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7장. 죽어주셔야겠습니다 (2)
“얼굴이 훤해졌습니다. 수석님.”
“하하. 이게 다 지부장님 덕분입니다.”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수석님이 능력이 좋으셔서 그런 겁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도움 없이 제가 이 자리에 어떻게 올 수 있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윤병운이 어울리지 않게 겸양을 떨었다.
검사로서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모두 여기 앞에 있는 타케루 지부장 덕분이었다.
일본의 대표적 보수지 다케타 신문의 한국 지부장.
20년이 넘게 한국에서 근무한 타케루 지부장이 가진 인맥은 꽤 넓었다.
일개 신문의 지부장 수준이 아니었다.
정부쪽 인사나 한국 기업가들도 일본과 접촉해야 할 은밀한 일들 앞에서는 꼭 타케루 지부장을 찾았다.
놀랍게도 웬만한 일들이 타케루 지부장 선에서 간단한 민원으로 해결됐다.
보수 다케타 신문은 일본 내 자민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국의 조국 일보와 비슷한 역사를 갖고 독재 권력에 복종해 시대를 거듭하며 함께 성장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인권과 민주주의에 과감하게 등을 돌리기도 했다.
언론사 윤리 강령 따위보다 돈과 권력을 더 신봉했다.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다케타 신문은 본국을 위해 힘을 쏟는다는 점.
대신 한국의 조국일보는 자국이 아닌 일본을 위해 더 힘쓴다는 것이다.
“사케 한 잔 받으시죠.”
“감사합니다.”
일본 대사관과 가까운 종로에 위치한 고급 일식집.
일본 사람이 사장으로 직접 운영하는 일식집이다.
이곳은 일본 정부에서 운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 내 비밀 안가와 같은 곳이다.
한국에서 중요한 정보를 빼돌리거나 중요 인물을 포섭하는 장소로 주로 활용됐다.
청와대와도 가까워 종종 윤병운과 접촉하기도 편했다.
그렇게 특별한 장소에서 타케루 지부장이 윤병운을 접대하는 자리였다.
또로록.
무릎을 꿇고 잔을 받는 윤병운.
타케루 지부장을 상전처럼 모셨다.
과거 윤병운이 맡았던 사건 중에 의뢰인으로부터 돈을 받고 무마시켰던 적이 있었다.
훗날 그 일이 발각이 되어 직무감사를 당할 뻔했던 위기 상황에 타케루 지부장이 큰 도움을 줬다.
그 일이 인연이 되어 여러 가지로 물심양면 타케루 지부장은 윤병운을 도와왔다.
이번 주순자를 통한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입성하게 된 일도 보이지 않게 타케루 지부장이 힘을 쓴 덕이었다.
주순자와도 각별하게 선이 닿아 있는 일본 정부.
정치인답게 적당히 탐욕스럽고 오염된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을 때 암암리에 처리해 버려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해 불가역적으로 끝내야 할 일제 강점기 때의 배상 문제.
조근영 대통령은 여러 모로 약점이 많은 인물이었다.
부친 조정희 대통령이 집권했을 당시 한국 정부와 일본 양국이 맺은 조약.
그 조약을 부정하게 되면 자신의 아버지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과거 청와대에서 유년을 보내며 공주로 자란 조근영.
자존심이 전부인 줄 아는 조근영은 반드시 일본이 요구하는 바를 따를 것이다.
뒤에서 실세로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주순자에게도 이미 여러 가지 선물이 전달된 상황.
“제가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 청와대 민정수석이란 자가 일개 일본 신문사 지국장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일본 대사 앞에서도 꿇지 말아야 할 무릎을 자존심도 지키지 않고 잘도 꿇었다.
또로록.
잔이 채워졌다.
거만한 표정과 자세로 잔을 받는 지국장.
“한일 정부의 우정을 위하여. 건빠이!”
타케루 지국장이 건배사를 외쳤다.
“건빠이!”
두 사람은 단숨에 술을 비웠다.
“그런데 수석께서 어쩐 일로 이렇게 갑자기 보자고 하셨습니까?”
타케루가 궁금한 듯 물었다.
웬만한 일들은 간단하게 전화 통화로 끝냈다.
