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8장. 바짝 땡겨야 할 때
‘뭐지?’
세르미온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인간이 노바라 외치는 순간 신성한 기운이 강하게 감지됐다.
인간의 태도가 바뀌었다.
경직되었던 좀 전과 달리 자신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는 인간.
뭔가 크게 깨달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강한 불길함이 세르미온을 덮쳐 왔다.
스윽.
다시 망치를 위로 치켜들자 이내 아공간으로 사라졌다.
신기인 신성 무기를 다시 품는 아공간은 대단했다.
8서클 마법사인 세르미온에게도 아공간이 존재했지만 저 인간의 것처럼 거대하지 않았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들 아르테우스 말처럼 정말 드래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저 인간에게서는 드래곤이 품고 있는 드래곤 하트가 감지되지 않았다.
엘프이면서 고서클 마법사인 세르미온.
드래곤 하트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 폴리모프 했다 하더라도 드래곤 하트가 풍기는 강한 기운은 쉽게 감출 수 없다.
자연의 기운에 민감한 엘프들이었다.
웬만큼 각성되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른 엘프라면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아르테우스의 말을 무시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드래곤 피어라고 주장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진짜 드래곤 피어를 맞닥뜨리게 되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위, 위대한 존재시여!”
그 때 숲에서 아르테우스가 튀어 나왔다.
어디서 마수와 또 한바탕 싸움을 했는지 몰골이 엉망이 된 아르테우스.
감격에 찬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봤다.
“싸웠냐?”
“네…….”
“그래 어릴 때는 싸우면서 크는 거지.”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아르테우스를 향해 당연하다는 듯 하대를 하는 인간.
다른 엘프 전사들이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일족의 수치인 아르테우스.
어머니가 하이 엘프에 장로 신분이 아니었다면 오래 전에 추방당했을 수도 있었다.
“너 사고 치지 말고 다니랬지!”
“……미안.”
“너 때문에 우리 드워프 일족이 욕먹는 거야. 반반 섞여서 그렇다고.”
니마카라가 아르테우스를 추궁했다.
“잘못했어.”
“에휴. 내가 못살아.”
니마카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무는 아르테우스.
기죽은 듯한 얼굴과 달리 눈빛은 한없이 반짝였다.
오랜만에 만난 단짝 친구를 보며 크게 반가워했다.
반면 세르미온은 얼굴이 더 굳고 어둡게 변했다.
아들이 하프 드워프 여자 아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아 버렸다.
스윽.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인간이 결계 가까이 한걸음 더 다가왔다.
조금 전 신기로 결계를 후려치던 난폭한 파괴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결계를 부드럽게 만져왔다.
“안 돼!!!”
세르미온이 놀라 소리쳤다.
마법 자연 결계에 신체 일부라도 닿게 되는 순간 소멸 될 수 있었다.
오로지 중앙 산맥 큰사슴나무일족 엘프들만 제약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태어나는 순간 한 방울의 피를 내어 결계에 등록하는 과정을 거쳤다.
강력하기로 소문이 난 마수들도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그런 결계에 겁도 없이 인간이 손을 뻗었다.
결계가 반응하며 살기를 풍겼다.
손끝 하나만 닿아도 일순간 인간을 녹여버릴 기세다.
그러나.
너의 투명하고 맑은 눈이 빛나는구나……♬.
“헉!”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대 엘프어.
노래였다.
오직 하이 엘프 장로급 이상에 해당하는 이들만 알고 있는 언어다.
일반 엘프들은 알 수 없는 신의 신성한 주문어.
그 고귀한 주문이 인간의 입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스스스스슷.
결계가 요동쳤다.
살아 있는 생명체인 결계가 고대 엘프어에 반응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네 눈빛이 부드럽고 신비롭구나. 주저 말고 내 손을 잡으렴~♫.
네가 품고 있는 몇 겹의 빛의 손을 잡고 싶구나~♫.
들리는구나.
고요한 침묵의 소리가~♪.
바람으로 다가오는 너의 목소리.
이제는 손을 잡자.
너와 둘이 함께 내면에 품고 있는 숲의 신념을 위해 우리…… 서둘러 걷자꾸나.
노래가 끝났다.
유일하게 모든 걸 해석할 수 있는 세르미온의 얼굴.
백짓장처럼 핏기 하나 없이 변했다.
나머지 엘프들은 어리둥절했다.
인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비한 고대 엘프어의 주문.
팟!
마법 결계의 막이 하나 벗겨졌다.
그리고.
파바바바밧.
영롱한 빛으로 보호되던 결계 모두가 한 줄기 빛을 남기며 사라졌다.
오랜 세월 동안 엘프들을 지켜왔다던 신들의 힘이 가미된 결계.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세르미온이 크게 당황하며 인간의 정체를 물었다.
자신도 결계를 이렇게까지 자유롭게 통제할 수 없었다.
아니 다시 처음처럼 살려내지 못한다.
눈앞의 인간만이 결계를 다시 불러낼 수 있었다.
이제는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중요한 준재가 되어 버렸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부드러운 미소로 웃는 남자 인간.
“베커 장 크로얀 제국 황실수호공작이 숲의 친구들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올립니다.”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고 다시 상대를 가리키는 엘프들의 정통 인사법.
내 순수한 영혼이 당신 안의 신을 바라본다는 의미.
“……큰사슴나무일족의 장로 세르미온이 친구를 만납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같이 인사를 전하는 세르미온.
‘여왕님이 말한 사랑하는 신의 동생이라는 자가…… 진짜 찾아왔어!’
