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8장. 리처드 요한슨.(2)
“아빠가 다니엘을?”
월가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던 사라 요한슨은 깜짝 놀랐다.
갑작스런 다니엘의 미국 방문.
지난번 와이너리에서 오바마를 만났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한국에서 이런저런 사건이 많아져 당분간은 미국 방문이 힘들다고 했던 다니엘.
갑자기 미국에 온 것도 놀랐지만 아빠인 리처드 요한슨을 만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미국 상원의원은 한가하지 않았다.
임기는 6년이고 단 100명밖에 인원이 되지 않았다.
대통령도 눈치를 보는 미연방의 핵심 권력자였다.
거기에 더해 리처드 요한슨은 차일드 가문의 방계를 대표하는 수장이다.
직계들도 미국에서는 방계들과 협의해야만 했다.
야훼바트인 로리아나의 대척점에 서 있는 리처드 요한슨.
다니엘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빅 이슈였다.
리처드는 백인 순혈주의를 고집했다.
선거구도 미국 공화당 강세 지역.
다선의 상원의원이 갖는 영향력은 엄청났다.
그런 리처드 요한슨 상원의원이 다니엘과 만남을 갖는 건 여러 의미를 내포했다.
“테스트? 그것도 아니면…….”
사라와 다니엘의 관계를 아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됐다.
한두 번은 속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몇 번의 만남과 몇 번의 뜨거웠던 데이트.
사라는 다니엘이 좋았다.
과거처럼 정치 경제적 문제로 정략 결혼하던 시절도 아니다.
아빠와 다니엘의 만남이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복잡한 심정이 됐다.
“하아아…… 미치겠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사라 요한슨.
아빠가 워싱턴에서 직접 LA로 왔다.
당장 찾아가 볼 수도 있지만 지금은 기다릴 때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남자 대 남자로서의 만남.
사라는 착잡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빠, 다니엘을 화나게 하지 말아요. 그는 길들일 수 없는 야생마에요.”
***
“리처드 요한슨 상원의원을요?”
“네. 각하.”
“하아.”
오바마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라 요한슨과 가까울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현실로 확인이 되니 입장이 착잡했다.
오바마가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지만 덕망 있는 공화당 상원의원을 무시 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정권의 많은 지분을 갖고 있다.
다른 이들은 정치권의 정확한 지분 관계를 알지 못했다.
민주당 쪽에서 대통령이 당선됐다고 해서 공화당 지분이 없는 게 아니었다.
예산을 비롯해 여러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상대당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중에서 공화당의 리처드 요한슨 상원의원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미연방준비은행의 의장을 오라 가라 말할 수 있는 차일드 가문의 일원이다.
방계 대표이면서 가진 힘 또한 대단했다.
대통령 오바마도 그가 부르면 걸음을 해야 할 정도다.
대통령은 중임 밖에 못 하지만 리처드 요한슨의 임기는 제한이 없었다.
젊은 나이에 당선되어 벌써 몇 번에 걸친 다선 경력.
“트럼프와 통화했다는 한국 인물이 그 녀석 맞지요?”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믿을 수가 없군요. 일개 개인이 그런 강력한 힘을 행사할 수 있다니…….”
오바마는 수시로 보고를 받았다.
미국 국가 안위를 위해 만들었던 해킹팀이 도리어 해킹을 당해 피해가 막심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대규모의 자본을 투자한 부분임에도 피해를 당했다.
백업 분까지 파손되어 복구에 몇 달이 소요될 예정이다.
암중 해킹 세력의 조력을 장태산이 받고 있었다.
“러시아 쪽이 확실합니다. 차르가 그자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요. 그 친구들이 의리 하나는 끝내주잖습니까. 더욱이 돈 많은 친구라면…….”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점검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처리하십시오. 그들이 우리의 최신 자산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부시 행정부 때 러시아 해커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본 사례가 있었다.
귀신같이 미국 핵 프로그램이나 최신 군사 기술을 빼돌렸다.
당당하게 자신들이 다녀갔다는 흔적을 남겼지만 실체를 찾을 수 없었다.
해커에 대해 1,000만 달러가 넘는 현상금을 걸었다.
그런 와중에 첩보에 의해 들려온 정보 하나.
