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5장. 미래 경영(3).
‘백조…….’
고연지는 장태산의 말을 속으로 되새겼다.
눈앞에 보이는 듯한 이미지.
세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엘자 그룹의 상황이 훤히 떠올랐다.
영광을 안겨주던 사업들이 하나 둘씩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특히 무선 사업부는 스마트폰 등장 이래 빠르게 추락하고 있었다.
오정이 호기롭게 아이펀에 맞설 때 엘자는 제자리에서 멍하니 지켜만 봤다.
이미 스마트폰이 대세를 탔을 때에야 두 발자국 뒤에서 사업에 뛰어들었다.
의사결정이 빠르지 못했던 결과가 불러온 폐단.
하루 사이에도 급변하는 세상에서 엘자는 항상 반 박자 이상 뒤쳐졌다.
시장을 선점해야 시장의 50%를 먹는다는 경영 법칙에서 늘 예외였다.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엘자의 부끄러운 속살.
그룹 경영에 참여하면서 고연지는 많은 걸 깨달았다.
밤늦게까지 꺼지지 않는 본사의 불빛.
생계와 꿈을 위해 자신의 청춘을 그룹에 바치는 대다수 직원들.
아버지 고자룡 회장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자꾸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정처럼 선도적 기업에 합류하기에는 엘자 그룹의 행보가 무거웠다.
미묘했던 그 문제를 캐치하고 있는 장태산.
“중국에 대규모 LCD 단지를 조성했더군요.”
“어쩔 수 없는 사업 확장입니다. 중국은 그만큼 큰 시장이니까요. 직접 들어가 싸워야 점유율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악수(惡手)입니다.”
“악수요?”
“중국은 비밀리에 차세대 공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년 후에는 공장을 헐값에 넘기고 나와야 할 겁니다. 노하우와 인력 모두 다 포함해서요.”
“말도 안 됩니다! 아직 중국은 그럴 만한 기술력이 없습니다!”
고광문이 발끈했다.
“BOE는 중국 국영 기업입니다. 정부 투자금이 수십조가 넘을 겁니다. 엘자가 쫓아갈 수 있겠습니까?”
“수십조는…….”
고광문이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느 시점부터 중요 연구 인력들이 하나둘씩 퇴직을 하고 있다.
그리고 퇴직 사원들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붙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암암리에 그들의 손에 의해 빼돌려진 핵심 자료들이 많을 것은 짐작하지만 눈을 감아야 했다.
자칫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면 중국에 벌려 놓은 사업 모두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법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욕심의 끝을 모르는 돼지입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옛 성인들의 유물이 됐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짓도 서슴지 않을 겁니다.”
장태산의 생각은 냉철했다.
“엘자는 LCD 분야 세계 1위입니다. 결코 쉽게 따라올 수 없습니다. 첨단 기술은 중국에게 아직 벅찬 수준입니다.”
고광문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1.5년.”
짧은 장태산의 한 마디.
‘1.5년? 설마?’
고연지는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내년에는 1.2년. 뿐만 아니라 철강은 1.0년 바이오는 1.1년 로봇은 0.9년 등등. 중국은 이미 우리 등 뒤에 바짝 와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월가의 투자자들과 함께 조사한 내용입니다. 로버트 라이언, 아십니까?”
“……음.”
로버트 라이언의 이름이 언급되자 고광문이 입을 다물었다.
장태산의 말을 아주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엘자 연구서 보고서에도 이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수치까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인공지능 부분 같은 미래 산업 분야는 중국이 이미 추월을 시작했습니다. 관련 법안과 산업 생태계가 받쳐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 산업 분야까지 추월을 허용한다면……. 대한민국은 제조업 공동화 현상이 발생할 겁니다. 양질의 일자리는 사라지고 과거처럼 하청업체로 전락하게 될 겁니다. 중국과 일본의 발바닥을 핥은 형국이 되겠죠.”
충격적인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장태산.
“앞으로 몇 년 후면 중국의 산업 추격과 더불어 미국은 천문학적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보호무역의 벽을 높일 겁니다. 일본은 자신들을 위협하고 추월한 대한민국을 견제하기 위해 산업 네트워크를 끊고 말입니다.”
마치 미래를 점치는 자처럼 말하는 장태산의 태도.
“WTO 아래 자유시장 경제체제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전세계 산업들은 네트워크로 유기적 생명체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런 일이…….”
