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5장 예쁜 죽음. (702/1,284)

705장 예쁜 죽음.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긴급하게 소집된 연대자동차 그룹 심야 회의.

회장의 불호령에 그룹 사장단은 순간 움찔했다.

평소에도 다혈질인 전문구 회장 목소리가 유난히 쩌렁쩌렁 울렸다.

특히 오늘은 무슨 이유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는지 알기에 다들 바싹 긴장했다.

그동안 특별한 광고 한 줄 없었던 삼룡자동차 소형차 타볼리.

시장에 출시되자마자 대 이변을 일으켰다.

출시 당일까지 가격이 오픈되지 않았다.

철저하게 비공개로 준비되었던 모델이었다.

그간 특정 소비층을 노리는 광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인터넷과 SNS를 중심으로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자동차 전문 블로거들을 통한 초청 시승 홍보 방식이 통했다.

그들을 중심으로 만족스럽다는 입소문이 돌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하루만에 7200대가 계약됐다.

소비자 중심의 완벽한 마케팅이 승리한 셈이었다.

연대자동차 히트 차량도 하루 만에 이런 대박을 친 자동차는 없었다.

언론을 통해 공개되는 계약 수치는 어느 정도 과장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타볼리는 달랐다.

진짜배기였다.

“삼룡이 이를 갈았잖아! 오늘 계약된 7000대 전부 1주일 안에 공급된다는 게 말이 돼? 도대체 당신들 뭐 하는 사람들이야? 삼룡이 작심하고 도전해 오잖아! 가뜩이나 SUV로 시장이 개편되면서 소형차 부분이 죽을 쑤고 있는데…… 이제 결정타를 맞았어. 우리 연대 소형차 라인업은 출시 1년도 안 돼 문 닫게 생겼다고. 내가 삼룡을 우습게보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는데. 꼴이 이게 뭐야!”

전문구는 종일 술을 마신 듯한 얼굴처럼 낯빛이 불콰하게 달아올랐다.

한쪽에 앉아 있던 정진환 기획조정실 부회장이 그런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요즘 들어 혈압이 자주 치솟는 전문구 회장.

오늘도 주치의를 대기시켜야 할 듯했다.

“연대자동차 사장! 입이 있으면 말해봐. 타볼리가 그 정도로 대단해?”

“……아직 차량을 입수하지 못했지만 소문처럼 스펙이 좋은 것 같습니다. 최첨단 안전사양에 골격도 탄탄하고 전장 시스템도 최신형입니다. 그런 차를 2000만 원대에 출시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믿기지 않으면 어떡할 거야. 지금 눈앞에 현실이 됐는데!”

전문구는 답답한 듯 몰아붙였다.

“죄송합니다.”

핵심 측근인 연대자동차 사장이 고개를 숙였다.

“제철 사장도 말해봐. 도대체 삼룡자동차 강판 강성이 얼마나 대단한 거야?”

“……기본 프레임 인장 강도가 저희 소형차 라인업보다 두 배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강판 가격이 비싸지 않아?”

“가격도 문제지만 기술적으로 그 정도 강성은 파스코밖에 생산해 내지 못합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삼룡에 제공되는 강판 가격이 생각보다 저렴합니다. 저희 연대 제철에서는 단가를 맞출 수가…….”

“우리는 왜 안 되는데?”

“……죄송합니다.”

전문구 회장의 다그침에 제철 사장도 고개를 숙였다.

“아니 죄송 말고 다른 대답은 없어! 그동안 투자한 개발비는 다 룸싸롱에서 술 쳐마셨어? 파스코 연구원들도 많이 뽑아다 줬잖아. 그런데 왜 안 되냐고!”

전문구 회장의 호통은 계속됐다.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기초 철강 기술이 탄탄한 파스코와 달리 연대제철은 그렇지 못했다.

전문구의 작은 아버지가 망하면서 싸게 인수한 연대제철.

고로 생산 철강 강도 자체가 비교가 불가한 수준이었다.

같은 전기 고로라 하더라도 특허 공법이 달랐다.

IMF 당시 건설된 시설로 그만큼 낡고 노후됐다.

연대자동차에 공급하는 강판과 연대중공업에 제공하는 선박용 후판으로 연명하는 연대제철.

전문구는 그 사정을 다 알면서도 괜히 생짜를 부렸다.

“연대캐피탈 사장. 당장 내일부터 우리도 1% 저금리 상품으로 때려.”

“바로 실시하겠습니다!”

“아니……. 48개월 무이자로 해.”