굳이 이렇게 밖에서 만나다 언론에 노출이라도 되면 곤란했다.
다행히 이 일식집은 비밀 출입구가 따로 있어 그런 불편은 피할 수 있었다.
대화 장소 역시 심처라 일반인들의 출입은 제한돼 있었다.
그렇다 해도 매사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나름 힘을 써서 청와대에 꽂은 민정수석이었다.
“그게, 장태산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
타케루가 눈에 띌 만큼 깜짝 놀랐다.
상부에서 가장 눈여겨 지켜보고 있는 한국인이었다.
그에 관련한 모든 정보는 중요도가 매우 높았다.
“장태산이 러시아에 다녀왔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푸틴을 만난 것도 아십니까?”
“푸…… 틴요!”
타케루는 내심 한 번 더 놀랐다.
아직 일본 첩보국은 접수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러시아 내에 장태산 투자처가 있다는 것까지는 파악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대규모 투자를 할 것 같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요?”
일본은 러시아의 움직임에 매우 민감했다.
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빼앗긴 북방에 위치한 4개의 섬.
반환에 합의했지만 러시아는 돌연 말을 바꿨다.
과거부터 적이었던 국가가 바로 러시아였다.
그런 러시아와 은밀히 접촉한 장태산.
“국정원 정보입니다.”
“흐음…….”
타케루 지부장이 인상을 썼다.
그놈이 움직이면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본국에서 파견한 살수도 피한 놈이었다.
“제가 손을 쓸 수 없습니다.”
윤병운은 미리 선수를 치며 고했다.
“알고 있습니다.”
주순자와 장태산이 뭔가 밀약을 맺은 걸 타케루 지부장도 짐작하고 있었다.
“큰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염치없는 듯 고개를 속이는 윤병운.
“하하. 아닙니다. 오늘도 귀한 정보를 주셨습니다.”
타케루는 금세 얼굴 표정을 바꿔 웃음으로 포장했다.
뒷일은 일본 정부에서 알아서 할 일이었다.
러시아에도 일본에서 관리하는 고위 관료들이 제법 많았다.
“송구합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오늘은 거하게 일 얘기 뒤로 하고 한잔하시죠.”
타케루 지부장이 사케가 담긴 자기병을 들었다.
두 손으로 잔을 잡고 술을 받는 윤병운.
조선말 일본에 투항한 대한제국 관료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홍천각에 왔다.
임성철 회장이 주로 애용하는 장소.
조 여사가 대기하고 있다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요즘 자주 뵙는 것 같습니다.”
가볍게 미소 지으며 응대했다.
“장 회장님,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조 여사는 나를 볼 때마다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 대했다.
세상 돌아가는 정보에 빠삭할 홍천각 안주인다운 면모였다.
자박자박.
그녀를 따라 전에 임성철 회장을 만났던 뒤뜰 건물로 향했다.
“말씀 나누십시오.”
이미 얘기가 된 듯 조 여사는 한복 자락을 잡고 곱게 인사한 뒤 사라졌다.
“왔으면 들어와.”
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르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전과 달리 간단한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평소 먹던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졌던 요리는 보이지 않았다.
육전과 도라지나물, 김치가 전부였다.
거기에 소주 한 병.
“일찍 오신 것 같습니다.”
“나이 먹으면 약속 시간이 기다려져. 할 일도 없고…….”
“무슨 말씀입니까. 회장님께서 건재하셔야 대한민국이 건재합니다.”
“낯간지러운 칭찬은 됐어. 나도 마누라와 새끼들과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짓이니까 그렇게 말 안 해도 돼.”
임성철 회장은 다시 봐도 의외로 소탈했다.
“소주 괜찮겠습니까?”
“난 한국사람 아냐? 당연히 마실 줄 알지.”
임성철 회장이 잔을 내밀었다.
두둑.
소주병을 땄다.
투둑 투두두두둑.
오후부터 구름이 끼어 흐리더니 이내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좀 열어봐.”
“공기가 차갑습니다.”
“나 아직 안 죽었어.”
성정은 아직 꼬장꼬장했다.
소주병을 놓고 문을 열었다.
투두두두두두둣.
봄비 치고는 제법 굵게 내리는 빗줄기가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했다.
