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6장. 죽어주셔야겠습니다 (1)
- 속보입니다. 오늘 아침 동룡 그룹의 주현태 회장이 긴급히 오정 제일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확한 병명은 나오지 않았지만 병원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심한 정신적 충격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입원 한 곳도 정신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현재 동룡의 전 계열사 주가가 최 하한가까지 폭락했습니다. 추진하던 대웅 건설 인수 건은 모두 무산 될 것으로 보이며 만기가 도래하는 채권까지 돌아오면 곧 그룹 전체에 위기가 닥칠 것으로…….
아나운서가 동룡 주현태 회장 신변에 관한 일과 그룹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앵무새처럼 떠들었다.
“끝났군……. 완벽하게. 쯧쯧.”
대한민국 사채계의 왕인 허대부는 TV를 지켜보며 혀를 찼다.
욕망에 눈이 멀어 자신의 역량 이상으로 사업을 키우려다 주저앉아 버린 기업들.
그런 기업들에 동룡 주현태도 포함됐다.
숱한 세월 동안 기업과 기업인들이 겪은 길흉화복을 지켜봐 왔던 허대부.
별 감흥 없이 혀를 차는 것 말고는 달리 반응할 만한 거리가 없었다.
언젠가 망할 기업과 경영자의 싹수는 눈에 잘 들어왔다.
한편으로 그걸 이용해 돈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어차피 잘 나가는 놈에게는 투자하지 않았다.
아무리 승승장구해 봤자 막상 허대부 손에 들어오는 것은 몇 푼 되지 않았다.
허대부에게 있어 투자자금 회수 시까지 이자는 최소 20%가 기준점이었다.
그런 허대부가 가장 좋아하는 대상이 바로 숨이 껄떡껄떡 넘어가기 일보직전의 개인이나 사업체였다.
전조 징조는 금세 눈에 보였다.
무리하게 사세를 확장하려 드는 순간 적당한 때를 봐 덫을 놓았다.
은행도 놓치는 알짜 채권이나 주식을 담보로 요구하고 투자금을 던지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일이 풀렸다.
처음에는 부담스럽지 않았던 이자가 점점 부담스러운 고금리로 바뀌었다.
전환사채를 발행 받고 쓸 만한 작업자들을 투입해 회사를 통째로 가져오는 형식이다.
부동산은 주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보는 지인들을 통해 팔아치웠다.
덩치가 큰 기업과 공장 같은 물건들은 잘 포장해 적당한 임자에게 매물로 넘겼다.
보이지 않는 기업 인수 합병의 큰 손이 허대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약한 놈 짓일 게 확실한데……. 이번에는 손해를 볼 것 같아. 사위를 상대로 돈을 더 받을 수는 없잖아.”
허대부는 오랜만에 고민에 빠졌다.
동룡 핵심 계열사를 담보로 손에 쥐고 있었다.
휴지 조각처럼 처분될 처지이지만 결코 버려질 휴지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동룡 그룹 계열사 중 건질 만한 알짜가 꽤 있었다.
“에잉……. 줘버리지. 이까짓 거 지참금으로 던지면 그만이지. 흐흐흐.”
허대부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약한 그놈을 잡기 위해서는 아낄 게 없었다.
단시간에 동룡 그룹을 주저앉힌 무서운 놈.
“언제 오려나……. 가야금 뜯는 소리 좀 듣고 싶은데…….”
허대부 눈에 진심 어린 그리움이 차올랐다.
***
“경호원들은?”
“평소처럼 근무했다고 합니다.”
“집안에 침입 흔적은?”
“경찰들 조사에 의하면 외부 침입 흔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주현태 회장이 몸부림치며 집안 물건이 몇 개 부서진 것 말고는……. 특별히 의심이 갈 만한 게 없었답니다.”
“장태산 그놈은 그 시간에 집에 있었던 게 확실해?”
“러시아에서 돌아온 후 외출하지 않았습니다. 여동생이 학교에서 괴한에게 테러를 당한 일로 식구들 모두 집에 모여 있었던 걸로 파악됐답니다.”
“그 괴한은 뭐야? 누가 사주라도 한 거야?”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조선족 같은데 중국 공안에 확인해 봐도 자료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적자인 것 같습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윤병운은 민정수석실 소속 수사관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뭔가 있는데……. 뭔가 있어…….”
검사로 수십 년 간 몸담았던 윤병운의 촉이 미세하게 발동했다.
주현태 회장이 쓰러졌다는 보고를 받은 즉시 장태산의 알리바이를 확인했다.
러시아에서 비밀스럽게 누군가와 접촉하고 돌아온 장태산.
놀랍게도 국정원 보고에 의하면 푸틴을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치며 시장과 연해주 주지사와도 접촉했다는 증거도 있었다.
