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장. 50보와 100보.(2)
“인도 차기 총리가 확실시 되고 있는 모디 주지사와의 친분? 그것도 상당히 두터운? 도대체 그 자식 정체가 뭐야? 일개 투자자 수준이 아니잖아.”
내곡동에 위치한 국가정보원 원장실.
대한민국에서 위성이나 기타 지도로 확인이 불가능한 곳들 중 한 장소.
원장 한재기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보고를 받았다.
퇴직 군인답게 자세는 꼿꼿했다.
현 정권에서는 고위 장성들을 중심으로 중용했다.
상관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말 잘 듣는 꼭두각시들이 필요했다.
일이 없던 퇴임 고위 장성들은 간만에 찾아온 기회를 잡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초임 장교 시절부터 모셨던 독재 정권 대통령의 딸.
그들에게는 그분과 같은 존재이자 모셔야 할 주인이나 다름없었다.
“여러모로 골치 아픈 놈입니다.”
국정원장이 바뀌면서 곧장 승진한 1차장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나도 알아. 이 자식 훈련소 시절에 겁도 없이 주한미군 사령관을 불러낸 놈이야. 맞지?”
“그렇습니다.”
“건방진 놈의 새끼가…….”
한재기 국정원장이 과거 사건을 떠올리며 더욱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독사파와 연결되어 있던 훈련 소장이 당시 그 문제로 옷을 벗었다.
주한미국 사령관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 일로 미국 행정부에서도 몇 차례 연락이 왔을 정도였다.
군 조직 안에서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한재기 원장이 보고서에 첨부된 사진을 노려봤다.
장태산.
나이는 어리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한국대 법학과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 자격도 획득했다.
재주 좋은 투자로 수조 단위의 자산까지 모았다.
워싱턴 정가는 물론이고 월가의 신화적 인물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솔직히 정체가 궁금했다.
과거 같았다면 남영동으로 끌고 와 가볍게 고문이라도 해보겠지만 세상이 많이 변했다.
아무리 국정원장이라고 해도 법적 테두리 안에서는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이 새끼! 딱 봐도 빨갱이야.”
한재기가 장태산의 사진을 노려보다 확언하듯 한마디 내뱉었다.
“북한과 접촉한 사실은…… 없습니다.”
“북한과 접촉해야 빨갱이야? 대통령 각하에게 위해를 가하면 다 빨갱이야!”
“넵!”
1차장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국정원 출신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오다 보니 눈치가 더 빨랐다.
인사에 적용되던 원칙 따위는 가볍게 무시됐다.
언제든 국정원을 비롯해 청와대 민정라인에서 찍어내려 들면 옷을 벗어야 했다.
이런 사태를 두고 국정원 직원들 사이에서 상당히 수위 높은 불만이 터져나왔다.
과거와 달리 국가를 수호한다는 자부심마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각종 선거에 개입하는가 하면 수시로 여론을 조작하는 데 참여했다.
정작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과 온라인상에서 여론전을 펼치는 게 일이었다.
그 일로 인해 전임 국정원장이 사임하고 내부적으로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럼에도 내부 분위기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현 정권에 대해서만큼은 여론이 우호적으로 나왔다.
여당이 국회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다수 언론도 알아서 여당의 편을 들었다.
경제계도 떨어질 떡고물을 노리고 발 빠르게 상납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털 거 없어?”
“……전 정권에서도 털어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일로 피를 몇 번 봤습니다. 공길춘 비서실장님도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데…….”
“주 선생님도 액션을 취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멈췄습니다. 뭔가 딜이 있었던 것 같긴 합니다.”
“그래서 더 마음에 안 들어. 어린 새끼한테 우리가 놀아나는 것 같잖아.”
한재기 국정원장은 쩝쩝 입맛을 다셨다.
막상 대통령은 정치에 관심이 많지 않았다.
청와대를 차지한 것만으로 만족했다.
대신 최측근인 주순자와 몇몇 인물들이 대통령 곁에서 자기 사람 챙기기에 바빴다.
실상 대통령을 배제하고 몇몇 라인으로 실세 권력이 유지됐다.
그 판에서 기업은 알아서 돌아갔다.
미리 다음 대 총선과 대선을 위해 정치권은 바쁘게 움직였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한재기 역시 이대로 권력에서 손을 떼고 싶지 않았다.