“안주로 기가 막히네.”
흐뭇한 시선으로 비 내리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임성철 회장.
그 사이 많이 늙었다.
선천지기가 상한 상태였다.
격전으로 변해가는 경제 전쟁의 최전선을 담당하는 수장의 노고.
도움이 안 되는 정치권을 대신해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피터지게 싸웠다.
선천지기가 당연히 상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 전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세와 기세의 싸움.
“한 잔 받으십시오.”
공손하게 병을 잡고 따랐다.
쪼로로록.
이런 날에 육전에 소주는 진리였다.
방금 부쳐낸 듯 고소한 냄새가 방안에 맴돌았다.
거기에 더해진 비와 흙냄새.
산세까지 더해지자 인세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장 회장도 한 잔 받아.”
“편하게 부르십시오.”
“됐어. 사람은 한 번 자리에 오르면 쉽게 내려앉아서는 안 돼. 자신을 믿고 따라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는 거야. 자연에 묻혀 살 게 아니라면 그냥 즐겨.”
경제 거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쪼로로록.
소주도 놋그릇 술잔에 받으니 격조가 있어 보였다.
“하늘도 땅도 원래 술을 좋아하거니 술 좋아함이 하늘에 부끄럽지 않노라……. 우리 아버님이 반주를 할 때마다 읊던 시조가 오늘따라 유독 생각나네.”
애주가 이태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을 읊조리는 임성철 회장.
선친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그의 눈에서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것.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저절로 반응하는 심정이었다.
“주선(酒仙)이 되시려 그러십니까.”
“주선 좋지! 내가 이 집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동네 주선 정도는 되었을 것이야.”
농담 한마디 말에 흡족한 표정을 짓더니 쭈욱 한 모금에 술을 비우는 임성철 회장.
“크.”
짧은 신음을 뱉었다.
나도 조용히 잔을 비웠다.
쌉싸름한 소주만의 특유한 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임성철 회장은 도라지를 한 가닥 집어 입에 넣고 조용히 씹었다.
“북극 황제는 잘 만났고?”
“소문이 빠릅니다.”
“국정원 애들이 요즘 월급 값을 해.”
“공권력을 그렇게 사용하면 불법입니다.”
“이 나라에서 내가 세금 가장 많이 내. 그러니까 괜찮아.”
할 말이 없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오정이 내는 한 해 법인세만 해도 대한민국 탑이었다.
“그 추운 곳에 공장 세우려고?”
“네.”
“왜?”
“안전해서요.”
“……뭘 만들려고?”
“반도체 부품 만들 생각입니다.”
“반도체 만들 거야?”
“아니요.”
“그런데 왜?”
“팔아주세요.”
“……제정신이지?”
주고받는 대화가 폭풍처럼 오고갔다.
“회장님. 가마우지 낚시법 아시죠?”
“새의 목에 줄을 매달아 낚시하는 그거?”
“네.”
“갑자기 그 얘긴 왜.”
“오정의 미래가 가마우지입니다.”
“…….”
소주를 다시 채우려다 멈추고 날 쳐다보는 임성철 회장.
“참 건방져.”
“진실은 입에 쓴 법입니다.”
“일본을 못 믿는군.”
“회장님도 못 믿지 않습니까.”
“그래서 답답해. 업체 바꾸기가 쉽지가 않아. 반도체 산업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 신공정에 들어갈 소재를 육성할 시간이 없어. 일본 놈들이 참 지독해. 특유의 장인 정신으로 한 우물만 파거든.”
“제가 그래서 청정 러시아에서 새로운 우물을 파려고 합니다.”
“자네 돈으로 왜?”
임성철 회장이 의문에 찬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정부에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관련된 기업도 아닌데 러시아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내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앞으로 5년 뒤면 알게 되실 겁니다.”
“나 내년에 죽는다며.”
“사셔야죠.”
“살릴 방법은 있고?”
본격적으로 나누게 된 대화.
“방법은 있습니다.”
“……뭔가?”
임성철 회장의 눈을 바라봤다.
아직도 불타고 있는 사업적 욕망.
그는 생명 연장이 절실했고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 그가 필요했다.
“먼저 죽어주셔야겠습니다.”
“뭐라고? 먼저 죽어???”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