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장. 어느 여름날.(6)
부우우우우웅. 붕. 덜컹 덜컹.
봉고차 한 대가 산자락을 따라 나 있는 농로 위를 달렸다.
짙은 선팅으로 차량 내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차량 안에 사람이 제법 탔는지 차체가 아래로 내려앉았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봉고차는 좁은 농로를 달리며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끼이익.
어느 순간 차가 멈췄다.
그르르륵.
거칠게 승합차 뒷문이 열렸다.
차자자작.
말없이 10여 명의 그림자가 빠르게 내렸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우비나 우산 따위는 챙기지 않았다.
대부분 허름한 복장의 특별할 것 없는 모습.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눈빛만 예리하게 빛났다.
몇몇은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러 제대로 인상을 확인하기도 힘들었다.
인근 농가 등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
그나마 특이한 것은 이들 모두가 다 아랍계라는 점뿐이었다.
그들 중 아무도 말이 없었다.
한적한 시골 산길인 데다 지나가는 인적이나 차량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은 선택된 신의 전사다.”
잠시 뒤 한 남자가 조용히 아랍어로 입을 열었다.
며칠 전 한국에 관광객 신분으로 입국했다가 사라졌던 압둘 라자르.
감정 없는 그의 말투는 차갑고 서늘했다.
“너희들의 죽음은 신께 향한 영광의 길.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라.”
“알라후 아크바르!”
낮게 깔린 음성으로 한목소리로 외치는 그림자들.
“무기를 챙겨라.”
덜컥.
승합차 짐칸 문이 열렸다.
철컹. 카앙.
특이한 모양의 각종 무기들을 손에 잡는 전사들.
“오늘 밤……. 신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압둘 라자르가 짙게 어둠에 물든 하늘을 올려다봤다.
쿠우우웅! 쿠구구궁!
대답이라도 하는 듯 번쩍이며 떨어지는 벼락.
장마전선이 북상하면서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가 굵었다.
“제물을 끌고 와라.”
압둘 라자르의 명령에 승합차 안으로 들어가는 전사.
“읍! 읍! 으으읍!”
손발이 묶이고 입에 재갈이 물린 중년의 남자.
승합차 차주인 남자가 끌려 나오며 발버둥 쳤다.
불법 체류자를 이송하는 브로커였다.
큰돈을 안겨 준다는 말에 이들 일행을 태웠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사달이 났다.
장주시에 진입하자마자 약속과 달리 돌변한 일단의 무리들.
몸을 억압하고 손발을 묶은 후 입술에 재갈을 물렸다.
“풀어줘라.”
촤자작.
재갈과 손발을 묶었던 끈이 풀렸다.
“플리즈! 플리즈!”
승합차 운전자는 바로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다.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숨소리조차 내지 않던 아랍인들.
남자는 그제야 이들 모두 범상치 않은 자들임을 눈치 챘다.
스윽.
승합차 운전자 얼굴에 날카로운 창끝이 닿았다.
가시처럼 예리하고 뾰족한 창 날.
“으으으…….”
“영광으로 생각하라.”
푸우욱.
주저 없이 뺨을 파고드는 창날.
“으아아아아아! 살려줘! 이 미친놈들아!!!”
푹! 푹! 푸부부북!
승합차 운전자의 비명을 신호로 그의 몸 이곳저곳에 박히는 무리들의 창과 칼날.
목을 꿰뚫은 두툼한 날에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숨이 빠져나가는 남자.
“크크크크크…….”
“케케케케.”
그림자들이 쏟아지는 피를 보며 웃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신들이 들고 있는 무기를 적시는 따뜻한 피를 혀끝으로 핥았다.
그리고.
“죽여라……. 거짓 신의 딸을 죽여 참 진리의 신을 영접하라!”
“알라후 아크바르!”
일단의 검은 그림자들은 한목소리로 ‘신은 위대하다’라고 외쳤다.
피를 부르는 의식에 한껏 고취된 피의 전사들.
사사사삭.
그리고 폭우가 쏟아지는 숲속으로 이내 사라졌다.
이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던 타깃의 행보.
본격적인 밤 사냥이 시작되고 있었다.
***
쿵!
아버지!
“음냐……. 음.”
간간이 음용한 성수로 간이 많이 좋아진 아버지.
그런 만큼 말술을 즐기시던 아버지가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눕고 말았다.
