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9장. 어느 여름날.(5) (696/1,284)

699장. 어느 여름날.(5)

스슥.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한 공간.

산 속을 헤쳐 나아가며 위장복을 입은 두 남자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손에 들린 특수촬영 카메라가 예사롭지 않았다.

울창한 여름 숲을 헤치고 나가는 폼이 거침없었다.

투두두두두둑.

때마침 내리는 빗줄기.

흙냄새와 나무 젖는 냄새가 진하게 풍겨 올라왔다.

한참 동안 산길을 두 남자는 묵묵히 걸었다.

그리고.

정상부근에 이르러 아래로 펼쳐진 숲을 내려다봤다.

“여기군.”

“대단하군요……. 이런 곳에 왕성이라니. 경복궁보다 더 큰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깜짝 놀랐다.

산 아래 높은 성벽으로 에워싸인 한옥 건물들.

수십 채 건물들이 만들어낸 광경은 웅장했다.

일정한 법칙에 의해 건축된 듯한 건물은 누가 봐도 경탄할 정도였다.

“이런 큰 공사가 진행됐는데…… 왜 소문이 안 났을까?”

“외국계 투자 기업 연구소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유 재산인데…… 함부로 침범하면 큰일납니다.”

“일단 찍자.”

“넵. 팀장님.”

카메라를 꺼내드는 두 남자.

이런 일에 익숙한 듯 행동이 빨랐다.

찰칵 찰칵.

카메라 불빛이 터지지 않음에도 셔터를 누르는 손에 망설임이 없었다.

모든 전경을 샅샅이 담았다.

“끝났습니다.”

“수고했어.”

“바로 갈까요?”

“그래야지. 여기 경비가 장난 아니다.”

“왠지 으스스합니다.”

“특수 교육까지 받아놓고 엄살이야.”

“비오는 밤 야산에 입산하는 건 별로입니다.”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어?”

“그거야 뭐. 그래야죠.”

카메라 렌즈를 닫고 두 남자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시려고?”

“헛!”

순간 두 남자는 귀신을 본 것처럼 놀랐다.

어느새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세 명의 사내들.

짙은 어둠과 구분하기 힘든 동색의 복장을 입고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다, 당신들 뭐야!”

팀장이라는 남자가 따졌다.

“당신들이 방금 찍은 곳을 담당하는 경비원.”

“!!!”

‘제길…….’

팀장의 표정이 죽상이 됐다.

최대한 발각되지 않고 현장 사진을 수집해야 했는데 일이 틀어졌다.

이 상황이 상부에 보고되면 문책을 당할 게 빤했다.

최소 징계도 교육행이다.

“공무 수행 중입니다. 비켜 주십시오.”

팀장과 같이 있던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공무 수행? 이런 야밤에 그것도 사유지 연구소를 찍는 게 공무? 국정원이라도 돼?”

버티고 선 3인 가운데 남자가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흠칫.

정곡을 찔린 야밤의 촬영자들이 몸을 떨었다.

국정원 2차장 소속 정보 요원들이었다.

상부의 지시를 받고 현장 촬영에 나섰다.

그런데 바로 발각됐다.

“맞네. 국정원.”

“특수 훈련 안 받았어? 야밤에 누가 그렇게 큰소리로 사담을 나눠? 내가 조교하던 시절에 걸렸으면 당신들 아웃이야. 크크크.”

“요즘 국정원이 국정원입니까. 흐흐.”

‘이 새끼들 뭐야?’

팀장 곽인태는 눈앞의 상황에 어이가 없었다.

발각된 건 어쩔 수 없지만 국정원 소속 신분임을 밝혔음에도 세 사람은 태연했다.

국정원이 과거와 달리 파워가 많이 약해진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민간인에게 이 정도로 무시당할 신분도 아니었다.

“알면 꺼져.”

팀원 오주환이 욱하는 성격을 드러냈다.

“사유지 침범 인정 안 하시네. 카메라 줘 봐요.”

“이 새끼들이 미쳤나! 우리 국정원 직원들이라고!”

곽인태가 버럭 호통을 쳤다.

