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5장. 어느 여름날.
‘갑자기 이게 무슨…….’
공수진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퇴근 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JS로펌에 들렀다.
중앙지검 형사부에 배정된 공수진.
업무상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었다.
정치 검사들이 넘쳤다.
공정한 실력보다는 아부와 정치인에 빌붙어 비열하게 연명하는 검사들 대부분은 여자와 돈에 환장을 했다.
공수진을 상대로 집적거리는 놈들이 그새 한둘이 아니었다.
말로만 듣던 검사들의 현실세계.
영화와 소설에 그려지는 판보다 더 심각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회식 자리 같은 곳에서 신체적 추행을 당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한순간 허리를 휘감기는 일도 허다했다.
위계질서가 철저한 상명하복의 조직인 만큼 대놓고 저항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공수진은 지검에서 가장 외모가 출중했다.
매순간 적절하게 대처했지만 그럴수록 노골적으로 더 접근해왔다.
술이 진하게 한 잔 마시고 싶었다.
조직 관계자들과 마시는 폭탄주 말고 정이 넘치는 사람들과의 한 잔 술.
간간이 JS로펌에 오면 고향 같았다.
언니 같은 권주희와 듬직한 오빠 같은 신덕수.
가끔 로펌에 모습을 보인다는 정체 모를 인간 장태산까지 모두 마음에 들었다.
로펌 변호사들도 하나같이 모두 연수원 동기들.
마음 놓고 수다를 떨다 보면 검사로서 받은 스트레스는 금세 털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공수진은 직진 고백을 해온 신덕수가 다시 보였다.
정확히는 몰라도 가슴을 뛰게 하는 매력이 느껴졌다.
평생 자신을 품 안에서 보호해 줄 것 같은 듬직한 덩치도 오늘따라 눈에 확 들어왔다.
초면에 느꼈던 인상과 달리 촌발이 모두 없어지고 세련된 도시남이 된 신덕수.
짧게 잘라 단정하게 뒤로 넘긴 헤어스타일도 괜히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능력도 괜찮았다.
어느 순간부터 연수원 상위권 그룹에 안착했던 신덕수.
사투리도 사용하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여자에 대한 기본 배려심도 장착돼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
쿵! 쿵! 쿵!
결혼 얘기가 나오자마자 미친 듯 심장이 뛰었다.
눈에 콩깍지가 씌인 것처럼 그 순간부터 신덕수가 멋있어 보였다.
‘펜트하우스에 빌딩, 법무부 장관…….’
그렇게까지 속물은 아니었지만 한 번뿐인 인생에 욕심이 많았던 공수진.
그녀의 눈앞에 그려지는 화려하고 안정적인 비전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온 만큼 돈의 소중함을 잘 알았다.
흙수저로 살아온 인생이니만큼 권력의 무서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걸 한 방에 해결해 준다는 장태산의 제안.
진작 그의 마음을 얻는 것은 포기했다.
자신과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남자라는 걸 공수진은 알았다.
그리고 오늘 뜻하지 않게 신덕수와의 결혼 얘기가 나왔다.
장난처럼 시작된 일임에도 싫지 않았다.
지금도 자신만을 뜨겁게 바라보는 신덕수.
“무슨 일 있어요?”
스마트폰을 들고 영어로 통화하며 조용히 자리를 비운 장태산.
외국 여성에게 전화가 온 것 같았다.
“장 변은 항상 바빠. 누군지 몰라도……. 마음이 보살 수준은 되어야 할 거야.”
권주희가 장태산의 뒷모습을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형님은 무조건 잘되실 겁니다.”
그에 반해 신덕수는 우직했다.
“수진아. 오늘부터 1일 해라. 이런 기회 쉽게 오는 거 아니다. 다 때가 있고 운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인생 선배 권주희가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우리 사귑시다.”
신덕수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공수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파밧.
공수진은 신덕수와 눈을 마주쳤다.
어차피 평생 혼자 살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아!”
그 순간 공수진의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신덕수와 자신을 꽁꽁 묶고 있는 붉은 실.
“그래요……. 우리 사귀어요.”
공수진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제가…… 평생 지켜드리겠습니다.”
