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0장. 독립운동.(3)
“다들 모르고 계셨습니까?”
“요즘 일이 바쁘다보니…….”
“죄송합니다. 법안 처리가 마지막에 몰리다보니…….”
파라다이스 호텔 일식 식당 VIP룸.
반종현 조국일보 사장과 국회의원 전운택, 리앤장의 손대균이 급하게 회동 자리를 가졌다.
갑자기 일본에서 들어온 클레임.
오늘의 회동 주제자인 아소 마토가 3인을 나무라듯 채근했다.
“대사님. 이런 법안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VIP가 세상 돌아가는 걸 모릅니다. 국민들이 경제 성장에 관심이 많다보니 활성화 방안이랍시고 측근 여당 의원들이 잘 모르고 제출한 것 같습니다.”
반종현이 아소 마토를 살살 달랬다.
조국일보가 국민들의 지탄 속에서도 흑자를 유지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일본 기업들의 전폭적인 광고 밀어주기의 혜택을 받았다.
일본과 연관 있는 한국 내 기업들도 압력을 받아 조국일보 지면에 광고를 실었다.
단가는 비쌌다.
일본에 필요한 기사를 제공하고 그에 따른 수수료를 따로 챙겨 받았다.
그렇게 들어온 자금은 모두 반씨 일가의 비자금이 됐다.
“전 의원님은 뭘 하셨는지…….”
“원내대표가 아닌지라 소관 상임위 법안 처리하기도 박찹니다. 그리고 법안 처리 시기에 지역구에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전운택은 쩔쩔맸다.
한국 국회의원이었지만 아소 마토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정치계에 입문했지만 정치 생명을 이어갈 만한 돈이 충분치 않았다.
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아소 마토가 귀신같이 거액을 후원했다.
여당 원내대표는 상당한 돈을 곳곳에 뿌려야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법안이 통과됐지만 시행 세칙이 제정되지 않았습니다. 이 법안 자체로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꼼꼼하게 법안을 살피던 손대균이 의견을 내놓았다.
“법안 자체를 총리 각하께서 언짢아하십니다. 일한 우호에 방해가 되는 법안입니다.”
“어떤 부분이…….”
아소 마토가 언짢은 심기를 드러내자 반종현이 물었다.
“법안 대부분이 모노즈쿠리 기본법안과 똑같습니다. 이 법안은 대놓고 우리의 우정을 깨트리겠다는 전쟁 선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소재 부품 분야는 우리 일본이 맡고 한국은 제품 제조를 맡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총리께서는 한국의 의중을 묻고 계십니다. 가뜩이나 독도 문제로 시끄러운데…….”
아소 마토는 맛깔나게 차려진 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세 사람을 번갈아보며 추궁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확히 알아보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전운택이 고개를 숙였다.
“칼럼이나 기자들을 통해 법안 통과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뿌리겠습니다.”
반종현도 나름의 방안을 내놨다.
“법안이 통과되었기에 폐지는 힘들 것 같습니다. 몇몇 통제되지 않는 언론사에서 좋은 법안이라 기사를 낸 상황이라 수정하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조국일보 여론을 주도하고 전운택 의원님이 그에 맞춰 시행 세부 수칙 제정에 반대하면 될 것 같습니다.”
손대균이 담담하게 대응 방안을 제시했다.
“……이런 작은 실수가 일한 우정을 금 가게 만들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모두들 유념해 주십시오.”
아소 마토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말투는 지시하는 입장에 있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노여움을 푸십시오.”
반종현과 전운택은 아소 마토와 눈을 마주치며 화를 풀어주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뒤처리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이제 한잔하시죠.”
손대균이 먼저 술을 권했다.
‘이랬어……. 과거부터 이랬어.’
행동과 달리 손대균은 마음이 착찹하고 무거웠다.
아버지 때부터 계속됐던 이런 술자리.
현재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었지만 한국민으로서의 자존심을 팔아야 했다.
오늘따라 뼛속 깊이 와 닿는 친일의 그림자.
다른 이들에게 드높았던 자신의 자존심마저 일본 앞에서 바닥에 깔았다.
“손대균 이사 말대로 한잔하시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하하하.”
또로록.
반종현이 술을 따랐다.
“총리님께 말씀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결코 일한 우정에 위해가 되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과거부터 쭉 그래왔고 말입니다.”
전운택은 듣기 좋은 달콤한 말을 흘렸다.
모두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손대균.
술잔을 잡고 있는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 녀석은 다 알고 있었어. 우리의 이런 행태를!’