밥을 물리고 뒤이어 바로 차려진 술상.
곧장 대작이 시작됐다.
처음의 분위기는 좋았다.
속 시원한(?) 막걸리를 찾는 로리아나에게 흠뻑 반한 아버지는 바로 주류 창고를 개방했다.
일꾼들을 위해 항상 쟁여져 있던 막걸리를 양껏 풀었다.
생생하게 효모가 살아 있는 장주 생 막걸리.
바닥에 가라앉은 침전물을 섞지 않고 위에 뜬 맑은 막걸리만 따라 마셨다.
로리아나는 보통 한국 사람처럼 건배를 외치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속이 탔던 건지 모르지만 일단, 원샷.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며 좋다고 물개 박수를 치셨다.
사실 외국 미녀의 막걸리 원샷은 보기 힘든 장면이긴 했다.
어머니도 분위기에 취해 덩달아 막걸리를 마셨다.
자식들이 없는 넓은 집에서 적적하게 지내시며 언제부터인가 두 분은 좋은 술친구가 되어 있었다.
잔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갔다.
로리아나는 배시시 웃으며 ‘아버님~ 어머님~’을 입에 달고 안주까지 살뜰히 챙겼다.
그리고 결과는.
“괜찮아요?”
막상 로리아나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런 걸 입가심이라고 하더군요.”
아! 별걸 다 안다.
확실했다.
크리스 반스데일!
언어학자 반스데일이 야훼에게 언어 능력을 팔아먹은 게 분명했다.
“한국어는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확인에 들어갔다.
“신께 간절히 청하면…… 모든 게 이뤄지는 법이랍니다.”
로리아나! 그건 당신과 나 같은 사람들 얘기고!
일반인은 간절히 청하는 것은 기본이요, 엄청난 노력을 해야만 얻을 수 있다.
누누이 말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카르마 포인트 교환 법칙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과 신은 결코 거래하지 않는다.
“와인보다 맛있어요. 뭐라고 할까? 살아 있는 기운이 넘쳐요.”
로리아나가 생 막걸리 맛을 알아버렸다.
입에 묻은 막걸리를 혀로 쓱 훑는 로리아나.
고문이 따로 없다.
“선수 교체할 타이밍 같은데요?”
로리아나……. 당신을 어쩔 거야.
“부모님 눕혀드리고 오겠습니다.”
신빨이 술빨이었다.
선수 교체해도 로리아나는 절대 취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님을 안아 안방 침대로 옮겨 드렸다.
“큐어 포이즌.”
내일 숙취 제거를 위해 미리 마법을 걸었다.
파앗!
투명한 빛이 방 안에 터졌다.
알콜 기운이 마법에 의해 날아갔다.
“편안하게 주무십시오. 슬립.”
숙면 마법으로 마무리했다.
“맛있어요?”
“네.”
“한국 문화가 맞다니…… 다행입니다.”
조신한 규수처럼 주안상 앞에 다리를 옆으로 가지런히 접고 앉아 있는 로리아나.
“친숙해요. 과거부터 이렇게 해 왔던 것처럼.”
집안을 다시 둘러보는 로리아나.
“전생에 한국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전생을 믿나요?”
“로리아나가 야훼를 믿는 일처럼…… 당연한 겁니다.”
“야훼께서는 저의 전생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랬을 겁니다.
“뭐가…… 그랬을 거라는 거죠?”
로리아나 앞쪽에 앉았다.
그 순간 불쑥 고개를 앞으로 내미는 로리아나.
그녀의 입술에서 향긋한 주향이 풍겨왔다.
전통 막걸리 냄새도 와인향으로 바꿔버리는 여인의 마법.
“대부분 신들은 그들이 경험한 신계 법칙에 대해 인간들이 알게 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카르마 포인트 정산 방법처럼 말입니다.”
“……다니엘은 신들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나요?”
호기심을 보이는 로리아나.
“궁금해하지 말고 신의 말씀을 그냥 믿으세요. 그게 편합니다. 스스로 양심의 촛불을 밝히고 살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모두를 사랑하라는 보편적 진리를 일러주고 당부하는 신의 말을 따르는 것이 신상에 좋습니다.”
“흐음.”
내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 그녀.