과거 타 자동차 메이커들을 누를 때 사용하던 수법을 지시하는 전문구.

“회장님. 삼룡 신차 할부가 1.5%입니다. 별 메리트가…….”

연대자동차 사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국 금융위기가 끝나고 수출길이 제법 열렸다.

막대한 흑자를 바탕으로 연대자동차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럴 때 무이자 할부 같은 저가 출혈은 회사 이미지와 이익에 크게 득이 되지 못한다.

“소형차 포기할 거야?”

“아……닙니다.”

“까라면 까. 그리고 개발하고 있는 소형 SUV 어떻게 되고 있어?”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1단계 실증 차체가 내년 1월에 나올 예정입니다.”

“당겨.”

“네?”

“내 말 못 들었어? 출시일 당기라고! 자금과 연구 인력을 집중 투자해. 초장에 확실히 밟지 못하면 우리 자리 빼앗기는 거 몰라? 무조건 막아! 총력을 다해서 말이야!”

“넵!”

전문구의 지시는 전투적이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과거 젊은 시절의 용맹이 넘쳤다.

‘장태산. 이쪽 세계가 얼마나 무서운지 내 직접 가르쳐 주마!’

속초에서 느꼈던 패배감.

전문구는 속으로 전의를 불태웠다.

이대로 장강의 앞 물결처럼 장태산에게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

결코 녀석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자동차 업계는 전문구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삼룡에서 나온 신차가 파격적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준비가 된 기술들이다.

다만 대형차에 적응하고 중형차 소형차 순으로 팔아먹으려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요즘 소비자들이 연비 중심에서 안전중심으로 구매 심리가 바뀌었다.

소비자들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신기술……. 신차에 모두 적용해.”

“모두 말입니까?”

연대자동차 사장이 놀라서 물었다.

“페이스리프트 들어가는 차량에도 적용해. 가격도 동결하게.”

“노조가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진행해! 그 새끼들이 뭘 알아. 머리에 돈 귀신만 붙은 놈들이 경영을 하겠다고 나서니……. 그때 싹 쓸어버려야 했는데…….”

과거 전문구는 노조와 타협을 거부하고 쓸어버리자고 했다.

회사 덩치가 커지자 잉여 데모꾼들이 대학교에서 노조로 유입됐다.

노총을 앞세워 불법 파업을 밥 먹듯 했던 노조.

당장 수출길이 막힐까 봐 그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점점 도를 넘어섰던 노조.

당시 전문구가 정권의 힘을 빌려 노조문제를 처리하자고 했을 때 전준영 회장이 말렸다.

가난했던 시절 못 배우고 못 먹어서 그런다고 말이다.

그런 만큼 넉넉히 더 퍼주라고 말했던 전준영 회장.

전문구가 지금까지 두고 두고 가장 후회하는 결정 중 하나가 그때 고 전준영 회장의 뜻을 받아들인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 부회장. 탄소섬유 합자회사 어떻게 됐어?”

“준비는 거의 끝나갑니다. 유망한 중소기업을 인수했으니 내년쯤이면 생산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투자금은 들어왔어?”

“1차 투자금 10억 달러가 입금됐습니다.”

“차질 없이 진행해. 허투로 자금 사용할 생각 마. 합자회사가 어떤 곳인지 알지? 잘못하면 미국 법정에 서야 돼.”

“철저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요즘 일이 많다는 거 알아. 좋은 기회야. 그러니까 다들 정신 바짝 차려. 그만 둘 때 퇴직금 두둑이 받고 하청업체 감사 자리라도 얻고 싶으면 목숨을 걸고 일해. 그게 공평한 거야.”

“…….”

현실적인 전문구 회장의 말을 모두 인정했다.

기업의 임원 자리는 영원하지 않았다.

퇴직금 받는 순간까지 충성하라는 회장의 명령.

“그럼 다들 파이팅 하자고. 파이팅!”

“파이팅!!!”

그렇게 마무리 돼 가는 야간 회의.

전문구 회장은 피곤함도 잊은 채 열정을 불태웠다.

***

투둑 투두두두둑.

2013년 10월 31일…….

비가 내렸다.

이런 날 사랑하는 연인들은 한쪽 어깨를 적시며 데이트를 즐겨야 하는데,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장 대표. 자네만 만나면 비가 오는 것 같아. 우리가 천생연분인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날에는 회장님 대신 파릇한 다른 인연들과 술 한잔하고 싶습니다.”

“윤아…… 부를까?”

확 들어오는 임성철 회장의 한 수.

“……공부해야죠.”

“여름휴가는 잘 보냈나?”