부드럽게 공수진의 손을 잡아오는 신덕수.
‘그래……. 이 사람이 운명이라면.’
비어 있던 마음 한켠이 거짓말처럼 신덕수 덕분에 꽉 차오는 것 같았다.
Destiny!
공수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
“한국에?”
방금 들어온 극비 보고에 사라 요한슨은 크게 놀랐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그녀가 낯선 아시아로 이동 중이었다.
태어나 한국에는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그녀.
“설마…….”
사라 요한슨은 달력을 확인했다.
7월의 마지막 주.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날을 피해 휴식의 시간을 갖는 시기.
“이건 반칙이지.”
사라 요한슨의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휴가를 위해 사라 요한슨 역시 1년을 참 열심히 살아왔다.
가뭄의 단비처럼 만남을 가졌지만 그럴수록 더 갈증이 났다.
그런데 자신보다 늦게 인연이 된 여인이 머리를 썼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사라의 뒤통수를 친 귀여운 친척.
“내가 가만히 있으면 바보지. 오늘부터 나도…… 휴가야!”
전의를 불태우는 사라 요한슨.
삐이잇.
인터폰으로 비서를 호출했다.
- 네, 이사님.
“지금 이 시간부로 저 휴가에요.”
- 네? 휴가요?
“그렇게 알고 나머지 업무는 뒤로 미루거나 캔슬해 주세요.”
-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갈 생각이니 전용기 준비해 주세요.”
생각할 틈도 없이 빠르게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사라 요한슨.
- 지금요?
“네. 지금 당장.
- …….
평소와 다른 사라 요한슨의 행동에 비서는 당황했다.
언제나 철두철미하고 무엇보다 일을 먼저 생각했던 사라 요한슨 이사.
월가 쪽에서 겨울의 마녀라는 별명을 획득한 사라 요한슨이 오늘따라 감정적으로 행동했다.
“로나. 나 바빠요.”
-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사라 요한슨은 비서를 재촉했다.
“옷은 한국에 가서 구입하면 되겠지. 화장품도 마찬가지~.”
갑작스런 휴가에 한층 들뜬 사라 요한슨.
미련 없이 서류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휴가보다 중요한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결단을 내렸다.
***
끼이이이익.
검은색 대형 SUV 몇 대가 청주공항 주차장에 급하게 멈췄다.
타다닥.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인상의 백인들이 차에서 내렸다.
블랙 슈트 차림에 하나같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꼈다.
보통 사람들이 아닌 듯 그들이 풍기는 아우라가 날렵하고 기세도 날카로웠다.
“협조는?”
앞 차량에서 내린 남자가 뒤에 내린 남자에게 상황을 물었다.
“청와대 안보실에서 확답을 받았습니다. 공항에 특수 경찰 타격대와 17전투 비행단 소속 경비병들을 지원하겠다고 합니다.”
“민간 여행기는?”
“이 시간 이후 착륙 예정인 기체는 없습니다.”
“그럼 주변 통제해.”
“옛써!”
한국에 근무하는 FBI 요원들과 미국 대사관 소속 무관 경호원들.
그들 일행이 청주공항에 파견을 나왔다.
인원은 대략 20여 명.
‘갑자기 이 무슨 난리야.’
미국 대사관 무관 신분과 동시에 FBI 한국 팀장인 그렉은 갑자기 하달된 지시에 당황했다.
1년 전 한국으로 파견을 나왔다.
한국 대통령부터 시작해 중요 정치인들과 인사들에 대한 보고서 작성이 주업무였다.
그런 그렉이 오늘은 경호 업무를 위해 현장에 나왔다.
미국 대통령 국빈 방문 시에서나 있을 법한 상황.
워싱턴 화이트하우스에서 직접 내려온 지시 때문이다.
쇄애애애애앳.
머리 위로 미군 소속 전투기들이 기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르르르르륵.
평소에는 공군 기지 주변에 배치되는 한국군 장갑차들이 공항 주변을 경호했다.
공군 소속 경비단 병사들이 공항 곳곳의 방어지역을 차지했다.
처저저저적.
공항 특수 경찰들이 무장 상태로 공항 내를 경비했다.
