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7장. 비번
“크으…….”
속이 타들어 갈 것 같은 답답함에 아르테우스는 신음을 흘렸다.
드래곤을 만났다는 자신의 말을 어머니를 비롯해 일족 누구도 믿지 않았다.
분명 드래곤 피어였다.
성에 거주하고 있던 황실수호공작은 유희 중인 드래곤이 확실했다.
일족에게로 즉시 돌아와 보고했지만 멍청하다고 구박만 받았다.
드래곤이 곧 찾아올 거라는 말도 전했지만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물며 장로인 어머니는 한숨까지 내쉬었다.
어떤 이유로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드래곤들.
오래전에 잊힌 전설이 되어버렸다.
“젠장.”
드워프 전사의 피가 반쯤 섞인 아르테우스는 엘프들의 사회가 답답했다.
산맥은 살아가는 데 좁았다.
미친 듯 매일처럼 싸돌아다녔지만 답답한 마음은 해소되지 않고 숨만 더 막혔다.
무료하고 갑갑한 생활에서 벗어나 산에서 내려가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는 순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답은 뻔했다.
과거 인간들은 엘프들을 사냥했다.
엘프들은 포획당해 마탑으로 팔려가거나 귀족들의 성노예가 될 것이다.
인간들과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는 이종족.
오늘도 잔뜩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아르테우스는 산맥을 휘젓고 다녔다.
일반 몬스터들은 거주할 수 없는 중앙산맥.
등급 높은 마수들과 한바탕 맞짱을 떴다.
아예 목숨을 내놓고 싸웠다.
정령과 마법을 사용하는 엘프의 능력과 드워프 전사 피를 뜨겁게 물려받은 아르테우스.
마법을 사용해 몸을 치료하고 회복했지만 안에 입은 미스릴 갑옷이 상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이 정도 발악을 하며 몸을 상해야 숨통이 터졌다.
숨이 목에 찰 만큼 죽음 직전까지 긴장하고 피를 봐야 살 것 같았다.
“왜 안 오는 거야? 무늬만 드래곤이었던 거야?”
그나마 말이 통했던 하프 드워프 니마카라를 만날 수가 없었다.
드워프들이 자신만 보면 잡아먹을 듯 화를 냈다.
반쪽짜리 못생긴 드워프라고 야유했다.
참는 수밖에 없었다.
자칫 하나뿐인 친구에게 화가 미칠 수 있었다.
이래저래 요즘 심란한 아르테우스.
반항심만 자꾸 커졌다.
“나쁜 드래곤……. 나타나기만 해봐!”
꽃청춘 하프 엘프는 전의를 불태웠다.
드래곤이 곧 찾아오겠다는 말을 철썩 같이 믿었는데 아니었다.
“응?”
마을로 들어가는 결계를 향해 걷던 아르테우스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평소 보기 드문 드워프 전사들이 갑옷으로 무장한 채 결계 입구에 서 있었다.
그들이 풍겨내는 사나운 기운.
분위기만 봐서는 곧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어머니?”
결계 안쪽으로 엘프 전사들과 어머니가 보였다.
보기 드문 상황이었다.
장로급인 어머니가 직접 이곳까지 나왔다는 건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는 의미했다.
“어!!!”
크게 놀란 아르테우스.
고만고만한 드워프들 사이에 불쑥 솟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드, 드래곤!”
그 드래곤이 맞았다.
니마카라가 공손한 자세로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내 말이 맞잖아!”
아르테우스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자신이 그토록 외쳤던 진실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
“응?”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드래곤과 엘프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거칠었다.
위험한 신호다.
“안 돼!!!”
아르테우스는 무엇보다 어머니가 걱정 됐다.
드래곤과의 사이에 싸움이 붙으면 두 일족은 전멸 할 수도 있었다.
불에 기름을 부은 듯 모조리 타올라 소멸돼 버릴 것이다.
말려야 했다.
타다다닷.
바람처럼 내달렸다.
그때.
파아앗!
미세한 마력이 요동쳤다.