정보가 갱신 전이지만 자꾸 신경을 건드렸다.
장태산은 정부에서도 통제할 수 없는 범위에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더욱 면밀히 자료를 수집했다.
장태산은 결코 나란히 걸을 수 없는 적임을 확신했다.
주순자의 지시 때문에 멈췄지만 윤병운의 생각은 달랐다.
언제든 칠 수 있는 기회만 생긴다면 놈의 뒤를 노려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수상한 점이 있지만 주현태 회장이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단 사실은 전 국민이 다 아는 일입니다. 장태산이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직접 손을 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청탁을 했을 수도 있잖아.”
“CCTV와 열감지 영상도 깨끗하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전문가도 침입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 수고했어. 나가봐.”
“충성!”
경례를 붙이고 곧장 나가는 수사관.
“장태산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 뭘 계획하고 있는 거야.”
검찰을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민정수석실 책임자였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기업인들 청탁은 주순자 선에서 대부분 처리됐다.
공길춘도 자기 라인 사람들을 공공기관에 심어주기 바빴다.
권력욕이 남다른 윤병운은 뭔가 획기적인 새로운 사건을 원했다.
지난 정권부터 재갈을 물려 놓은 언론은 그 어느 때보다 말도 잘 들었다.
사냥개 본능이 남아 있는 윤병운.
가장 핫한 인물 장태산을 교묘하게 노렸다.
“푸틴을 만났다고……. 푸틴을…….”
생각이 부쩍 많아진 윤병운.
스마트폰을 들었다.
띠리리리리릿.
통화를 시도했다.
- 안녕하십니까. 수석님.
살짝 어색한 한국어가 들려왔다.
“지부장님. 오늘 술 한잔해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래요? 알겠습니다. 바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윤병운은 오랜만에 그에게 연락을 했다.
다른 이들은 미처 몰라보고 잡지 않은 동아줄.
윤병운은 그 튼튼한 동아줄을 잘 골라 움켜쥐고 있었다.
***
“오늘은 학교 쉬어라.”
“엄마.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야. 그깟 괴한 때문에 일상을 망칠 수 없어!”
“말 좀 들어. 그러다 큰일 나면…….”
“엄마. 보내주세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태산아…….”
주희가 학교에 가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엄마는 극구 말렸지만 나는 허락했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던 것도 아니다.
비열하고 야비한 족속들이 나만 노릴 거란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날 쓰러뜨리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빌 게 빤한 세상의 적들.
그때를 대비해 가족 모두에게 귀한 선물을 안겼었다.
엘프 장로님이 선물로 뭐가 좋겠냐고 물어 그 순간의 기회를 잡았다.
다른 게 아닌 엘프들이 입는 속옷을 요구했다.
상인들을 통해 주워들은 얘기 중에 가장 구하기 어렵다고 했던 엘프들의 속옷.
미스릴 실을 엘프들 특유의 기술로 가공해 엄청나게 가볍고 신축성 넘치는 옷으로 만든 것이다.
방탄복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방어력이 대단했다.
그뿐인가.
기본적으로 방어 마법도 각인되어 있었다.
위기에 처하면 몇 가지 마법이 자동으로 발현 됐다.
그것 역시 엘프들만의 마법 각인 기술.
하도 귀한 것이라 넉넉하게 얻지는 못했다.
부모님과 쌍둥이, 그리고 내가 입었다.
그 효과를 이번에 제대로 봤다.
대놓고 총으로 저격까지 하는 놈들이라 어떤 식으로든 방어는 필수였다.
안심은 됐다.
“엄마. 오빠가 준 속옷 완전 좋아. 세상에 칼이 못 뚫었다니까.”
직접 경험한 주희.
저쪽 세상에서도 과거 황족이나 입던 속옷이라는 건 꿈에도 몰랐다.
“괜찮겠니?”
엄마가 나를 돌아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요. 저 믿으십시오.”
“그렇다면…….”
“엄마 다녀올게. 나 오늘 쪽지 시험 있단 말이야. 그 교수님 깐깐해서 이런 사소한 시험 무시하면 F 뜰 수 있어.”
주희가 서두르며 가방을 챙겼다.
“다녀올게! 오빠~ 학교 와서 전화해. 친구들이 보고 싶대~.”
“알았어.”
고등학교 시절부터 종종 있어 왔던 일.
잘난 오빠를 둔 여동생의 갑질 정도로 생각하면 됐다.
“조심해. 차 조심하고 사람 조심하고.”
“응~ 엄마. 사랑해요.”
엄마의 걱정스러운 모습에 손을 흔들고 부리나케 사라지는 주희.
“휴우…….”
엄마가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놀라셨죠?”
“당연하지. 자식 키워봐라. 감기라도 걸리면 다 내 죄 같다.”
