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3장. 공평한 휴가. (700/1,284)

703장. 공평한 휴가.

“캐갱캥캥.”

“쿠에에에엑!”

성벽 안쪽에서 연이어 들려오는 낯선 비명들.

쾅! 카가가강!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소음들의 합창은 몇 차례나 이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렉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미군 특수부대를 당장 호출하고 싶었다.

아무리 이곳이 한국이라 해도 FBI를 막을 수는 없었다.

주권 국가가 분명했지만 한국은 미국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각종 행정조치로 대한민국은 몇 달 안에 무력하게 만들 수도 있는 미국이었다.

“으음…….”

모사드 사무엘은 여전히 침묵을 고수했다.

차일드 가문의 경호원들은 더욱 느긋했다.

퍼붓는 빗줄기는 특수 제작된 슈트를 적시지 못하고 튕겼다.

방탄기능에 방수기능이 있는 실드로 제작된 덕이었다.

“…….”

그러던 어느 순간 기괴했던 소음이 사라졌다.

“아오! 미치겠네!”

그렉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상태로 성문을 노려봤다.

방탄 기능이 완비된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이봐! 지금은 어떻게 된 거야! 소음이 멈췄어!”

그렉이 감시 카메라를 향해 소리쳤다.

“…….”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이대로 있을 거야? 만약 VIP 신변에 문제라도 생기면 자네와 난 문책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거야!”

그렉이 사무엘을 자극했다.

“어차피 우리는 언젠가 다 신의 품으로 돌아갈 피조물들이야. 그런 일이라면 일도 아니지.”

“헛소리 좀 마! 지금 농담이 나와?”

“신을 섬겨.”

“미친…….”

고개를 내저으며 그렉은 특수 무전기를 불안한 듯 만지작거렸다.

여차하면 특수 부대에 진짜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끼릭.

그때 두툼한 문이 거짓말처럼 움직였다.

다들 잔뜩 긴장하며 열리는 문을 바라봤다.

스르르륵.

끝까지 활짝 열리는 문.

저벅저벅.

한 쌍의 남녀가 우산 하나를 들고 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헛!”

그렉은 신음을 삼켰다.

VIP는 멀쩡했다.

“다들 여기서 뭐 하시나요? 저희처럼 비오는 밤 산책 중이십니까? ……우산도 없이.”

다니엘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웃으며 물어왔다.

‘뭐야? 아무 일 없었던 거야!’

방금 전까지 요란하게 들려온 소음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다니엘은 멀쩡했다.

“이삭, 무슨 일인가요?”

로리아나가 가문의 경호팀장을 불렀다.

“죄송합니다. 좀 전에 있었던 소란스러운 소리에 다들 걱정이 되어서 달려왔습니다.”

“조금 시끄러웠죠? 갑자기 들개들이 침입을 해서 교육을 좀 했습니다. 다 끝났으니 들어가 쉬세요.”

다니엘이 아무렇지 않은 듯 이유를 설명했다.

‘이게 아닌데……. 분명 뭐가 있어.’

그렉은 뒤늦게 발동된 촉을 잔뜩 세워 다니엘을 탐색했다.

“그렉 님이시죠.”

“!!!”

다니엘이 그렉을 딱 찍어 보며 아는 체를 했다.

‘어떻게 내 이름을…….’

FBI 요원들은 모두 신분이 비밀에 부쳐졌다.

그런데 다니엘이 그런 그렉을 정확하게 호명하며 알아봤다.

“내일 보고서에는 ‘지난 밤 빗속을 걸으며 모두 함께 산책을 했다.’ 정도로 정리해 올리시면 될 것 같네요.”

다니엘의 말을 듣고 그렉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자신의 신분은 물론 비밀리에 보고서를 올리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 다니엘.

분명 자신들이 상대를 감시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사무엘님은 얼굴에 급사(急死)수가 보입니다. 당분간 이스라엘을 떠나지 마십시오. 과거에 깔아 놓은 적이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습니다.”

“!!!”

모사드 사무엘을 향한 다니엘의 반응도 마찬가지.

사무엘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의 신변을 이미 다 파악한 듯 친근하게 대화를 풀어내는 다니엘.