러시아 해커가 차르의 차명 계좌를 털다 제거됐다고 했다.
미국은 한숨을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지난 시절의 그 강적 같았던 해커가 또 등장했다.
미국이 개발한 첨단 해킹 기술을 막고 공격까지 단시간에 퍼부었다.
오마바는 머리가 복잡했다.
그런 상황에 다니엘의 미국 방문이 이루어졌다.
오바마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리처드 상원의원.
“그 녀석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커틀러 국가 안보 보좌관의 말에 오바마는 주름진 이마를 더 찌푸렸다.
“지켜보도록 하죠. 상원의원의 손님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트럼프 쪽도 파티를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놔두세요. 어차피 다음 선거도 우리가 이깁니다!”
오바마는 확신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조국 아메리카.
아무리 과격한 공화당 지지자들이라고 해도 돈만 밝히는 호색한 머저리를 대통령을 뽑지는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의 확고한 의지.
참모는 그냥 수긍할 뿐이었다.
‘다니엘…… 나를 건들지 말라. 네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넌 단지 약소국의 일개 시민일 뿐이다!’
오바마의 마음속에 알게 모르게 자리잡은 다니엘에 대한 적대감.
요즘 들어 반짝이는 지혜보다 피곤함이 자주 찾아들었다.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오바마의 또 다른 패착.
그는 모르고 있었다.
누가 우위를 선점하고 있는지.
***
“리처드 상원의원이라면 가끔 미국 언론에 등장하는 그분 아니야? 엄청난 권력자라고 하던데…….”
조 이사님도 알고 있는 리처드 요한슨.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인연이 깊었다.
사라 요한슨의 아버지.
동시에 차일드 가문의 방계의 수장.
보이지 않는 가상의 세계에서 그와 난 수없이 반복되는 싸움을 해왔다.
물론 모두 다 내가 승리했다.
그러나 막상 그는 나의 정체를 몰랐다.
“맞습니다.”
“와아아아…… 트럼프보다 더 유명한 사람 아냐?”
지금은 그렇다.
하지만 몇 년 후에는 입장이 바뀐다.
트럼프라는 이름은 전 세계인의 뇌리에 철저하게 각인될 것이다.
“왜 쫄리세요?”
“넌 안 쫄려? 왜 만나자고 하는 건데?”
가는 도중 대화는 계속 오고갔다.
공항에서 생각보다 멀었다.
땅이 넓은 미국이다 보니 거리와 시간 개념이 대한민국과 달랐다.
“이사님.”
“응. 왜?”
“요즘 ‘죽집’이 위험하다던데…… 그 이유를 아십니까?”
“죽집이 왜 위험해? 누가 죽에 약 탔어?”
아직 ‘아재 개그’의 공포가 상륙하지 않은 청정한 2013년도.
“‘죽을 준비해’서입니다.”
“죽을 준비? 죽집에서 당연히 죽을 준비를……!!!”
말뜻을 음미하다 뭔가에 얻어맞은 듯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조 이사님.
어이없는 아재 개그에 넋이 나갔다.
“서, 설마 지금 개그한 건 아니지?”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큭…… 큽.”
운전하던 경호원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앞에서 큭큭거렸다.
긴장할 때 이런 썰렁한 농담보다 위안이 되는 것도 없다.
“파도가 멋지군요.”
LA 말리부 콜로니비치.
공항에서 해안가 도로를 쭉 타고 올라가는 중.
소문에 요즘 LA에서 가장 핫하다는 부촌이 이곳이라 들었다.
슈퍼리치들이 별장으로 사용한다는 럭셔리 주택이 해안가 주변으로 보이고 있었다.
넓은 대지에 수백 평이 넘는 건축물들이 개성 있게 자리하고 있었다.
평균 가격 1,000만 달러의 별장들.
미국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바다가 보이는 건축물들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가진 자들에게는 천국인 미국.
“휘이이~ 죽이네.”
조 이사님도 물질문명이 극도로 녹아들어 있는 별장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하나 사줘요?”
“어? 저, 저걸?”
“생각보다 저렴해요. 우리도 별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몇 개 매입하죠. 직원들 휴가 장소로 딱인 것 같습니다.”
남는 게 자본이다.
부동산에 투자하는 겸 해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사실 나도 마음에 들었다.