틀림없이 증명된 존재.
비로소 세르미온의 입가에 반가운 미소가 번졌다.
***
노래하듯 리듬을 섞어 비번을 읊조리는 순간 닭살이 돋았다.
누가 보면 절절한 연애시를 읊는 듯했을 결계의 주문.
노바 형님의 공이 컸다.
- 카르마 포인트가 계약자에게 지급되었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포인트도 넘치는 양반이 비자금 확실히 챙겨갔다.
안 봐도 뻔했다.
나중에 여왕 몰래 사건을(?) 칠 게 확실했다.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아주 신선하고 건강한 맛이 입에 착 달라붙습니다.”
“다행입니다. 인간이 찾아온 지 오래라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당황했습니다.”
세르미온 장로가 웃으며 말했다.
대접이라고 할 게 없었다.
듣도 보도 못한 과일이 나무 그릇에 가득했다.
찌거나 구운 요리 같은 음식은 없었다.
그저 과일, 과일, 과일이 끝없이 놓였다.
사실 이렇게 먹어야 엘프들처럼 유려한 몸매를 유지할 수 있는 거다.
먹고 싶은 거 다 먹다가는 드워프 동생이 될 수밖에 없다.
“……아르테우스, 너 매일 이거 먹고 살아?”
드워프 전사들은 자신들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엘프 마을에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드워프들.
한사코 거절했던 이유가 짐작됐다.
먹는 자리에 술과 고기가 없을 것을 알았던 거다.
이런 식단 그들에게는 고역일 건 안 봐도 빤했다.
다만 니마카라는 따라왔다.
“아마도…… 나도 채식주의자라…….”
아르테우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거짓말! 너 예전에 나와 함께 멧돼지 잡아서 구워 먹었잖아. 으흐흐.”
“내가 언제!”
티격태격하는 니마카라와 아르테우스의 모습은 보기 좋았다.
하프 종족으로 태어난 그들끼리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
그런 둘을 여러 감정이 담긴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르미온.
아무리 하프라지만 자신의 아들 일.
엘프도 모성본능 같은 기본 감정은 갖고 있을 것이다.
미래 며느리가 될지도 모르는 니마카라.
밀려드는 상상 속에서 아들을 보는 시선이 복잡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너희 둘. 나와 같이 가자.”
“네?”
“정말요?”
니마카라도 드워프 일족 사이에서 환영 받지 못했다.
아르테우스도 마찬가지.
일족들에게서는 멸시 받는 존재였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인적 자산이 될 충분한 요건이 됐다.
“그게 무슨…….”
세르미온이 당황하며 물었다.
“눈치를 보니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애들 교육 환경이나 정서적 측면에서 좋을 게 없습니다.”
“…….”
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세르미온.
인간인 내가 드워프와 엘프를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하지만 누구도 나의 진짜 정체를 정확히 몰랐다.
그리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니마카라와 아르테우스는 정신연령이 청소년 수준이다.
“둘을 통해 엘프와 드워프 일족과 소통할 생각입니다.”
“아!”
나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나와 연관이 되어 있으면 두 종족 모두 이 둘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가고 싶습니다. 보내 주십시오.”
아르테우스가 세르미온을 보며 강하게 말했다.
“아르테우스…… 인간 세상은 생각보다 힘든 곳이다.”
“이곳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날카로운 뼈가 담긴 대답.
“우리 엄마는 바쿨라 사제님을 따라가도 된다고 했어요!”
니마카라는 진작 허락을 받았다.
“괜찮겠습니까? 저 아이들은 아직 어립니다.”
그건 세르미온 아줌마 생각이다.
인간 기준으로 청소년 시기를 벗어나고 있었다.
“언제까지 품에서 안고 계실 생각입니까? 의식과 육신이 성장하면 독립하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세르미온님이 아르테우스의 남은 생과 죽음까지 대신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해줄 수 있는 말은 명쾌했다.
다 자란 새는 둥지를 떠나야 하는 법.
부모 눈에 미흡하고 흡족하지 않다고 자식들을 세상에 내보내지 않아 나중에는 사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세상은 정글과 같은 곳.
욕도 먹고 눈칫밥도 먹어 봐야 생존 능력이 생기고 차차 더 강해지는 법이다.
그래야 미래에 자기 자식도 키우고 가정도 지킬 수 있게 된다.
오냐오냐 다 받아주다 자립심마저 상실하고 폐인으로 전락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자식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다 부모 탓인 셈이다.
아르테우스가 딱 그 짝이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세르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의 신께서 좋은 길로 인도할 겁니다.”
이럴 때는 신을 팔아도 된다.
“너희 둘은 잠시 나가 있거라.”
“넵!”
“감사합니다. 장로님!!!”
신이 난 둘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세르미온 장로와 단 둘이 남았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로 말 없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움도 눈에 익으니 평범하게 보였다.
“다시 한 번 조금 전의 실수에 대해 사과를 드리는 바입니다.”
“괜찮습니다. 허락 없이 방문한 제 실수가 큽니다.”
엘프 마법 결계는 다시 살려 놨다.
나 아니면 닫거나 풀 수 없었던 상황.
이제는 장로인 세르미온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엘프 여왕이 갑작스럽게 떠나는 바람에 알 수 없었다는 결계 비번.
세르미온에게도 제대로 알려줬다.
엘프들에게 나는 은인이 확실했다.
“어떤 도움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왔다!
이제는 바짝 땡겨야 할 때.
엘프를 만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
“……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네? 마법요?”
“이동 마법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