모사드는 FBI보다 더 보안 관리가 철저한 집단이었다.

그럼에도 다니엘에게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은 듯했다.

“로리아나. 우리 이제 그만 들어가죠.”

“그래요. 다니엘.”

로리아나가 다니엘의 한쪽 팔에 의지한 채 다시 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누구도 두 사람을 붙들지 못했다.

그르르륵.

야속하게 다시 닫혀 버린 문.

“사무엘……. 술 더 마시고 싶지 않아?”

“……위스키를 마시고 싶군.”

그렉의 말에 사무엘은 위스키를 찾았다.

어느 순간부터 느껴진 가까이 다가온 죽음의 향기.

매일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야 했기에 되도록 술은 멀리했다.

그러나 오늘 만큼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라도 술이 필요했다.

‘급사’라는 말로 정확하게 자신의 미래 운명을 짚어 내다본 다니엘.

술 없이는 오늘 밤을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투두둑 투두두두두둑.

그사이 더 거세진 장대비.

문 앞에서 쉽게 걸음을 돌리지 못하는 각국 요원들과 경호원들.

빗속에 서서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며 온몸을 뜨겁게 적셨다.

***

치이이이익.

달그락 달그락.

“으음…….”

귓가에 들려오는 조리도구 소음에 주설란은 긴 잠에서 깨어났다.

“깼어?”

옆에서 들려온 남편의 목소리.

“푹 잤어요. 온몸이 날아갈 것처럼 개운해요.”

“그렇지? 나도 이상하게 다른 날보다 더 개운하네. 어제 정신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신 것 같은데……. 왜 더 멀쩡하지?”

“태산이가 준 약술 마셨어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장대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스라엘에서 온 로리아나와 예고 없이 대작을 펼쳤다.

첫 잔은 원샷이라며 시원하게 막걸리 잔을 비웠던 로리아나.

좋은 술친구의 등장에 장대국도 오랜만에 기분 좋게 연거푸 잔을 비웠다.

장대비 내리는 소리를 안주 삼아 아내가 부쳐온 호박 부침개를 함께 곁들였다.

시원한 막걸리에 대작 친구가 함께하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아들과 쌍둥이들 모두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품에 끼고 있을 때는 몰랐지만 각자의 길로 떠나고 보니 늘 보고 싶었다.

아내처럼 서울 집을 들락거리지 못했다.

남자의 그리움은 쉽게 표현되지 않는 무게 있는 것이라 여겼던 시대를 살아온 장대국.

농사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거실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을 보는 일과 한잔 술에 그리움을 의탁하는 게 다였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아들과 함께 찾아온 특별한 손님.

한국말을 참 맛깔스럽게 구사하는 로리아나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딸깍 딸각.

부엌에서 계속 소리가 들렸다.

“그 아가씨가…… 요리하나?”

“그런 것 같아요. 아침…… 대접한다고 했잖아요.”

“참…… 참해.”

“깜짝 놀랐어요. 요즘 한국 처자들보다 더 예의가 발라요.”

“집안이 잘사는 거 같지?”

“금융업 한다고 했으니…… 먹고 살만 하겠죠.”

“태산이가 VIP라고 말하는 걸로 보아 제법 사는 것 같은데…….”

“귀티가 나잖아요. 좀 사는 집인가 보죠.”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뭘 말이에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부부가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정답게 오래 살아온 부부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태산이 짝이…… 누가 될 것 같아?”

“……그건 모르겠어요.”

“나도 골치가 아파. 마음에 드는 처자가 한둘이 아니니. 오정 임성철 회장님께 받아먹은 것도 있고…….”

머리가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는 장대국.

아들의 능력이 대견하기도 하면서 부담스러웠다.

“요즘 애들…… 누가 말려요. 알아서 하겠죠.”

“외국 며느리도 상관없겠지?”

“글로벌 시대에요. 우리도 넓게 생각해요. 태산이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요.”

“그래. 당신 말이 맞아. 태산이가…… 알아서 하겠지.”

장대국과 주설란은 솔직히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아직 이십 대 중반인 아들에게 결혼은 일렀다.