북태평양의 바람을 맞으며 와인 한잔하는 모습이 머리에 그려졌다.
“……장 회장. 내가 진짜 격하게 사랑한다. 우리 사랑 변하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미국 집값이 비싸게 느껴지지만 사실 서울 강남 집값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강남 콘크리트 집들도 한강 뷰만 떠도 수십억은 그냥 나간다.
미국에서 그 정도 가격이면 수영장 딸린 럭셔리 하우스에서 살 수 있다.
부우우웅.
리무진이 언덕을 오르며 배기량을 토해냈다.
“보스,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만남의 장소.
해변가 절벽에 늘어선 별장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
딸깍.
문이 열렸다.
“와아아…… 서울 촌놈 기죽네.”
절벽 위에 세워진 새하얀 건물이 멋들어지게 그림처럼 서 있다.
화이트 캐슬 같다.
휘리리리링.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LA의 4월에 부는 바람은 상쾌했다.
살짝 비린 바다내음이 맡아졌다.
타다닥.
씨큐리티 경호원들이 차에서 내려 밀착 경호해 왔다.
“경호원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리처드 의원의 경호원이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경호 팀장이 나서려는 순간.
“알겠습니다. 다들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이사님은 저와 동행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내 실력을 알고 있는 씨큐리티 직원들이 한마디에 물러섰다.
미국 경호원들이 앞장섰다.
스르르륵.
화이트 캐슬 문이 열렸다.
“와.”
뒤따라오던 조 이사님이 낮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대형 개방형 창문을 통해 넓고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실내는 의외로 깔끔하고 모던했다.
벽에 걸린 그림 대부분이 그 의도조차 난해한 현대 미술 작품이었다.
바닥에 깔린 유백색 대리석.
내부도 병적으로 새하얗게 일색을 이루었다.
이렇게 새하얀 공간은 아무도 소화하지 못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이 명확하다는 의미.
사박사박.
신을 신은 채 실내로 들어가는 미국 스타일, 마음에 들었다.
“다른 분은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조 이사님을 막는 경호원.
“소파가 좋네요. 실례지만 시원한 주스 있습니까? 와인도 좋고~.”
조 이사님도 나를 따라 다니며 간이 많이 커졌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경호원의 태도는 친절했다.
“장 회장. 다녀와.”
하얀 벽과 대비되는 블랙 가죽 소파에 앉아 창밖의 태평양을 바라보는 조 이사님.
나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안빈낙도는 신선들에게나 주라고 그래. 이왕 살다가는 거 좋은 거 보고 맛있는 거 먹으면 좋잖아. 흐흐흐.”
타락한 전직 차장 검사.
간 사이즈가 남달라지더니 지금 이 순간에도 도처에서 신들이 귀를 쫑긋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스르릇.
다시 문 하나가 열렸다.
창문으로 바다가 보이는 경사진 복도를 지났다.
상층부로 향했다.
그리고.
똑똑.
경호원이 문 앞에서 절도 있게 노크를 했다.
“들어와요.”
묵직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들어가십시오.”
안내하던 경호원이 문의 스위치를 눌렀다.
스르르릇.
조용히 열리는 문.
문이 열리면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
타원형의 거대한 창문이 먼저 보였다.
높이만 해도 5미터 이상.
바람에 몸을 맡긴 포말을 일으키는 대양의 파도가 정면에 보였다.
장관이다.
그리고 한 폭의 그림처럼 남자가 서 있었다.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백금발의 남자.
오랜 시간 관리해온 듯 단단한 체구는 보기 좋았다.
포근해 보이는 굵은 실의 연한 청색 카디건을 걸쳤다.
한 손에는 와인잔.
내가 이 집을 보면서 상상했던 장면을 남자가 그대로 연출하고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렸다.
잘생긴 미중년의 미국 아재.
“만나서 반갑네. 리처드 요한슨이라고 하네.”
살짝 미소 지으며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사라의 아버지.
“다니엘 장이라고 합니다. 리처드 의원님.”
나도 자연스럽게 웃었다.
파파바밧.
멀지 않은 공간을 두고 눈이 마주쳤다.
적인가 동지인가를 분별해야 하는 갈림길.
부드러운 미소 뒤에 서로를 탐색하며 각자의 비수를 감췄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