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4장. 죽음이 더 편안할 것이다 (3)
“태산이 잘 키웠더라. 인물도 좋고 능력도 많고~. 지 외할아버지를 닮은 거 같아. 저돌적인 데다 사업적 감각도 뛰어나고 말이야.”
매입 후 명칭을 바꾼 TS 갤러리.
관장실로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동룡 제과의 안주인 주미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앞에 앉아 있는 여동생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외할아버지 피 때문이 아니에요. 스스로 그렇게 태어난 아이입니다.”
주설란은 이복 언니의 방문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주현태와 다르게 자신과 그렇게 크게 부딪쳤던 접점도 없을뿐더러 나눴던 정도 없었다.
오늘처럼 이렇게 편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눌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말뿐이던 언니다.
어린 시절 나이 차이가 꽤 나던 주미란을 언니라고 불렀다 크게 혼이 났다.
언니라는 호칭도 허락하지 않았던 여자.
주설란의 엄마를 끝까지 아줌마라 부르며 무시했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어도 그 당시 받았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그 이후의 삶에서도 달라지는 건 전혀 없었다.
주설란과 엄마를 주미란은 세상 누구보다 미워했다.
“미안하다……. 살다보니 모든 게 별것 아니구나 하는 생각,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 많이 하게 돼.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이 네 엄마와 너에게 투영됐다. 엄하시던 분이 너에게는 어찌나 다정하고 자상하게 대하시던지…….”
과거를 회상하는 듯 눈을 잠시 감는 주미란.
“아버지는 외로운 분이셨어요. 저 때문이 아니라 이미 오빠와 언니 그리고 아버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던 거죠.”
“엄마가 아버지를 많이 미워했어. 사업 한다고 매일 밖으로 도셨거든. 그 당시 사업하는 분들 대부분이 그랬지만. 여자 문제도 있었고…….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엄한 것만도 아니었어. 나 어렸을 때 언젠가 갑자기 몸이 아팠을 때 나를 업고 병원으로 뛰던 아버지의 넓은 등은 아직도 생각나. 내가 자식을 낳고 키워보니 부모 마음 다 같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처자식 위해 아버지는 그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인지도 모르지. 그걸 어린 시절 몰랐던 나와 오빠였고. 아니 엄마도 몰랐으니 아빠가 밖으로 돌았겠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주미란은 모두의 삶을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상처는 상처일 뿐이에요. 두 언니 오빠 덕분에 인생 잘 배웠습니다.”
주설란은 따듯한 시선을 보내는 주미란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지만 쉬이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용서와 화해를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져 버렸다.
특히 최근 보인 오빠 주현태의 행태는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들 태산이가 동룡을 상대로 한창 작업중이었다.
주설란도 그만한 소식을 알아서 전해주는 친구가 생겼다.
강남에서 퍼진 소문은 그 어떤 지역에서보다 빨리 전파됐다.
“다시 한 번 미안해. 너는 용서할 수 없겠지만……”
주미란은 여동생을 바라보며 미안하다는 말을 한 번 더 했다.
“지금은 괜찮아요. 시간이 약이잖아요.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그 말을 하려고 이렇게 직접 걸음 할 분이 아니잖아요.”
주설란은 강단 있는 말투로 물었다.
시골에서 농사나 짓던 남자의 아내가 아니었다.
중용대학교 이사장에 수천억에 달하는 갤러리를 맡고 있는 관장이었다.
자리는 사람을 만들었다.
재력과 미모, 품위가 더해져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귀부인이 돼 있었다.
졸부들의 와이프들처럼 상류층에 섞이고 싶어 너나할 것 없이 어울리며 다니지도 않았다.
쉬는 날이면 아이들과 남편을 챙기고 여유 시간이 생기면 그림을 그렸다.
물질적인 삶에 집착하지 않기 위한 자기 관리도 철저히 했다.
가진 부가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한때는 가족이었던 사람들의 삶이 지금의 주설란을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아무리 재력이 갖춰져 있어도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걸 몸소 경험한 주설란.
어느 모임에도 참여하지 않지만 알아서 사람들은 주설란을 찾아왔다.
맑은 기운을 풍기는 주설란을 좋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들 역시 아들 장태산에 더 관심이 많았다.
점점 더 소문의 중심이 되어 가고 있는 장태산이라는 이름.
주설란은 가만히 앉아서도 아들의 영향으로 진짜 여왕이 되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아들 덕분에.
“……오빠 만났니?”
“네.”
“뭐라고 하던?”
“빼돌린 돈 다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미친!”
주미란이 욕을 내뱉었다.
한 배에서 난 자신에게도 지독하게 짜고 매정했던 오빠였다.
오빠가 주설란의 엄마를 어떻게 했다는 건 주미란도 짐작하고 있었다.
