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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8장. 어느 여름날.(4) (695/1,284)

698장. 어느 여름날.(4)

“아름답다. 역시 비행기는 크고 볼 일이야.”

“내가 1997년 초창기 때부터 근무했는데 청주공항에서 747을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청주공항 관제탑.

오늘 하루 동안 공항을 이용할 비행기를 모두 관제하고 난 뒤에 찾아온 커피 타임.

하루 25편 정도 관제를 하지만 오늘은 그 일도 일찍 마무리가 됐다.

주로 공항을 이용하는 제주도 행 비행기가 장마로 인한 제주도 기상 악화로 비행이 캔슬됐다.

기상 악화가 가져온 휴식에 관제사들은 주기장에 계류된 747을 보며 감탄했다.

공항을 공군과 같이 사용하고 있어 활주로가 두 개임에도 이착륙 대형 민항기는 제한을 받았다.

다른 국제공항보다 길이와 폭이 짧아 747 같은 대형 비행기가 취항하기 용이하지 않았다.

그동안 인천이나 김포, 김해공항 같은 활주로가 긴 곳에만 착륙했던 747기종.

듬직한 동체를 바라보며 관제사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몇 년 후면 이곳에서도 볼 수 있겠죠?”

“요즘 정치인들이 사력을 다하고 있으니까 믿어봐야지.”

청주 국회의원들과 시장이 공항 활주로 공사를 추진 중이었다.

활주로가 좀 더 길어지고 폭이 넓어지면 747이 아니라 에어버스 대형 기종도 착륙이 가능했다.

한 발자국 더 공항이 발전해 나아가는 일이 관제사들의 기쁨이었다.

“그런데 저 비행기 타고 온 여자분…… 누군 줄 아십니까?”

“몰라. 이스라엘 총리 딸이라는 말도 있고…….”

“무슨 소리야. 총리가 와도 미군 전투기들 그렇게까지 호위 안 해. 내가 보기에는 최소……. 오바마 이스라엘 여자친구 정도는 돼.”

“에이. 미국이 그렇게 만만한 국가가 아니지 말입니다.”

“진짜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스라엘 국적기 달고 미국 전투기가 왜 호위해? 공군 병사들 조금 전 비상 떨어진 것 못 봤어? 지금도 철통 경계다.”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은 비상근무 상태였다.

병기 창고에 있어야 할 장갑차들과 대공포들이 포장을 걷고 본래 모습을 자랑했다.

공군 병사들 또한 총을 든 채 활주로 바깥에 포진했다.

딱 봐도 준전시 상황.

관제사들은 오늘 상황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전달받지 못했다.

VIP 여객기는 군에서 직접 관제를 통제했다.

삐이잇.

그때 관제탑 호출이 울렸다.

- 국토부 항공정책실 권기택 실장입니다. 응답 바랍니다.

“엑? 실장님이?”

“갑자기 무슨 일이시지…….”

국토부 2차관 바로 직속인 항공정책실의 대장.

관제탑에 근무 중인 항공교통 관제사들이 모두 긴장했다.

모두 다 국토교통부 소속 공무원들이었고 그들 우두머리가 바로 권기택 실장이었다.

“청주공항 관제탑 선임 관제사 정길용입니다.”

- 수고가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실장님!”

정길용은 기합이 바짝 들어갔다.

관제 업무는 규율이 엄격했다.

작은 실수 하나가 대형 사고로 연결됐고 국제 문제로까지 불거질 수 있었다.

-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 8시간 뒤에 미국에서 747 비행기가 도착할 겁니다. 공식 공문이 내려가겠지만 불편함이 없도록 해주세요.

“???”

관세사들이 권기택 실장의 말을 듣고 서로 번갈아가며 눈을 맞췄다.

군 쪽이 아니라 국토부를 통한 연락.

“아, 알겠습니다.”

졍길용은 대답과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씩 인천이나 김포국제공항 기상 악화로 청주공항으로 회항하는 비행기들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국토부가 직접 움직일 만큼의 거물이 오는 게 확실했다.

- 아! 그리고 10시간 뒤에 프랑스 국적 747 기종 자가용 비행기가 착륙할 겁니다. 그쪽도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세요. 프랑스 정부 쪽 부탁이 있었습니다.

“!!!”

연달아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권기택 실장.

- 나라의 국격 문제가 달렸습니다. 만전을 다해 주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길용 관제사가 듬직하게 대답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오늘 하루 청주공항 역사상 가장 버라이어티한 날이 될 것 같았다.