“그래서 어쩌라고. 국정원 공무원들은 마음대로 개인 사유지 침범해 사진 찍어도 돼? 그런 특혜가 있어?”

“방귀 뀐 놈이 성질낸다더니…… 이런 때 쓰는 말이네.”

“크크크. 총질이라도 할 기센데요?”

세 명의 경비원들은 장난스럽게 국정원 직원들을 놀렸다.

스윽.

아니나 다를까 오주환이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국정원 직원들은 총기를 소지하고 다녔다.

“그 손 멈추지. 그렇지 않으면…….”

파앗!

말이 끝나기 무섭게 쏟아지는 강렬한 불빛.

“허억!”

“아!”

곽인태와 오주환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신음을 흘리며 두 눈을 부릅떴다.

***

“맛있어요!”

“미역국 잘 먹네. 시집가면 예쁨 받겠어.”

“먹성이 좋은 아가씨네. 어쩌면 젓갈도 그렇게 잘 먹어~”

부모님이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로리아나~ 도대체 곱빼기라는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 언어 능력을 팔아넘긴 알 만한(?) 신이 눈치를 봅니다.

아!

알 만한 신?

그가 누군지 감이 왔다.

그 와중에도 눈은 쉬지 않고 펼쳐지는 장면을 담았다.

오늘 몇 번째 입이 떡 벌어졌다.

로리아나, 숟가락과 젓가락질이 토종 한국인 저리 가라였다.

로리아나는 곱빼기 미역국을 금세 뚝딱 비웠다.

엄마가 발라주는 노릇한 굴비 살도 맛나게 찹찹 받아먹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낚지 젓갈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밥 위에 얹어 한입에 꿀꺽.

언제 먹어 봤다고, 쓴 도라지무침도 거침이 없이 먹어치웠다.

“어머니. 밥 한 그릇 더 주세요.”

어느새 밥 한 그릇 클리어.

“그래요. 밥 많으니까 더 먹어요.”

“태산 씨, 미역국 주세요.”

로리아나가 텅 빈 국그릇을 내밀었다.

“그러다 탈나요.”

로리아나의 먹성에 감탄을 넘어 이제는 우려가 됐다.

빵과 고기만 먹던 위장이 놀라지 않을까 심히 걱정스러웠다.

씨익 웃는 로리아나.

그래, 괜한 걱정이다.

신성 마법은 최고의 소화제가 아닌가.

“로리아나 양……. 지금 하는 일은 있고?”

찰나의 틈이 보이자 아버지가 참지 못하고 궁금한 걸 물었다.

“네. 집안이 금융 투자업에 종사하고 있어요.”

“금융 투자업, 좋지!”

아버지, 그 금융 투자업이 아버지가 생각하는 신협이나 농협 같은 게 아니에요!

임윤아에게도 속았던 아버지.

아버지가 아는 금융 투자업은 참 단순했다.

로리아나 집안을 아버지 수준으로 해석할 게 빤했다.

로리아나가 기분 나빠 지금 당장 어딘가로 전화 한 통 하면, 한국에 IMF 바로 찾아온다.

“집이 텔아비브 쪽인가 봐요. 이스라엘이 은근 금융 투자 쪽 강자더군요.”

엄마까지 아는 체를 했다.

“언제 놀러오세요. 이스라엘도 맛집이 많습니다.”

“그래요?”

“내일 아침은 제가 샥슈카를 준비해 보겠습니다.”

“샥슈카?”

아버지가 관심을 보였다.

“남자 전립선 건강에 좋습니다.”

“그, 그래요.……. 하하. 기대가 큽니다.”

샥슈카가 뭔지도 모를 아버지.

괜히 흥분하신 것 같았다.

토마토가 주재료인 남자 건강에 좋은 샥슈카.

아버지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기대를 하는 눈치다.

좌우지간 남자들이란.

“부모님은 뭐 하시나요?”

이제는 엄마가 본격적으로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모두…… 신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감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대답을 하는 로리아나.

“이런!”

“괜한 질문을 했군요.”

금세 안타까운 표정이 되어 버린 부모님.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모두 신의 품으로 돌아갈 신의 자식들입니다. 그 시기가 빨랐을 뿐입니다.”