“!!!”
가공할 만한 기세에 아르테우스는 그대로 멈췄다.
기이하고 가늠하기 힘든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드래곤이 아공간을 열었다.
엘프들이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드러나는 드워프들이 사용하는 새카만 거대 망치.
신기(神器).
신이 사용하는 기물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쇄앳.
말릴 틈도 없이 사태가 심각해졌다.
찰나의 순간에 그대로 보호 결계를 후려치는 거대한 망치.
쩌어어어어엉!
맑게 울려 퍼지는 소음.
그리고…….
***
‘신의 망치!!!’
지혜와 지식이 넘쳐흐르는 엘프족의 장로 세르미온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드워프들이 신성시하는 대장장이 신 바쿨라가 사용했다는 전설의 망치가 눈앞에 나타났다.
놀랄 틈도 없이 주저하지 않고 결계를 향해 내려치는 인간.
쩌저적 쩌저저저저저적.
드래곤이 아니면 부술 수 없다는 여왕님이 설치한 보호 마법진이 비명을 토했다.
신성한 숲의 기운을 끌어다 사용한 만큼 방어력이 대단했다.
장로인 세르미온도 겨우 간간이 유지 보수 정도만 가능했다.
그런 마력 결계가 신기에 얻어맞아 크게 출렁였다.
다행히 부셔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충격을 받았음에도 파장이 엄청났다.
드워프들이 보호하던 신의 망치를 사용하는 인간은 지금껏 없었다.
아니 드워프들도 사용 못한 지 1000년 세월이 더 넘었다.
‘도대체 누구…….’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감추며 세르미온은 인간을 자세히 살폈다.
보통 인간치고는 풍기는 아름다움이 예사롭지 않았다.
유전적으로 여러 신들에게 축복받아 탄생한 엘프 못지않은 신체와 외모였다.
근육결도 남달랐다.
뭔가 비밀을 갖고 있는 듯한 인간.
‘설마!!!’
그 순간 세르미온은 방금 전 꾼 꿈을 떠올렸다.
엘프 여왕이 직접 찾아와 신탁을 내렸다.
여왕이 말한 ‘사랑하는 신의 동생’이라는 자.
쿵! 쿵! 쿵!
냉정하게 유지되던 세르미온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만약 저 인간이 여왕이 말한 그가 맞다면…….
“어? 단단하네.”
신의 망치를 한 차례 내려친 뒤 깨지지 않는 결계를 바라보며 인상을 쓰는 인간.
“한 번 해보자는 거지?”
망치를 다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쩡! 쩌엉! 쩌어엉! 쩌저저저정!
쉬지 않고 결계를 향해 폭풍 망치질을 시작했다.
쩌저적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적.
결계가 찢어질 듯 비명을 내질렀다.
방어하고 있지만 자연의 기운을 사용한 결계인 만큼 살아 있어 고통을 호소했다.
충격을 받으며 신음하는 결계.
비명과 망치질이 반복될수록 세르미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 누구보다 무식한 인간.
엘프와 드워프 앞에서 힘 자랑 중이었다.
“…….”
모두들 멍하니 결계와 씨름하고 있는 인간을 멍하니 바라봤다.
다들 결계를 내리치는 망치가 자신을 내리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을 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중앙 산맥에서 누구보다 무식함을 자랑하는 드워프 전사들이 도리어 쫄았다.
엘프들도 마찬가지.
지금까지 저렇게 광포하고 무지한 결계 파괴 도전자는 그들 기억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
세르미온이 소리쳤다.
결계가 지르는 비명을 더 참을 수 없었다.
뚝.
망치질이 멈췄다.
“……그만하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결계는 부서지지 않습니다.”
세르미온은 인간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 결계를 통과하지 못하면 여왕님이 보낸 자가 아니다.’
아무리 여왕의 계시가 있었고 해도 어느 정도 확인이 필요했다.
세르미온은 결계를 기준점으로 삼았다.
결코 선택된 엘프들이 아니면 열리지 않는 결계.