한 대도 아닌 세 대의 개인용 대형 여객기가 착륙하는 날은 김포 공항 쪽도 드문 일이었다.

APEC 같은 국제 정상회의 때문에 각국 주상들이 방문할 때나 벌어지는 일.

-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관제탑과 연결된 직통 통화가 끝났다.

“이거 실화냐?”

“으으. 나 실장님 전화는 처음 받아봅니다.”

“운항과 과장님 전화만 받아도 심장이 뛰는데…….”

“어! 계류장 자리 남았어?”

“남아 있긴 한데……. 747 세 대가 가능할까요?”

관제탑에서 보이는 항공기 계류장.

청주공항 계류장은 세 대까지 보관이 가능하다.

덩치 큰 747 기종이 들어차 있을 걸 생각하니 한없이 작아 보였다.

“안 되는 게 어딨어. 비비고 들어가면 돼. 안 되면 이중 주차라도 해야지.”

“흐흐흐. 웃깁니다. 비행기들의 이중 주차라…….”

“웃음이 나와? 지금부터 비상근무야! 활주로 안전 점검하고 시스템 점검해! 실장님이 국격 문제라잖아.”

잠깐 찾아온 여유를 뒤로하고 바짝 예민해진 정길용 수석 관제사.

“충성!”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관제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 활주로 정비팀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 강 중령님. 새떼가 없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

오! 마이 갓!

로리아나,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로리아나의 한마디에 그대로 얼어붙은 부모님.

서양 미녀의 ‘아버님. 어머님. 인사 받으십시오’.

두 분이 입을 떡 벌렸다.

나도 무방비 상태에서 당했다.

로리아나가 한국말을 이렇게 능숙하게 구사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저 참한 규수 같은 자태는 또 뭔가!

야훼라는 신, 은근 속이 좁았다.

포인트 계산도 박한 양반이 저렇게 자신의 종을 호락호락 내 줄 리가 없었다.

야훼 솔직히 말해 보쇼!

나한테 원하는 게 뭐요?

“그러니까……. 하하하.”

아버지가 당황해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미녀를 좋아하는 이유가 아버지 유전자 탓인 것 같다.

아버지는 로리아나의 미모와 공손함에 금세 함박웃음이 됐다.

“어서 와요. 한국말을 어쩜 그렇게……. 너무 잘해서 깜짝 놀랐어요.”

엄마도 어색한 얼굴 표정을 풀고 미소를 머금었다.

언어는 국적을 초월하게 만드는 힘이 존재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리아나, 생각보다 참 예의 발랐다.

누가 가르쳤는지…….

- 야훼가 예절 교육비를 청구해 수령해 갔습니다.

“!!!”

누구 마음대로 포인트를 강탈해 가는 거야!

칭찬도 함부로 못 할 것 같다.

로리아나는 움직이는 시한 포인트 폭탄.

흐뭇했던 마음과 얼굴에 번지던 미소가 싹 사라졌다.

“어서 들어와요. 아직 저녁 식사 전이죠?”

“오다가 비행기 안에서 먹었다고…….”

“감사합니다. 배가 많이 고팠습니다.”

로리아나…… 당신 이런 캐릭터 아니잖아!

집으로 오는 도중 권한 음식은 배부르다며 사양했던 로리아나였다.

그런데 부모님 앞에서는 배시시 웃으며 배가 고프다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태산아, 멀리서 손님 모시고 오면서 간식도 안 드렸어? 오다 보면 호두과자집도 많은데……. 남자가 눈치가 없으면 요즘 같은 세상에 장가가기 힘들어.”

아버지! 저 억울합니다!

“태산이도 실수할 때가 있어야죠. 너무 완벽하면 매력 없어요.”

엄마……. 그게 실수가 아니라…….

로리아나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시선을 보냈다.

“태산 씨가…… 바빴던 것 같아요.”

아니 차일드 가문 아가씨, 그러는 거 아니죠!

처음 볼 때 느꼈던 로리아나의 순결하고 고결했던 이미지가 확 깼다.

야훼를 모시는 절대 가문의 정통 후계자.

말 한마디로 웬만한 나라는 며칠 만에 탈탈 털어먹을 수도 있는 그녀가 프로처럼 내숭으로 무장했다.

아무리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이건 유죄다!

“들어와요. 이것저것 준비한다고 했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VIP 손님이라고 먼저 연락을 드렸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세상에서 로리아나만큼 조심해야 할 위험한 여성은 없었다.

내가 아무리 자본의 규모를 키운다 해도 로리아나에게는 상대가 안 됐다.

그녀가 마음먹는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나의 흔적을 지워버릴 수도 있었다.