끼이이이익.
이스라엘 대사관 차량 두 대가 모습을 보였다.
‘휘이~ 정말 대단해.’
이스라엘 모사드 한국 파견 지부장이 나타난 것을 보고 그렉이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렇게 궁금했지만 얼굴 한 번 볼 수 없었던 사무엘 지부장.
“그렉! 오랜만이군.”
“사무엘, 이런 곳에서 볼 줄 몰랐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사무엘은 주변 경비 상황을 살폈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공항이 작군.”
사무엘이 사방을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국제공항이야. 747 정도는 착륙할 수 있어.”
그렉은 이곳에 오기 전 청주공항에 대해 알아봤다.
분단국가 한국의 특별한 상황을 이유로 민간과 군이 합동으로 공항을 사용했다.
활주로는 2개.
대형 여객기가 겨우 착륙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인천공항이 안전하고 좋은데…….”
“그분 뜻이라고 들었어.”
특정인에 대한 말이 나왔지만 두 사람은 구체적으로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부담이 되는 이름.
미국 대통령을 흔들 수 있는 세상의 진정한 주인.
갑작스럽게 한국행을 통보해 왔다.
일본에 정박 중인 7함대 소속 항공모함이 훈련을 빙자해 긴급 해상 경계에 투입됐다.
이동해 오는 중에도 미국 호위기들이 따라 붙었다.
에어포스 원과 비슷한 수준의 경호를 받았다.
청주공항은 삽시간에 철통 경비 구역이 됐다.
그래도 불안한 듯 사방을 경계하느라 눈이 바쁜 그렉과 사무엘.
“무슨 일 있어?”
“나도 모르지만 엄청난 VIP가 입국하나 봐.”
“여기 근무하고 처음 있는 일이네.”
“핸드폰 사용도 금지됐어.”
“……먹통이야.”
공항 상주 직원들은 각자 자리를 지키며 숨을 죽였다.
오후에 청주공항을 통해 입출국할 민간 비행기는 없었다.
민간인이 전혀 보이지 않는 청주공항.
쿠우우우우우우.
상공에서 평소 청주공항에서 보기 힘든 대형 비행기 보잉 747-8I가 랜딩 바퀴를 펴고 착륙을 시도했다.
평소에 737시리즈가 주로 애용하는 국제공항에 덩치 큰 깡패가 나타났다.
구구구구구구구굿.
4개의 대형 엔진이 감속하며 공간을 울렸다.
콰그그그그그그그.
베테랑 조종사의 솜씨인 듯 부드럽게 활주로에 안착하는 여객기.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국기가 꼬리 날개 부분에 선명하게 도색되어 있다.
“가세.”
“긴장되는군.”
최대한 조용한 경호를 부탁받았지만 둘 다 그럴 수 없었다.
자칫 작은 사건 하나라도 발생하면 미래를 보장받기 힘들었다.
부우우우웅.
그때 한 대의 빨간색 스포츠카가 공항으로 들어왔다.
검문검색을 통과하고 공항 출입구 주차장으로 들어온 스포츠카.
“뭐야?”
그렉이 사무엘을 보고 물었다.
“……말조심해.”
“응?”
“우리들쯤은 그냥 날릴 수 있는 존재야.”
“그게 무슨…….”
그렉이 의구심 가득한 시선으로 묻는 사이.
끼리릭.
스포츠카가 그들 앞까지 달려와 멈췄다.
딸깍.
문을 열고 나온 젊은 동양인 남자.
“헛!”
그렉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지금껏 자신이 감시하고 보고했던 대상 중 최우선 순위의 인물.
그 남자가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설마?”
그렉이 사무엘을 쳐다봤다.
“맞아. 다니엘을 만나기 위해…… 그분이 오셨어.”
“으음…….”
지금쯤이면 상부에 자신의 넥타이핀에 설치된 특급 송신기기를 통해 현재 상황이 실시간으로 보고되고 있을 것이다.
“다들 수고가 많습니다.”
FBI와 모사드 요원 앞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다니엘 장.
선글라스로 눈빛을 감춘 채 당당하게 공항 안쪽으로 들어갔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