뭔가 획기적인 업적을 남기고 박수 받으며 물러나고 싶었다.
“보안이 철저합니다. 장태산이 운영을 시작한 종합 연구소에 대한 정보도 차단당했습니다. 저희 직원들도 접근했다가…… 낭패를 봤습니다.”
“구린 게 많은 놈이야. 한 번만 꼬리를 드러내면 잡힐 것도 같은데…….”
육군참모총장과 국정원장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며 버텨낸 한재기였다.
진한 구린내가 나는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했다.
오랜만에 한껏 잔머리를 굴렸다.
“오늘 대어가 걸릴 것 같습니다.”
1차장이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대어?”
“장태산과 어울리는 국회의원이 있습니다. 워낙 은밀해서 뒤를 잡기가 여간 힘들었는데 최근에 알아냈습니다.”
“그래? 누군데?”
사업가가 정치인과 어울리게 되면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명확해진다.
한재기가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양우석이라고…… 장태산 고향인 장주시 2선 의원입니다.”
“양우석이라……. 어부지리로 당선된 놈이잖아.”
한재기도 익히 알고 있는 국회의원.
초선 때 얼떨결에 성희롱 문제로 낙선한 여당 국회의원 지역구를 꿰찬 자였다.
“2선이 됐다고 요즘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가 됐지.”
초선과 다른 2선 국회의원의 행보.
정치판에 발을 들인 정치인들 모두 한 번씩은 대선을 꿈꿨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고 다선의 국회의장만 돼도 명예라 여겼다.
“양우석이 지금 장태산과 같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뭐? 어디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모처에서 나국찬 의원이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나국찬!!!”
***
“회장님, 죄송합니다.”
양우석 의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런 호출은 양우석 의원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는 다급하게 만남을 청했다.
그간 계획해 온 미래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인물이었기에 시간을 냈다.
회사 가까운 대로에서 픽업했다.
“뭐가 말입니까?”
양우석 의원은 당황하고 있었다.
“……이렇게 번거롭게 만들어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아.”
긴 한숨이 차 안에 맴돌았다.
양우석 의원의 진심이 전해졌다.
“괜찮습니다.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느끼지만 대한민국 참 좁았다.
몇 년 동안 나를 드러내지 않고 감춘다고 애썼지만 이제는 알 만한 자들 모두 나의 신변에 대해 웬만큼 파악했다.
야당도 마찬가지.
양우석 의원의 거침없는 행보 뒤에는 내가 있었다.
정치판에 뛰어든 국회의원에게 일반인이 지켜가는 청렴을 바라는 건 불가능했다.
세비가 아무리 많다 해도 그건 일반인들 수준에 계산 된 정도일 뿐이었다.
지역구 관리를 위해서도 사용되어야 할 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겉으로는 청렴을 요구하면서 내부적으로 각종 경조사 등에 참석을 요구했다.
다소 이율배반적인 유권자들의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선진국인 유럽이나 미국도 국회의원 청렴 문제는 언제나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런 점을 감안해 뒤에서 양우석 의원을 도왔다.
얼룩진 검은 돈으로 작업하느니 차라리 내가 밀어줄 생각이었다.
최대한 정치자금 후원과 같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그를 도왔다.
능력도 출중해서 그 외에는 알아서 성장했다.
지역구도 발로 뛰어다니며 유권자들과 만나 초석을 다졌다.
여러 지역 투자 유치에 양우석 의원을 초대했다.
자연스럽게 해당 지역에서 그의 명성이 높아졌다.
뒤가 든든해진 양우석 의원은 본격적으로 정치판에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양우석 의원은 중요한 면접을 앞두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는 대한민국 정치 파벌.
그중 한 곳의 수장이 양우석 의원과 나를 불렀다.
“최대한 조심해서 움직였는데 정치 귀신들의 눈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한때 정권을 잡았던 이들입니다. 곳곳에 심어 놓은 눈이 많을 겁니다.”
“권력은 알면 알수록 무섭습니다.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 할지…….”
양우석 의원이 제대로 권모술수가 넘치는 정치권의 뜨거운 민낯을 엿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만두실 겁니까?”
대놓고 물었다.
“아닙니다! 그래서 더 바짝 힘을 내 볼 생각입니다.”