“날이 아직 더워요. 어서 들어와요.”

아버지는 영혼까지 이미 홀딱 넘어갔다.

조신하게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바꿔 신는 그녀.

하늘색 시원한 투피스 정장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천사가 따로 없었다.

그러니 아버지 눈에는 오죽하겠는가.

“태산 씨도 들어와요.”

다니엘이라고 부르던 그녀가 나의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발음했다.

로리아나…….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배시시.

한창 아름답게 핀 여름 장미 같은 로리아나의 살인 미소.

“비가 오려나 습기가 많네요. 어서 들어가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름다운 여성의 한 자락 미소는 세상을 파멸에서 구할 수도 있는 절대 무기 중 하나.

로리아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워요…….”

로리아나는 통 넓은 창이 인상적인 개량 한옥 거실이 마음에 들었는지 감동에 젖었다.

“누추하지만…… 편하게 있다 가요.”

엄마, 겸손할 필요 없어요.

로리아나 눈에 우리 집은 참으로 검소하고 소박해요.

로리아나의 진짜 신분에 대해 두 분은 전혀 짐작도 못 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 자금의 반절이 그녀 가문을 통했다.

모르긴 몰라도 IMF도 로리아나 가문에서 심심풀이로 일으켰을 것이다.

“그림에 담겨 있는 감성이…… 소녀 같아요. 어머니를 닮았는데…… 맞죠?”

“호호. 그렇게 보여요?”

로리아나, 당신의 진화는 도대체 어디까지인 거야!

단박에 엄마의 마음을 사로잡는 로리아나.

그럴수록 나는 심각했다.

이 정도라면 이미 내 주변에 로리아나가 심어 놓은 첩자가 있을 수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은밀하고 손속이 잔혹한 모사드를 종처럼 부릴 수 있는 로리아나다.

엄마의 그림 화풍에 대해 미리 파악한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 야훼가 신실한 종의 순수한 마음을 의심하는 당신에게 서운함을…….

야훼 형! 우리 그런 사이 아니잖아!

서운하면 포인트! 알지?

- 야훼가 감정 위로비로 포인트를 듬뿍 차감해 갔습니다.

세상 이치를 아는 놈이 더한 법이다.

최상급 신이 분명한 야훼가 코 묻은 나의 소소한 포인트를 강탈해 갔다.

따질 수가 없다.

누가 봐도 합리적인 포인트 강탈.

정신줄 바짝 붙들어야 할 것 같다.

“태산아. 뭐 해?”

“네?”

“로리아나 양 배고프다잖아. 엄마 도와서 국 퍼야지.”

“네…….”

“어서 앉아요. 차린 게 없지만…… 많이 들어요.”

아버지가 자리를 권했다.

“감동이에요. 아버님~.”

“흐흐. 우리 집사람이 한 요리 합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한식 좋아해요?”

“이런 귀한 요리는 태어나 처음이에요.”

짝!

떠억!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저 놀라운 말주변을 봐라.

사라나 다른 이들이 이 상황을 목격했다면 반응이 나와 같았을 것이다.

차일드 가문의 주인이 일개 가정집 한식을 보고 격찬했다.

쓰리 스타 미슐랭 요리사들도 아무 때나 고용해 간식 만들어 먹고 사는 로리아나.

아주 손뼉까지 치며 좋아라 했다.

먹음직스런 한우 갈비찜에 고기와 버섯, 야채가 조화롭게 참기름에 버물려진 잡채.

격식 제대로 갖춰진 신선로를 비롯해 육전에 각종 전과 나물까지.

20여 가지에 달하는 반찬이 상 위에 펼쳐졌다.

명절 차례상 정도 되는 푸짐한 한상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로리아나의 신분을 감안하면 조촐한 한 끼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로리아나는 과하게 기뻐했다.

야훼에게 제대로 교육을 받고 방문한 게 분명했다.

스륵.

엄마의 특기인 소고기 미역국을 그릇에 담았다.

산모용 최고급 돌미역과 특등급 양지로 우러난 뽀얀 국물이 베이스가 된 미역국.

보기만 해도 입맛이 확 돌았다.

내가 아무리 요리를 잘해도 엄마 손맛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할까?

사랑과 헌신의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끝판왕 음식?

“로리아나, 미역국 먹을 수 있어요?”

외국에서는 미역 같은 해조류를 즐겨 먹지 않았다.

날 지그시 바라보는 로리아나의 시선.

당연히 그녀의 입에서는…….

“없어서 못 먹어요. 곱빼기로. 콜?”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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