이곳에는 감춰진 비밀이 존재했다.
‘불가능해. 드래곤이 아니라면.’
세르미온은 확신했다.
“잠시 쉬었다 할까요?”
인간 남자는 포기를 몰랐다.
그리고.
“노바 형!”
인간이 갑자기 누군가를 찾았다.
***
파앗!
빛과 함께 노바 형이 나타났다.
지구가 아닌 이곳에서 아주 살림 차리고 살다시피 하는 노바 형.
와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과거 찌질했던 신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에게 야동 CD를 팔아먹었던 당시의 노바 형님이 아니었다.
머리에 쓰고 있는 큼직한 보석이 박혀 있는 황금 면류관.
빛나는 새하얀 망토는 고대 그리스 신전의 최고위 신이나 걸쳤을 만한 최고급품이었다.
그리고 한쪽에 짚고 있는 투명하게 빛나는 큼지막한 수정 지팡이.
입가에 인자한 미소까지 짓고 있는 모습이 진짜 품격이 높은 신 같았다.
- 오랜만이다. 동생.
“형님……. 잘 나가시나 봅니다.”
공간과 시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우선 여러 의미가 담긴 질문을 했다.
- 여자 친구 잘 만나면 너도 나처럼 될 수 있다.
눈빛을 보니 엘프 여왕을 진짜 사랑하는 것 같았다.
말로만 듣던 셔터맨 신이 눈앞에 있었다.
“부럽습니다.”
- 나도 내가 부럽다. 크크크.
물론 인간이나 신이나 본성이 쉽게 바뀌는 건 아니다.
자화자찬이 극에 이르렀다.
“잘 나가시면 제 포인트 돌려주십시오.”
계약으로 맺어진 포인트 지출.
노바 형님과 결산이 필요한 시점이 온 것 같다.
- 태산아.
“네. 형님.”
- 네가 결혼 생활을 몰라서 그런 말 하는 거다.
“네?”
- 남자의 어깨와 허세는 비자금에서 나오는 법이다.
“아!”
이해가 빨리 됐다.
노바 형님이 엘프 여왕님께 통장 잔고 까고 살 분은 아니다.
- 포인트 아깝냐?
“아니 그게 아니라…….”
- 네가 몰라서 그렇지. 널 위해 내가 요즘 바빴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노바 형님이 날 위해 뭘 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신계에서 여왕님과 깨소금 볶고 지냈을 노바 형님.
- 여자 친구 통해서 얘들한테 통보해 놨다.
“뭘요?”
- 너를 여왕처럼 받들라고 말이다.
“그래요? 그런데 왜 저럽니까?”
나를 향한 시선에 생각이 많은 속내 복잡한 엘프 여장로.
그녀는 절대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 네가 여자 마음을 아느냐?
노바 형님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심오한 질문.
- 넌 아직 멀었다. 하수들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고도의 테크닉이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내가 주변에 여자가 많아도 노바 형님에게 한참 못 미친다는 건 인정해야 했다.
- 무식하게 남자가 망치로……. 쯧쯧.
형님은 손에 들린 신의 망치를 힐끔 쳐다보며 혀를 찼다.
“결계가 조건인데 어떡합니까. 제가 가진 강력한 패가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 그래서 날 부른 거 아냐?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혔다.
엘프 여왕의 신계 남자 친구인 노바 형님.
뭔가 대책이 있을 것이다.
“방법이 있습니까?”
은근 기대하며 물었다.
- 당연하지.
“뭡니까?”
- 흐흐흐. 내가 너 때문에 요즘 밤마다 힘썼다는 것만 알아다오. 나 포인트 거저먹는 의리 없는 신선 아니다.
“넵! 전 처음부터 형님을 믿었습니다.”
우리의 우정은(?) 남달랐다.
그건 노바 형님과 나만 아는 사적인 비밀.
- 이 결계에 신들의 축복이 깃들어 있다. 같은 신기로는 파괴 못한다.
“그럼 어떻게…….”
- 비번 알려줄게.
“비, 비번요???”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