거지꼴로 주설란을 쫓아낸 장본인인 오빠가 할 말은 아니었다.
“두고 보자고 했어요.”
“……미쳤구나. 단단히 미쳤어. 휴우…….”
주미란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찾아와 애걸복걸해도 모자랄 판에 주현태는 자꾸 일을 키웠다.
주미란도 나름 설란과 조카 장태산에 관한 소문을 좇아 뒤를 알아본 상태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현실은 누구도 이들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거물이란 것이다.
그런 주설란을 상대로 자존심을 세우며 협박을 했을 주현태가 어리석게만 생각됐다.
“설마 오빠를 봐달라는 부탁을 하러 온 건 아니죠?”
주설란이 물었다.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어. 막상 오니 이제 말도 못 꺼내겠구나. 어쨌든 동룡은 아버지가 일궈낸 주씨 가문의 기업이니…….”
“저도 주씨예요.”
“응?”
“언니도 동룡 제과 물려받았잖아요. 아무리 봐도 나도 동룡 그룹을 이어받을 자격은 충분한 것 같은데 아닌가요?”
“!!!”
주설란 말에 주미란은 소름이 돋았다.
분명하게 깨닫게 된 사실.
‘아버지를 닮았어. 오빠나 내가 아니라 아버지 피는…… 설란이 한테 유전됐어.’
맨손으로 그룹을 일궈낸 아버지 주영석 회장의 뚝심.
대차게 말아먹은 오빠나 동룡 제과에 만족하고 있는 자신과 달랐다.
“동룡이라는 그룹 명은 남겨둘게요.”
주설란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고, 고맙구나.”
“뭘요. 집안일인걸.”
주설란은 생각 외로 쿨하게 대답했다.
그런 그녀 앞에서 점점 위축되고 주눅이 드는 주미란.
동룡 그룹은 동룡 제과와 비교할 수 없는 덩치였다.
이제는 성질 사나운 오빠가 아니라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주설란의 눈치를 봐야 할 처지가 됐다.
따라~ 따라라라~♬.
마침 주설란의 휴대폰이 울렸다.
슈베르트의 잔잔한 바이올린 소나타.
“주아야. 수업 다 끝났어?”
오늘 큰딸 주아와 저녁을 먹고 쇼핑을 하기로 약속이 돼 있던 주설란.
밝은 표정으로 통화를 이어갔다.
- 엄마! 큰일 났어요.
몹시 떨리는 주아의 당황한 목소리.
“큰일? 왜? 무슨 일 있는 거야?”
딸의 목소리에 불길함을 느낀 주설란이 당황했다.
- 주희가 학교에서 괴한한테 습격당했대요.
“뭐! 습격!!!”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주설란의 얼굴이 새카맣게 변했다.
- 다행히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지금 학교는 난리가 났어요. 대낮에 학생이 칼을 든 괴한한테 당했다고…….
“주희는 지금 어딨어!”
- 경호원들과 같이 움직이고 있어요.
띠이이이 띠이이이.
그때 주설란 휴대폰으로 들어오는 주희의 통화.
띠릭.
빠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어, 엄마!
“주희야? 괜찮아? 지금 어디야. 엄마가 당장 갈게!”
- 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요. 엄마……,
“그래. 알았어. 엄마 바로 집으로 갈게.”
딸에 대한 걱정에 몸서리치던 주설란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정신을 가다듬는 주설란.
“언니 얘기는 다음에 또 나누죠.”
“어? 어. 그래…….”
타다닥.
주설란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다급하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설마?”
통화 내용을 듣는 순간 주미란은 오빠 주현태의 얼굴을 떠올렸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
“만약 정말 오빠가…… 조카를 노렸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이후 벌어질 일들.
주미란은 치를 떨었다.
정말 혈육이 아니라 악마가 되어 버린 인간.
어쩌면 이번 기회에 오빠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아주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친동생인 자신을 향해서도 언제든 칼을 들이댈 수 있는 자.
그게 바로 주미란이 아는 동룡의 주현태 회장이었다.
***
“왜 연락이 없어? 이 새끼 돈만 받고 튄 거 아니지?”
주현태는 집에서 대포폰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그룹을 지키는 것에 대한 미련은 이미 접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경영 실패로 진작 부도가 났어야 정상이었다.
그 상황을 부정하며 여러 가지 꼼수를 써서 지금까지 버텨왔다.
이제는 그것도 한계에 달했다.
마지막 카드로 생각했던 주순자도 보란 듯이 주현태를 버렸다.
이 모든 게 다 장태산 때문이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기필코 놈에게 처절한 고통을 안겨주고 싶었다.
재산은 노후에 먹고 살 만큼 따로 빼돌렸다.
조금 남아 있는 법인 자금도 비밀리에 해외로 돌렸다.
법조계와 정치계 인사들과는 대충 말을 맞춰 끝내 놓았다.