문득 장태산이 떠올랐다.
이 구차하고 비열한 행위를 그는 모두 알고 있었다.
손대균 자신이 친일파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진심으로 대했다.
상류층 깊숙이 뿌리 박혀 있는 거대한 친일파의 어두운 그림자.
언론과 정치권력, 법조계 전반이 일본이 짜놓은 거미줄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속절없이 참담함이 짙게 밀려왔다.
한 발자국 뒤에서 바라보며 충고하던 장태산.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뒤를 이을 후손들에게 미안했다.
아버지 때부터 오염돼 버린 친일파의 더러운 피.
그런 상황을 다 알고 있던 장태산은 손대균에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마지막 참회의 기회를.
“오늘 2차는 제가 준비했습니다.”
“오! 손 이사님!”
“하하하. 손 이사님이 분위기를 안다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대사님.”
평소와 달리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손대균.
‘더욱 더 깊이…… 악이 악으로 끝나지 않고 극선이 되는 그날까지……. 장태산 네 말대로 따라주마. 부디…… 내 대에서 이 악연을 끊어다오!’
장태산은 분명 말했다.
그에게는 악을 선으로 탈바꿈 시키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손대균은 속으로 결심했다.
어둠 속에서 빛을 꿈꾸는 자가 되겠노라…….
***
“로템 인수 자금과 지분은 넉넉히 드렸잖습니까. 더 요구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너구리같은 녀석.’
전문구는 속이 탔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장태산의 속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이곳까지 찾아온 진짜 이유를 뻔히 알 것이다.
천금 같은 시간을 낸 자신을 속초까지 불러내고도 모르는 척하는 장태산이 괘씸했다.
그러나 전문구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동생 집안 문제로 악연의 고리부터 걸고 시작됐다.
그 고리를 풀기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이 따라야 한다는 걸 알았다.
더욱이 로템 매각 얘기 때 큰소리를 쳤던 전문구였다.
그게 불과 얼마 전인 것을 감안하면 이렇게 빨리 다시 아쉬운 입장이 될 줄은 몰랐다.
장태산은 계산이 깔끔했다.
로템 지분 정리는 약속대로 착착 진행됐다.
그럼에도 목이 많이 말랐다.
대한민국에서 오정과 연대, 엘자와 NK, 랏데는 언제나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다.
서로 물고 뜯어 빼앗으며 오늘의 그룹 규모를 일궜다.
작금에 와서야 어느 정도 선이 정리됐다.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키며 유지했다.
5대 그룹 간에 선을 넘는 전쟁이 터지면 국가가 개입해야 할 정도로 사건이 커졌다.
과거처럼 정부에 의해 강제 조정 되고 싶지 않았다.
서로 앞뒤 가리지 않고 부딪치면 중국 기업만 득을 본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런 암묵적 약속이 지켜지는 판에 장태산이 나타나며 유지되던 선이 흐트러졌다.
엘자를 통해 미래 연대자동차의 적이 될 테슬러에 배터리가 공급됐다.
볼부와 삼룡의 미션을 몇 년 만 필요로 한다고 말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다.
“왜 그러나. 다 알면서.”
전문구는 본심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 성격상 꽁꽁 싸매는 걸 싫어했다.
“설마 엘자 배터리 때문에 그러십니까?”
굳이 설마라는 말까지 붙이며 물어보는 장태산.
‘무서운 녀석.’
심리전의 고수였다.
자존심을 세웠다가는 물회에 막걸리만 마시고 떨어져야 할 판이다.
“테슬러는 우리 경쟁 기업일세. 엘자 배터리 사업 미국 진출이 장 회장 작품인 걸로 알고 있네만.”
“엘자 배터리 성능이 좋지 않습니까.”
“신제품이라고 하더군. TS큐셀에서 개발한.”
“기업 특급 보안인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놀란 척하지만 사실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는 장태산.
엘자 배터리 사업부에 제공됐다는 TS큐셀 신제품 배터리.
연구를 끝내고 상용화 단계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시 한 번 사과하지. 내가…… 지금껏 여러 가지로 미안했네.”
장태산에게 사과를 하는 전문구.
본격적인 얘기를 하기에 앞서 사과가 먼저 전제되어야 했다.
전문구 인생에 아버지 말고 이렇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 상대는 없었다.
자존심 같은 건 다 내려놓았다.
“……일단 받겠습니다.”
“고맙네.”
“그런데 제가 회장님께 드릴 게 없습니다. 배터리는 엘자에서 모두 생산하기로 했습니다.”