“그 정신이면 됐습니다. 관심 받는 한 송이 꽃보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소나무처럼 살면 됩니다. 바람에 부러지고 꺾이고 휘어지지만 푸른 의기는 가는 가지 끝에서 지켜냅니다. 각오하셔야 합니다. 이제부터 밑동이가 커져 껍질이 갈라질 시기입니다. 고통만큼…… 얻는 게 많을 겁니다.”
“좋은 비유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양우석 의원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그를 추궁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나도 한쪽 발을 담가야 할 개싸움 터였다.
끼이이익.
소문으로 들어 나도 알고 있는 강남의 조용한 한정식집.
듣기로 가격이 상당히 비싼 곳이다.
대한민국 상위 0.01%에 속하는 상류층들이나 즐겨 찾는 곳.
“어서 오십시오.”
주차장 안으로 들어서자 남자 종업원이 다가와 정중하고 고개를 숙였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예약하셨습니까?”
“13번 룸을 예약했습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종업원이 앞장섰다.
현관 입구에서 갈라져 올라가는 여러 방향의 계단.
그중에 한곳으로 이동했다.
철저하게 신분을 보호하기 위한 구조인 듯했다.
강남은 생각보다 더 요지경이었다.
비싼 땅 밑에 밀실 한정식집이 버젓이 존재했다.
“이곳입니다.”
두툼한 자동문 앞에서 선 종업원.
스르릇.
문이 열렸다.
그리고 보이는 또 다른 문.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종업원이 다시 고개를 정중하게 숙였다.
“회장님, 들어가시죠.”
한두 번 와본 듯 이번에는 양우석 의원이 앞장섰다.
“이런 곳도 있군요.”
“장사가 잘된다고 합니다.”
스치듯 쓴 웃음을 짓는 양우석 의원.
방음이 되는 두툼한 두 번째 문이 열렸다.
그리고 보이는 장면.
널찍한 탁자 위에 깔끔한 퓨전 요리들이 잘 차려져 있었다.
“하하. 어서들 오십시오.”
“의원님,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아니에요. 요즘 의정 활동 기간도 아니고…… 남는 게 시간입니다.”
마른 체격에 안경을 쓴 노년의 남자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한민국 국민들이라면 대다수 알고 있는 정치인.
4선을 넘어 한때 장관까지 했던 유명한 남자였다.
“회장님. 나국찬 의원님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오! 장 회장님. 소문 많이 들었어요. 나국찬입니다.”
나국찬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했다.
손이 차가운 남자였다.
“이렇게 불쑥 초대해서 미안합니다.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아서 양 의원에게 자리를 부탁했습니다.”
입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말에서 진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치인들의 말은 들리는 대로 믿는 게 아니라고 했다.
설사 야당 의원이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진짜 존경할 만한, 국민을 위하는 정치인이 드문 대한민국이었다.
“괜찮습니다.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요. 하하하하.”
나국찬 의원이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앉아요. 간단하게 술 한잔하죠.”
한 끼 식사에 1인당 수십만 원에 달하는 음식이 눈앞에 놓였다.
야당 국회의원 신분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 식사 자리였다.
다선 의원이라고 해도 입장은 다르지 않았다.
“영광입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나를 만나고 싶어 했던 이유가 궁금했다.
자리를 잡았다.
양 의원과 내가 나국찬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한 잔 들죠.”
나국찬 의원이 술이 담겨 있는 도자기 술병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조용히 잔을 내밀었다.
또로록.
맑은 술이 잔에 채워졌다.
특별히 제조한 안동 소주 같았다.
“양 의원도 한잔하지.”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양 의원이 제법 너스레를 떨었다.
“오늘 밤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이렇다 할 당적은 없었지만 합동민주당 지분을 상당히 갖고 있는 나국찬 의원.
“집사람 전화만 받게 해주시면 됩니다.”
“양 의원! 공처가구만.”
“와이프 사랑이 수신제가(修身齊家)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하. 맞아요, 맞아. 요즘은 안사람 눈치를 안 보면 크게 성공할 수 없어요.”
짧게 한담이 오고 갔다.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양 의원이 나국찬 의원의 잔을 채웠다.
“장 회장님,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잔을 내밀며 은근한 목소리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네오는 나국찬 의원.
“저야, 일개 사업가일 뿐입니다.”
담담하게 받아 넘겼다.
그런 나를 직시하며 씨익 웃는 나국찬 의원.
“…… 큰일 한 번 하셔야죠.”
큰일?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