“신들은 자신들을 의지하는 인간들을 좋아합니다.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고 선함을 따르며 정의로움에 의지하는 자들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대신 스스로 깨달음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들은 거친 들판으로 내몰아 강하고 굳건하게 성장시킵니다.”
“저는 따르기 쉽지 않은 말들이군요. 진리를 주신 자도 야훼이고 이 생명도 야훼의 것입니다. 깨달음 또한 야훼의 법 안에서 이뤄줘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요할 생각 없습니다. 종교가 지향하는 바는 사이비를 제외하고 모두 옳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얼마나 옳고 좋은 말씀입니까.”
지그시 나를 바라보는 로리아나.
“다니엘이 저와 같이 야훼를 수호하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로리아나가 갑자기 히브리어로 말했다.
그만큼 뜨거워지는 로리아나의 눈빛.
- 야훼가 당신에게 사도의 길을 제안합니다.
야훼 아저씨! 이건 아니잖아.
어색하지 않게 빙그레 웃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포인트를 강탈하던 야훼가 그제서야 미끼를 던졌다.
“난 나의 길을……. 그리고 로리아나는 로리아나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게 서로에게 도움이 됩니다. 결점이 없는 친구를 가려 사귀려 들면 평생 친구다운 친구는 사귈 수 없습니다. 저를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럼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로리아나.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였다.
로리아나인 동시에 야훼가 함께하는 그녀.
“산책하고 싶어요.”
야훼가 과한 욕심을 내려놓았다.
내가 만만한 인간이 아니리는 걸 그도 알게 된 셈이다.
“비 오는데…… 괜찮겠습니까?”
“운치가 더할 것 같아요.”
다시 한국말로 얘기하는 로리아나.
운치라는 말의 멋을 그녀는 알았다.
로리아나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촤락.
현관에 세워져 있던 우산을 폈다.
“여기 우산…….”
“친구 사이에…… 하나면 되죠.”
로리아나가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조용히 팔짱을 걸어오는 그녀.
쿵! 쿵!
심장이 제멋대로 나댔다.
제대로 작업 들어오는 로리아나.
야훼 아저씨! 그만해요. 이런다고 안 넘어 갑니다!
심장은 격하게 반응했지만 입가에는 고요한 미소만 번졌다.
“제가 비에 젖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요?”
촤아아아아아앗.
장마 전선이 올라온다더니 빗줄기가 꽤 굵어졌다.
마당 잔디에 쏟아지며 튕겨 올라오는 빗방울.
“이렇게요.”
우산을 받치며 밖으로 나갔다.
“실드!”
가볍게 펼쳐지는 마법.
“아!”
탄성을 터트리는 로리아나.
너무나 쉽게 마법을 사용하는 나를 보며 살짝 놀란 듯했다.
신성 마법과 결계를 달리하는 일반 마법.
투둑 투두두두둑.
우산에 닿기도 전에 알아서 빗방울이 튕겼다.
굳이 우산을 접지 않았다.
핑계는 많을수록 좋은 법.
그녀와 함께 나의 왕궁을 향해 걸었다.
해가 지면 왕궁은 철저하게 출입이 통제됐다.
성벽 위로 최신 감시 시스템이 작동됐다.
100명이 넘는 경호 인력이 가까운 야산을 비롯해 왕궁 주변을 상시 경호했다.
난공불락까지는 아니지만 웬만한 최전방 군 시설보다는 좋았다.
차박차박.
빗속을 걸으며 왕궁 안으로 뻗은 길을 걸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로리아나가 내 왕궁에 들어온 첫 손님이 되었다.
스티븐 매튜와의 대결로 시작된 왕궁 건설.
문득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당신의 왕궁은 참 매혹적이에요.”
로리아나가 걸음을 옮기다 석등에 반사되는 기와 저택을 쳐다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특히 서양인들에게는 신비롭게 느껴진다는 동양 건축이 갖는 매력의 진수.
“이 순간의 당신만큼이나…… 하겠습니까.”
난 솔직한 남자다.
야훼는 야훼고 로리아나는 로리아나였다.
날 바라보는 로리아나.
그녀의 눈빛이 물방울처럼 촉촉하게 젖어갔다.
손에 전해지는 그녀의 빠른 맥박.
이 타이밍은…….
살며시 어깨에 기대오는 로리아나의 얼굴.
빗속에서 그녀의 맑은 체취는 더욱 더 진해졌다.
찌리릿.
하지만 그 순간!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