“치킨게임 안 해 보셨습니까? 오정이나 엘자도 치킨게임으로 일본 기업들을 누르지 않았습니까. 과거에 공격자였다면 이제는 방어하는 입장이 되신 겁니다. 더군다나 상대는 말도 상식도 통하지 않는 중국입니다. 몇 년 후가 되면 중국은 이빨을 드러내고 치킨게임을 시작할 겁니다. 처음에는 LCD로부터 시작해 시장을 석권한 뒤 엘자가 준비하고 있는 유기발광다이오드까지 침범할 겁니다.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기는 한 겁니까?”
“…….”
고광문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다 알고 있어. 그것도 확신적으로!’
구체적 수치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경제 전략까지 꿰뚫고 있는 장태산.
다시 그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거짓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돌고 도는 게 세상 이치입니다. 대한민국 경제 역시 과거 선진국들의 전유물이었던 석유와 자동차, 반도체 같은 산업에서 경쟁력을 쌓아 성장해 왔습니다. 영원히 1위로 살 거라는 착각에 빠지면 핀란드 거대 공룡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승자독식 미래 산업의 특성입니다.”
귀에 쏙쏙 박히는 냉정하고 차분한 설명.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고연지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고연지도 장태산이 하는 대부분의 말이 피부에 와 닿았다.
“경영은 시장의 불확실성을 극복하며 미지의 항로를 개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판에서는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어제의 적과 오늘의 친구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두 분도 잘 알 겁니다.”
또로록.
장태산이 잔에 소주를 채웠다.
자음자작하고 있었지만 고연지와 고광문은 소주병을 잡지 않았다.
거인을 상대하고 있는 느낌.
또로록.
꿀걱.
답답한 듯 고광문도 자신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그럼 엘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투자자 입장에서 냉정하게 나아갈 바를 짚어 주십시오.”
어느새 순댓국은 차갑게 식어 더 이상 김이 나지 않았다.
반면 고광문의 눈동자에서는 불이 붙은 듯 열기가 느껴졌다.
아직 좌절하기에는 일렀다.
대책이 있기 때문에 장태산이 얘기를 꺼낸 거라 생각했다.
의사도 처방을 내리기 전에 이것저것 병증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게 보통이다.
‘아프지만 방법이 있다고 했다. 오늘 반드시 들어야 해.’
아버지 고자룡 회장이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엘자의 약점.
어느 정도 대응책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장태산에게 다른 처방이 있을 것이었다.
“열정적이십니다.”
장태산이 고광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엘자는 제 할아버지 손에 태어난 기업입니다. 상속문제로 제가 마지막 고씨 성씨의 총수가 될 거라 예상합니다. 그런 만큼 절실합니다. 조금 전 말했던 양질의 일자리에 엘자가 공헌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수없이 들었습니다. 부자가 된 자는 마땅히 경주 최씨 가문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도 그 말에 동감입니다. 그룹의 총수라면 마땅히 직원들 복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엘자는 살아남아야 합니다. 고언 부탁드립니다. 장태산 대표님!”
고광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엘자 그룹 내에는 가까운 벗들도 입사해 일하고 있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 수 없었다.
사실 그룹 총수라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었다.
남들보다 잘 먹고 잘 사는 대신 신경 쓸 일이 무수히 많았다.
“나도 듣고 싶어. 엘자를 위한 거라면 뭐든지.”
고연지도 눈을 반짝였다.
다른 그룹에 비해 총수 일가에 대한 혜택이 많지 않은 그룹.
그래서 더 엘자가 좋았다.
세상에 당당하게 외칠 수 있을 만큼 떳떳했기에 엘자의 딸이라는 명함도 기꺼이 사용했다.
그런 엘자를 지키고 싶었다.
“고언이라……. 이미 고자룡 회장님께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변화는 없었습니다. 제게 엘자는 전혀 매력적인 상품이 아닙니다.”
“장 대표님. 엘자를 떠나 대한민국을 도와주십시오!”
진심이 느껴지는 고광문 전무의 부탁.
그런 고광문을 지그시 바라보는 장태산.
“도와드리면……. 제게 뭘 주시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는 장태산.
“누가 뭐라고 해도 전 투자자입니다. 손해 보는 장사는 사양합니다.”
***
“…….”
말문이 막힌 오누이.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몇 년 뒤면 총수가 되는 고광문 전무.
아직은 여러모로 부족했다.
그런 만큼 기대는 컸다.
