열만으로는 개혁을 할 수 없었다.

처음 잡은 권력에 취해 몇몇 아랫사람들이 무소불위의 힘을 남용했다.

배운 게 도적질이라고 무조건 상대 당을 탓하며 똥물에서 뒹굴 듯 악습에 물들어 갔다.

권력이란 것이 그렇게 무서웠다.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초심.”

나국찬은 힘들었지만 굵고 짧게 대답했다.

오염되긴 했지만 그래도 가슴 한켠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촛불 같은 열정.

“그래야죠.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발자취 아닙니까.”

장태산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대체 왜 말려드는 거지?’

나국찬은 이 상황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괜찮은 물건이 있어 포장지로 활용하려 했을 뿐인데 도리어 설득을 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분위기는 나쁘지는 않았다.

나이만 어렸지, 톡 까놓고 자신보다 더한 능구렁이 같았다.

눈빛에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그건 심지가 굵다는 뜻.

4선 의원 따위는 가볍게 눌러버릴 정도로 배짱도 좋고 그만한 힘도 소유했음이 확실했다.

이런 자리에서 뻥카를 내놓을 만큼 허접한 자가 아니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제 와서 나국찬은 감히 말을 놓지 못했다.

보기에만 어린 사람이지 재계 그룹 회장이나 정치 선배를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뭔지 모르지만 위험한 자라는 신호가 계속 전해졌다.

“말씀하십시오.”

“저에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큰일의 뜻은 무엇을 말합니까?”

비례대표 자리를 걸고 유혹하려던 나국찬이 도리어 낚싯바늘에 걸려 파닥거렸다.

“세상 한번 바꿔보셔야죠.”

“!!!”

“서운하게 들리시겠지만 저는 정치인을 믿지 않습니다. 나국찬 의원님이나 옆에 앉아 계신 양우석 의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장태산의 어법은 특이했다.

세상을 바꾸자면서 상대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

양우석은 서운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도 장태산 회장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도달해야 할 목표가 있어서 타락의 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을 바꾸자는 겁니까?”

나국찬의 눈빛이 빛났다.

“힘을 모아 폭풍이 되어야 합니다. 폭우에 강이 뒤집어져야 밑에 가라앉은 더러운 것들이 쓸려가고 다시 깨끗한 모래가 바닥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예상치 못한 말이 장태산의 입에서 나왔다.

이 말은 최소 정권을 바꾸자는 의미였다.

“쉽지 않을 겁니다.”

나국찬은 부정적으로 봤다.

앞으로 10년 이내에 지금의 여당을 꺾을 묘책은 없었다.

교묘한 언론과 권력층의 협잡을 버텨내기 쉽지 않았다.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십시오.”

“???”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지금껏 논리와 이성을 중시했다면 이제는 감정과 직관을 이용할 때가 됐습니다. 나이를 탓할 것도 없습니다. 과거에도 도전해서 쟁취하지 않았습니까. 낮은 자세로 배우고 채우면, 깨어 있는 국민들이 연대해 줄 겁니다. 변화하는 세상에 눈높이를 맞춰 보십시오. 보좌관들이 아닌 의원님이 직접 국민들과 SNS로 소통하십시오. 그게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오래 정치하셔야죠. 인생 100세는 농담이 아닙니다. 죽기 전에 커다란 족적을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껏 정치를 탐구했다면 이제는 진짜 소망했던 꿈을 실현하고 행동할 때입니다.”

“!!!”

나국찬은 장태산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알고는 있지만 쉽지 않은 세상과의 동화.

SNS는 아직 낯설었다.

괜히 중진 정치인이 휘말려 소란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의원님.”

장태산이 눈웃음을 지으며 나국찬을 불렀다.

“네……. 회장님.”

“성장하는 사람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아!”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고 현재에 최선을 다한 자신에 만족한다면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꿈은 이뤄질 겁니다. 처음에 꿨던 그 꿈이…….”

나국찬은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언제부터인가 타성에 몸과 마음이 물들었다.

과거 친구들과 가벼운 주머니를 털어가며 나눴던 청춘의 열정이 되살아났다.

잊어버렸던 꿈.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모든 걸 걸겠다고 다짐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또로록.

도자기병을 들고 자신의 잔을 채우는 나국찬.

타들어갈 듯 뜨거워진 피를 식히기 위해 차라리 독주가 필요했다.

‘나의 꿈…… 나의 첫사랑…….’

***

“한 잔 더 하고 싶네.”

술자리는 끝났다.

나의 조언에 깊은 생각에 빠진 나국찬 의원은 별 말 없이 1시간을 더 자리에 머물다 일어섰다.

허튼 약속 따위는 없었다.

묵직하게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그사이 손은 뜨거워져 있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지는 정치인과의 조우는 그렇게 끝났다.

미련을 남기지 않았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정치인을 믿지 않았다.

정권을 잡게 되면 오만함에 젖어 국민들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정치인들이 대다수였다.

선거라는 요식 행위를 통해 그 중에서 좀 더 깨끗하고 덜 훔쳐갈 자를 뽑을 뿐이다.

최소한 말은 통하고 국민들을 억압하지 않는 정치인들이 필요했다.

막상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마음을 몰랐다.

국민들이 그들보다 더 똑똑하게 변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유년 시절부터 시작된 치열한 경쟁.

그 속에서 살아남은 세대였기에 공정에 아주 민감했다.

그런 국민들의 심정을 헤아려 줄 마음이 따듯한 정치인이 미래에 가면 더 그리워진다.

누가 뭐라고 욕해도 자신만의 옳은 길을 가는 진정한 정치인.

하늘의 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을 그분이 그리웠다.

세상을 향해 불평불만만 넘치도록 토해내는 자들에게 미래에도 여전히 욕을 먹지만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한 획을 그었던 분.

“보고 계시죠? 당신께서 그랬죠. 한 번 굴러가기 시작한 민주주의 바퀴는 누구도 멈추지 못할 것이라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도시의 화려한 빛들 너머에서도 여전히 하늘에서 반짝이는 작은 별 하나.

인류의 신에 합류한 그가 우리를 안내하는 길잡이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띠리리리릿.

조용히 울리는 스마트폰.

가을이 진하게 익어가는 이 밤.

누군가 또 나를 필요로 하는 모양이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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