“나이가 아직 어려 보이는데…… 기특합니다.”

아버지가 로리아나를 바라보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엄마도 조신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앉아 있는 로리아나를 따뜻하게 바라봤다.

속이 퍽퍽한 고구마를 먹은 듯 갑갑했다.

로리아나가 야훼와 직통으로 연결돼 있는 사제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

그녀가 받은 신탁 하나에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집어 질 수도 있었다.

로리아나의 말은 그냥 기특한 정도가 아니라 사실이고 진실이었다.

야훼가 작심하고 데려갔을 로리아나의 부모님.

로리아나가 크게 슬퍼하지 않는 진짜 이유였다.

“종교는 그럼…….”

“야훼를 따릅니다.”

“유태교, 좋죠. 태산이 뱃속에 있을 때 내가 탈무드 명언들을 태교로 읽어줬답니다. 그래서 우리 아들이 저렇게 번듯한 거예요.”

아버지 제발, 안 돼요!!!

나를 낳은 게 뿌듯하다는 듯 바라보는 아버지.

순간 머릿속에 지진이 났다.

그리고.

- 야훼가 태교 비용을 차감해 갔습니다.

순간의 빈틈을 야훼는 놓치지 않았다.

정작 나는 기억도 못 하는 태교 시절의 청구 금액.

어찌된 일인지 탈무드의 명언이 갑자기 떠올랐다.

- 자신보다 현명(賢明)한 사람 앞에서는 침묵(沈默)하라.

수천 년 세월을 묵어온 신 앞에서 난 한낱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도 야훼처럼 악착같이 푼돈도 아끼고 챙겨 살아남아야겠다고 말이다.

배운 것을 복습(復習)하는 행위는 죽은 지식으로 만들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몇 번이고 복습(復習)하다 보면 새로운 발견(發見)이 따라오기 때문에 행한다는 탈무드의 또 다른 명언.

이를 악물고 복습 또 복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특히 로리아나 앞에서는 침묵이 금이었다.

“태산 씨. 어디 안 좋아요?”

로리아나가 말이 없어진 나를 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로리아나 양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고 행복합니다.”

헛!

- 야훼가 행복의 대가로 포인트를 차감해 갔습니다.

이럴 때는 부처님 가르침이 최상이었다.

무념무상(無念無想).

일체의 생각을 끊었다.

일명 넋 빼기.

배시시 입가에 백치 미소가 자동으로 만들어졌다.

이제부터 난 감정 없는 바위요, 산이요, 물이였다.

“많이 먹어요. 집에 찾아온 태산이 손님들 중에 가장 복스럽게 먹는 거 같아요.”

엄마는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는 로리아나가 무척 사랑스러운 듯했다.

“네?”

위험한 호기심을 보이는 그녀.

“당신 말이 맞아. 그 누구야. 오정의 윤아는 먹는 게 부실해. 체격도 작은데…… 걱정이야.”

아버지! 스톱!

“오정그룹요?”

로리아나가 관심을 보였다.

살짝 거칠어진 말투에 담겨 있는 묘한 감정.

저건 질투?

이런 전개 위험했다.

오정그룹 역시 대단했지만 차일드 가문에는 그저 그런 넘치고 넘치는 하청업체 수준.

무념무상하던 마음이 극심하게 흔들렸다.

갑자기 임성철 회장님이 떠오르며 굉장히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밥 먹고 무심코 던진 몇 마디에 오랫동안 공고히 버텨오던 기업 하나가 공중분해 될 수도 있었다.

“밥은 클라라도 잘 먹었죠. 그리고 회사 여직원들도 그렇고요.”

후다닥 급한 대로 여러 여성들을 뒤섞어 등장시켰다.

“맞아. 클라라도 잘 먹었던 것 같아.”

“도희 양이 제육볶음을 그렇게 좋아 했어. 술도 잘 마시고.”

“…….”

대화를 곰곰이 듣고 있던 로리아나.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아버지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아! 뭔가 아주 불길했다.

그 순간.

“아버님……. 밥에 반주가 빠지면 안 되죠. 속 뻥 뚫리는 시원한 막걸리 없나요?”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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