고자룡 회장과 달리 오픈 마인드를 가진 그의 성품이 느껴졌다.
엘자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만은 않았다.
현재로서는 점점 침몰해가는 거대한 배와 같은 엘자.
고자룡 회장과는 함께 갈 수 없었다.
임성철 회장과 사고방식이 사뭇 달랐다.
단단하고 고집스러웠다.
카르마를 써서 그의 목숨을 늘려 줄 수도 없었다.
고집이 센 만큼 원하는 바를 딜 하는 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까지 영향이 미칠 수 있는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일.
전후를 살펴 잘 선택해야만 했다.
“제가 삶에 적용하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지난 생을 살면서 깨달은 호구 신세가 되지 않을 인생 진리들.
“한순간의 감정으로 인한 어떤 결정을 금한다. 언제나 준 만큼 못 받는다. 사람 관계에 있어 큰 기대는 금물이다. 눈치는 어느 정도 없는 척하는 게 편하다. 내 약점을 절대 말하지 않는다. 말할까 말까 고민할 때는 입을 다문다. 모든 사람이 날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돈이 거래된 관계에서 상대의 진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증권맨 시절 눈칫밥으로 깨달은 삶의 노하우들을 좀 풀었다.
오늘 이 자리가 나름 특별하다는 의미다.
“오늘은 원칙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살살 달래줘야 할 때.
내 입장에서도 이들이 필요했다.
“제가 정에 약합니다. 술을 마셨더니…… 감정적으로 변했습니다. 투자자로서 인간 고광문 전무님과 연지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이왕 입을 열었으니 결과까지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는 돈 문제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될 겁니다. 고광문 전무님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미끼를 여러 개 던졌다.
오늘은 통발로 굵직한 고기를 잡을 생각이다.
고광문과 고연지가 눈을 끔뻑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두 사람 모두 감동에 찬 모습.
“부족한 사람입니다. 어떤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광문 전무는 겸손한데다 예의도 발랐다.
차기 그룹 회장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옹고집에 속을 알 수 없는 고자룡 회장과 많이 달랐다.
“전 투자자입니다.”
“……. 엘자에 투자해 주실 생각이십니까?”
“상품이 나쁘지 않다면 투자해야죠. 엘자라는 이름이 세계에서 가볍진 않으니까요.”
오정에 점점 밀리는 형국이지만 엘자도 엄연히 글로벌 브랜드.
TS를 비롯해 내가 소유한 기업들의 네임 벨류와 레벨이 달랐다.
또 오정의 다음 대 후계자인 임준형은 경영자로서의 철학을 완고히 갖춘 자라 함께 사업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어떤 투자입니까. 지금까지 말했던 것으로 보아 기존 사업 분야는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역시 고광문은 똑똑했다.
이런 점 때문에 그를 직접 보고 투자할 마음이 생겼다.
“스마트 팩토리 사업을 생각 중입니다.”
“스마트 팩토리!”
적잖이 놀라는 고광문.
속을 훤히 들킨 듯한 표정이다.
제품 설계부터 시작해 개발과 재료.
차후 물류까지 모든 생산과정에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해 디지털 자동화 솔루션을 완성하는 지능형 공장.
생산성뿐만 아니라 품질과 고객 만족까지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생산 공정의 혁신이 바로 스마트 팩토리였다.
엘자가 준비 중인 차세대 먹거리 사업.
아직 사물 인터넷이 발달하지 못해 개념적으로 설정만 되어 있을 것이다.
그걸 내가 파고들었다.
“미래 경영의 핵심은 혁신입니다. 지금 엘자에 필요한 가장 필요한 덕목입니다. 그리고 전 스마트 팩토리 사업에 투자할 생각입니다. 엘자라는 이름에 말입니다.”
“…….”
입을 벌린 채 고광문은 말을 잇지 못하고 나를 쳐다봤다.
고연지는 아직 이야기의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개념이었다.
“그게 끝이 아닌 것 같은데……. 맞습니까?”
당연하다.
스마트 팩토리는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엘자를 키워보는 건엔 예전부터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마음만 먹는다면 지배구조가 좀 복잡한 엘자를 삼키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지주회사 지분을 대량 매입하고 대주주 한두 명 정도 섭외하면 끝날 일.
“엘자의 이름을 사용하지만 엘자 그룹의 영향력이 없이 여러 사업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투자 금액은 최소 100억 달러 이상. 대표로…… 연지를 생각 중입니다.”
“헛!”
“나, 나를?”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