딱히 누구를 찍어 인연이다 말하지 않았다.

오고가는 처자들 모두 아들에게 호감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대신 당사자인 아들이 선을 긋고 대했기에 선뜻 나서지 못했다.

“아버지. 일어나셨어요?”

문 밖에서 태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그래…… 일어났다.”

“씻으시고 아침 식사하십시오.”

“그래. 나가마.”

장대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에 취해 잠들어 버린 탓에 차림은 지난 밤 그대로였다.

“나가요.”

“그래.”

끼릭.

거울을 보며 대충 얼굴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는 부부.

“???”

문을 나선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다.

분명 어제 술에 취해 쓰러질 때만 해도 집에 손님이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거실에는 낯선 외국 여성이 두 사람 더 늘었다.

화려한 금발의 다른 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활짝 웃는 미소가 시원시원했다.

장대국이 청년 시절 열렬히 사모했던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를 닮았다.

귀여운 미녀가 눈인사를 해왔다.

장대국과 주설란은 다급하게 눈으로 아들을 찾았다.

마침 부엌에서 나오는 아들.

“아들……. 이분들은…….”

장대국이 조심스럽게 거실에 있는 여인들의 정체를 물었다.

“안뇽하세요~ 미쿡에서 온 사라 요한슨입니다.”

사라 요한슨이 공손하게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바, 반가워요.”

장대국 부부 역시 얼떨결에 인사를 나눴다.

“비비안 발루아라 하요. 아부님……. 어무님. 프랑스에서…… 왔다요.”

어색하게 한국말을 사용하는 비비안이 활짝 웃었다.

“그래…… 반가워요. 비비안.”

다행히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주설란이 화답했다.

“어머님. 프랑스어를 잘하시네요. 헤에~.”

비비안이 귀엽게 웃었다.

“네…….”

주설란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색다른 아침 풍경.

“일어나셨어요. 아버님. 어머님.”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로리아나.

심지어 앞치마를 두르고 나타났다.

한 손에는 국자를 들고 있는 로리아나.

누가 보면 장씨 집안 맏며느리 같은 포스였다.

“태산아.”

장대국이 추가 설명을 부탁했다.

아들 덕분에 눈은 호강하고 있지만 정신은 혼란스러웠다.

“휴가 때문에 왔어요.”

“휴가?”

“네. 같이 휴가를 보내고 싶다고 해서요.”

“모두…… 같이?”

“다들 아는 사이에요. 그렇게 이상하게 보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구나…….”

고개는 알아서 끄덕였지만 장대국은 정신이 아주 복잡했다.

그때.

“아버님, 휴가 같이 가실 거죠?”

로리아나가 열렬한 눈빛으로 장대국에게 물었다.

“설마…… 외국은 아니지?”

장대국이 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세이셀에 로리아나 별장이 있어요. 부모님도 같이 가시죠.”

“세이셀?”

주설란이 되물었다.

장마비가 내리는 한국을 벗어나 휴가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머님. 제 비행가 타고 가시면 돼요.”

로리아나가 거들었다.

“무슨 소립니까요. 어미님. 제 비행기 타고 투게더…….”

한국어를 대충 알아듣고 사라 요한슨이 발끈하며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제 비행기 좋다요.”

비비안도 빠지지 않았다.

“태산아. 이 아가씨들…… 모두 자가용 비행기가…… 있어?”

설마하는 눈빛으로 묻는 장대국.

“네.”

“끄응…….”

장대국이 그만 신음을 흘렸다.

세상을 지금까지 살면서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상황.

집에 찾아온 아들의 인연한 여인들 모두 이 세상 사람들 같지 않았다.

마치 자가용 비행기 타고 가볍게 옆 동네 놀러가자는 듯 휴가를 이야기했다.

“사라, 내 비행기가 최신형이야.”

“무슨 소리야. 시스템은 내 게 더 좋아!”

“분위기는 제 비행기가…….”

세 사람은 답답했던지 영어로 재빠르게 대화를 이어갔다.

파바밧.

치열한 경쟁의 순간.

“다들 그만해요……. 제 비행기로 모실 겁니다. 이번 휴가는 공평하게~.”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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