“일찍도 물어보십니다.”

“윤아는 이역만리서 자네만을 오매불망 그리워하며 공부하는데…… 자네는 아닌 것 같아.”

“비즈니스 영역입니다.”

“그 비즈니스…… 부럽군.”

나에 대해 꿰뚫고 있는 임성철 회장님이 불편한 구석만 골라 쿡쿡 찔러왔다.

“회장님도 소싯적에 소문이 장난 아니었지 않습니까.”

“나 때와 요즘은 다르지.”

“지극히 주관적 사고방식이십니다.”

“딸 가진 부모가 되면…… 무슨 말인지 알 게야.”

은근한 질책.

이럴 때는.

“안색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산삼도 먹어보고 몸에 좋다는 의학 기술을 다 사용해 봤는데…… 아닌 것 같아. 이런 날 술 한잔 마시는 것도 겁이 나.”

용인에 위치한 임성철 회장의 별장.

신도시 개발이 절정을 찍고 있는 용인이었지만 별장은 조용했다.

측근들도 없었다.

임성철 회장의 그림자 같은 장한수 실장만이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이런 날에는 막걸리에 파전이 제격인데 말입니다.”

“소홀하다고 구박하는 겐가?”

“네.”

“크큿. 이래서 자네가 좋아. 감히 내 앞에서 숨소리도 못 내는 인간들만 보다가 장 대표를 만나면 힘이 나. 뭐랄까? 인생의 자극제?”

화가 난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하는 임 회장님.

그사이 많이 수척해졌다.

생명의 기운이 다해 가고 있었다.

천하의 부호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공평한 선물.

얼굴에 검버섯이 많이 늘었다.

선천지기가 다해 가는 만큼 피부 광택이 죽어갔다.

눈의 반짝이던 총기도 많이 흐려졌다.

그만큼 고민이 많았다는 의미.

생명 연장의 대가로 복종을 요구했다.

오정의 회장으로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일 게 빤하다.

그래서 시간을 줬다.

생각보다 길게 고민한 임성철 회장.

하지만 이제는 진짜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아무리 나라 해도 죽은 자를 살릴 수 없었다.

꿈속 할배처럼 역천의 거울을 사용할 레벨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술 한잔하시죠.”

“그럴까?”

치즈와 과일,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10월의 마지막 날에 내리는 비와 함께 마시는 술.

파전에 막걸리는 아니지만 나름 괜찮았다.

오늘은 나에게도 중요한 날이다.

또로록.

병을 잡고 잔을 채웠다.

“…….”

잠시 오가는 대화가 멈췄다.

이 자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임 회장님도 나도 잘 알았다.

“언제 봐도 부러워.”

나를 진짜 부러워하는 임성철 회장.

“뭐가 말입니까?”

“내게는 다시 오지 않을…… 청춘이.”

“선현들이 항상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젊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라고 말입니다.”

“……목전에 닥칠 때까지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의 귀중함을 몰라. 나 또한 그 범주의 인간이지.”

“그래도 회장님께는……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잔을 들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임성철 회장.

여전히 시선은 복잡했다.

임성철 회장에게 있어 일생에서 가장 큰 도박이었다.

생사가 걸린 것보다 더 중요한 도박판은 없었다.

“고맙네.”

잔을 내미는 임성철 회장.

팅.

맑게 울리는 잔의 부딪침.

가볍게 입을 축였다.

“쿨럭 쿨럭…….”

임성철 회장은 잔을 다 비우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와인이 목을 적시자 바로 몸이 반응했다.

생명의 기운이 다한 자는 어떤 음식물도 함부로 삼킬 수 없었다.

“얼마를…… 더 줄 수 있다고 했지?”

“10년입니다.”

“……쏘는 김에 더 쏘면 안 되겠나?”

“제가…… 신은 아닙니다.”

- 신이 되시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최저 할인 포인트를 적용받을 수 있습니다.

됐고!

날 신으로 못 만들어서 안달이 난 알림음.

“독해.”

“회장님만 하겠습니까. 저 같았으면 오래 고민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겁니다.”

“나이 먹으면…… 의심이 많아져.”

“이제는 결정하셔야죠.”

“채권자 같군.”

“이렇게 착한 채권자는 없습니다.”

길어야 두 달이다.

사신의 향기가 임성철 회장에게서 맡아지기 시작했다.

“장 대표.”

“네. 회장님.”

나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임성철 회장.

결단이 섰음을 알 수 있었다.

“예쁘게…… 죽여주게.”

회귀의 전설 2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