사업 실패로 인한 화의나 법정관리가 준비 중이다.
잠시만 몸을 피하고 움직임만 조심하면 된다.
횡령과 배임 문제에서만 꼬투리 잡히지 않으면 다음 기회를 볼 수 있었다.
세금으로 몇 년 버티다 채권 상각하고 깔끔하게 재기하는 수순은 재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돈이 좀 드는 것을 빼면 괜찮았다.
그래도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주설란 부부는 경호원들의 빈틈없는 보호를 받았다.
아예 접근이 쉽지 않았다.
대신 학교에 다니고 있는 두 딸을 목표로 삼았다.
학생 신분이라 그나마 경호가 허술했다.
“한 년은 뒈지겠지. 크크크.”
믿을 만한 자를 통해 줄이 닿은 청부업자.
조선족 출신으로 무적자였다.
잔혹함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흑룡강파의 조직원 중 한 명.
은밀히 장태산의 쌍둥이 동생 중 하나는 꼭 숨통을 끊어놓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대가는 1억.
일이 끝난 뒤 1억을 더 얹어 주기로 했다.
“개새끼…….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크크.”
개운한 마음으로 서재에서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주현태.
빈 잔에 위스키를 채웠다.
“잘가라. 외 조카~ 지옥에 가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잘 모셔라.”
얼굴도 모르는 조카의 죽음을 놓고 앞서 축배를 들었다.
아내와 애들은 이미 미국에 넘어가 있었다.
굳이 안 봐도 될 일들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고 혹 불똥이 튈 수 있어서 유학을 보냈다.
“그렇게 좋습니까?”
순간 주현태는 귀를 의심했다.
선명하게 들려오는 혼자 있는 공간에서의 남자 목소리.
“누, 누구야!”
주현태는 등골이 서늘했다.
서재 한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사람.
“방금 제가 묻지 않았습니까?”
“너, 네가 어떻게!”
‘이 자식 뭐야! 경호하는 새끼들은 뭐하고 있는 거야!’
불안한 마음에 경호원들을 추가 인원까지 두며 만전을 기했다.
집은 최첨단 경호시스템으로 보호가 됐다.
하지만 어떤 반응도 없었다.
아무 인기척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온 장태산.
“경호원들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한 숨 푹 자고 일어날 겁니다.”
“뭐!”
“외삼촌.”
장태산이 다정한 목소리로 주현태를 불렀다.
오해할 만큼 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
누가 들으면 조카와 외삼촌 사이가 무척 좋은 관계인 줄로 착각할 정도였다.
“뭔 개수작이냐!”
주현태는 죽일 듯 장태산을 노려봤다.
“가족이었다면……. 한 번쯤 이렇게 불러드리고 싶습니다. 아쉽게…… 이번 생에 마지막이 되겠지만 말입니다.”
“헛소리 그만 하고 꺼져! 경찰 부르기 전에 당장 나가! 난 너한테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아. 이 썅X의 새끼야! 너 때문에 내가 이 꼴이 된 게 안 보여? 이 어린 잡놈의 새끼!”
주현태는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버젓이 눈앞에 서 있는 장태산 한 놈 때문에 그 동안 꾸었던 모든 꿈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원망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그러니까 내 말이.”
다정하게 부르던 목소리와 표정이 금세 차갑게 변했다.
베일 듯 차갑게 식은 눈빛.
눈에 보이지 않는 비수가 되어 주현태를 찔렀다.
“마지막 경고야. 내 집에서 당장 꺼져!”
손가락을 들어 삿대질을 하는 주현태.
‘너 딱 걸렸어!’
그 순간에도 주현태의 머릿속은 바빴다.
주거침입죄를 물을 수 있게 됐다.
자해로 없던 폭행죄도 추가할 생각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하지만.
우두둑.
손가락질하던 주현태 오른쪽 손가락이 장태산 손에 잡혀 사정없이 꺾였다.
“!!!”
놀라고 당황한 주현태.
“크아아아아아아악!”
바로 밀려오는 고통에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집이 참 고즈넉한 곳에 있어 좋아요. 방음도 잘 되고.”
아직 바깥 기온이 차가워 창문을 죄다 닫아 놓은 게 화근이었다.
주현태가 아무리 크게 비명을 질러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다.
“웬만하면 법 테두리 안에서 끝내려고 했는데…… 그걸 못 기다리고…….”
손가락을 꺾어 잡은 채 주현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잇는 장태산.
“너……. 크으으으.”
끊어질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물면서 장태산을 노려보는 주현태.
와락.
순간 장태산이 주현태의 목을 움켜잡았다.
“주현태……. 니가 감히…… 내 가족을……. 그 대가는…….”
이글거리는 분노로 주현태를 태워버릴 듯 노려보는 장태산.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할 만큼…… 살아 있는 게 고통스러울 것이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