“기회를 공평하게 주면 좋겠네. 엘자와 계약하겠네.”
전문구도 눈치는 빨랐다.
무턱대고 욕심을 내다가는 판이 엎어질 게 뻔했다.
내연 기관 독립도 얼마 전에야 이뤄졌다.
연대의 자동차는 일본 기술 하청으로부터 시작했다.
엔진도 마찬가지.
불과 몇 년 전까지 일본 기술을 사용해 엔진을 제작했다.
새로 제작한 엔진은 문제가 있었다.
그걸 처리하기도 벅찬 순간에 미래 사업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전기차는 배터리와 전장 장치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의 장치는 중국 기업도 쉽게 따라했다.
오정도 전기차 부분에 대한 투자 규모가 확대됐다.
하루아침에 판이 바뀌는 세상이 확실했다.
어제의 강자가 오늘을 버티고 내일까지 숨을 쉴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배터리 계약 문제는 알아서 하십시오. 전 일개 투자자일 뿐입니다. 이익이 많이 남을수록 좋습니다.”
“대한민국 기업이 살아남아야 국민들에게 일자리가 돌아가네.”
“또 귀족 노조 키우시게요?”
“…….”
장태산은 아픈 부분을 사정없이 찔렀다.
“어쩔 수가 없네. 그들은 을 같지만 사실은 갑이네. 과거와 달리 내수와 수출 규모가 달라. 하루만 라인이 멈춰도 기업 이익이 곤두박질쳐.”
“힘 뒀다 뭐 하십니까? 해마다 임금 협상을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미국처럼 4년마다 협상하도록 법을 개정하십시오. 임금 협상 몇 달 하고 나서 몇 달 쉬고 다시 임금 협상이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장태산의 팩트 폭력은 기습적이었다.
“그 조항을 건들면 연대가 문제가 아니라 노조들이 대규모 총파업을 할 걸세. 이미 그들은 기득권이 됐네. 정부도 함부로 할 수 없어.”
“어려울수록 정공법으로 가야 하는 법입니다. 연대 같은 대기업은 일개 사주나 노조가 주인이 아닌 전 국민이 소유자인 겁니다. 국민들이 애국심으로 구입하는 부분이 있어 오늘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조가 진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각종 자동차 커뮤니티 들어가 보셨습니까? 귀족 노조라고 말하면 벌떼처럼 직원들이 달려와 소비자를 공격합니다.”
“나도 통제가 불가능해. 마음대로 생산 라인도 못 잡아.”
전문구가 스스로 인정하는 가장 아픈 부분이었다.
“그래서 해외 공장을 건설하셨지 않습니까.”
“국내에서 만들고 싶어도 인건비를 맞출 수가 없어. 소비자는 가격이 오른다고 뭐라 하고 노조는 퍼 줘도 퍼 줘도 임금이 적다고만 하니…….”
꿀꺽 꿀꺽.
답답한 듯 막걸리를 단숨에 비워내는 전문구.
연대자동차 노조는 분명 아킬레스건이었다.
“생산성은 계속 떨어지고, 근무 중에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는 노조원들이 정상입니까? 하청 업체와 계약직 직원들의 피만 짜내며 근근이 유지해 가다가는 언젠가 크게 후회하실 겁니다.”
“다 내 업이려니 하네.”
답답했지만 전문구는 화를 내지 못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빠져나갈 수도 빼 낼 수도 없이 같이 굴러가고 있는 판이다.
회사가 망해 사라지기 전에 노조가 스스로 변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연대는 투자하기가 꺼려집니다.”
“으음…….”
전문구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을 잡는 노조.
이미 포털 세상에서는 귀족이라 불렸다.
과거의 열악했던 근로 환경과 배고팠던 시절에 투쟁하던 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권력에 욕심을 내는 노회한 정치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저렇게 완고하다면…….’
전문구는 오늘 물회와 막걸리 한 잔 얻어 마신 것으로 끝내야 할 듯했다.
“하지만.”
그때 장태산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
“회장님. 독립운동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뜬금없이…… 그게 무슨.”
“언젠가 이 나라에 독립운동이 국민의 취미가 되는 날이 올 겁니다. 그 때를 위해…… 제가 투자를 하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농처럼 뱉으면서도 뼈가 담긴 듯한 장태산의 말.
“그…… 독립운동……에서 내가 뭘 하면 되겠나?”
포기하려 했던 순간 배팅된 투자.
귀가 솔깃해지며 궁금증이 일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씨익 웃는 장태산.
그리고.
“……탄소섬유 개발. 연대에서 맡아주십시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