열 자식이 부모 한 명을 못 모시지만 부모는 열 자식도 거느린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가끔 천륜을 저버리는 부모도 종종 있지만 세상은 기본적으로 부모의 무한한 사랑을 윤활유 삼아 돌아갔다.
“아버지는 모르시죠.”
“알았으면 당장 올라왔을 거야. 쌍둥이들을 얼마나……. 알잖아.”
딸들에 대한 애정이 지극정성인 아버지.
지난 생에도 아버지는 쌍둥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가장 컸던 분이다.
“태산아.”
“네.”
“네가 그랬니?”
“뭘 말입니까?”
“그 사람 말이야.”
이복 오빠를 이제는 남처럼 얘기하는 엄마.
주희를 해치려고 했던 장본인이 주현태라는 걸 엄마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천벌받은 겁니다. 저는 전혀 모릅니다.”
부모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존재하는 법.
어제 부로 주현태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다.
마음 같아서는 주현태 육신까지 묻어 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주현태는 남에게 고통을 가하는 일에는 익숙했지만 고통 받는 일에는 완전 초보였다.
몇 번 손 좀 대고 힐 마법 좀 펼치자 얼마 못가 멘탈이 털려 버렸다.
제정신이 가출해 버리자 실실 웃으며 나에게 형이라고 헛소리를 해댔다.
오로지 맞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빌었다.
얼굴도 모르는 외할아버지 체면 봐서 목숨은 부지해 줬다.
세상에 살아 있어 봤자 전혀 도움이 안 될 인간이지만 생명은 소중했다.
앞으로 사람 구실은 할 수 없겠지만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모습으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역시 주현태 자신이 만든 과보.
집안사람들과의 관계도 엉망이라 누가 돌보겠다고 나서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그 사이 미국으로 먼저 넘어간 주현태 와이프는 잘생긴 제비를 만나 열애중이다.
자식새끼들도 상황은 마찬가지.
건질 만한 게 하나도 없는 구성원들이다.
정직하지 못하고 더럽게 살아온 자의 인생은 결국 이렇게 되는 게 정상이다.
해외로 빼돌린 동룡의 법인 자금은 모조리 회수될 것이다.
이쯤 되면 주현태의 미래는 이미 정해져 버린 것.
경치 좋은 정신요양원에서 행복하게(?) 여생을 마무리 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생각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동룡 말입니까?”
“응…….”
“전에 말씀드렸듯 엄마가 경영하세요.”
“정말 그래도 돼?”
엄밀히 외할아버지가 남긴 회사였다.
엄마의 사업적 재능도 무시 못했다.
재단과 갤러리 운영도 수준급이다.
어차피 뒤에서 도와주면 됐다.
대부분 내수 사업이라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흔적이잖아요. 채무와 기타 자잘한 문제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깨끗하게 세팅해 드릴 테니 외할아버지 유지 받들어 경영해 보세요.”
그룹이 엄마의 추억 팔이 물건 수준이 됐다.
“고마워 아들.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엄마, 나에게 해준 것 많다.
가장 핵심은.
“저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것만으로도 그 은혜 하늘만큼 높습니다.”
“나도 고마워. 네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온 우주를 얻은 것 같았어.”
엄마에게 자식, 특히 아들은 그런 존재인 것 같다.
온 우주를 줘도 바꾸지 못할 특별한 선물.
“경호원들이 당분간 근접 경호할 겁니다. 참고하세요.”
“괜찮아. 다들 딸 같고 아들 같아서 좋아.”
우리 가족은 갑질을 평생 모르고 살아서 그런지 경호원들과도 가족처럼 사이가 남달랐다.
아낌없는 재정 지원을 떠나 마음과 마음이 통했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알았어~. 나도 아빠하고 100년까지 살아야지. 태산이하고 쌍둥이들 새끼 낳으면 봐줘야 하고~.”
엄마, 꿈이 크시다.
“그런데 아들.”
“네?”
“누구야?”
“뭐가 말입니까?”
“윤아야? 아니면 엘자 연지? 그것도 아니면 해외에 있는 네 여자 친구들 중 한 명? 나이도 먹어가는데. 이제 정해야 하는 거 아냐?”
엄마가 불시에 훅 치고 들어왔다.
“…….”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쩌다 보니 문어발 어장관리형 인간이 돼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계에 있는 여자 친구는 아직 모르신다.
“아직 젊으니까 연애는 말리지 않겠다만……. 여자 마음에 상처를 남기면 안 돼. 그거 나중에 다 돌아온다.”
같은 여자로서 하는 엄마의 진심어린 충고.
“알겠습니다.”
나에게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조언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엄마였다.
띠리리리리리리.
스마트폰이 울렸다.
눈에 익은 이름이 떴다.
- 날세.
“네. 회장님.”
- 오늘 시간 있으면 나 좀 보세. 준비는 다 됐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