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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장. 만남의 조건 (633/1,284)

636장. 만남의 조건

- 내가 사랑하는 숲의 아이야…….

“여왕님!”

- 너를 위해 내가 선물을 보냈다.

“선물요?”

큰 나무 사슴 일족의 장로 세르미온은 생생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라도 꼭 한 번 보고 싶었던 엘프 여왕의 방문.

물질 세계를 떠나 신이 되었을 그녀.

선명하게 나타나 새하얀 빛에 휩싸인 채 세르미온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어린 시절 그랬듯 여왕의 손길에는 그녀의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신의 동생이다.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이니……. 그를 나처럼 섬겨다오.

‘인간이…… 신의 동생?’

꿈속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이었지만 이것은 분명 신의 계시.

그 사실을 세르미온은 직감했다.

실제처럼 너무나 생생했다.

어린 시절 여왕과 자주 갔던 신비의 나무숲이 배경이었다.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각종 열매들과 푸른 하늘을 닮은 깨끗한 공기.

주변으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마치 천국과 같았다.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던 여왕의 모습.

세르미온을 무릎에 눕히고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자신처럼 누군가를 잘못 사랑한 죄로 숲의 정령이 되어 사라졌다.

그런 여왕이 행복한 미소를 보였다.

‘행복하다니…… 다행입니다.’

자연 친화적인 삶을 영위하는 엘프도 온갖 감정을 소유했다.

대대로 숲에 살면서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인간처럼 희로애락을 느끼고 살았다.

다만 자연에서 배운 지혜를 삶에 더 깊이 투영하며 살 뿐이다.

태어나 성장하고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이치를 매일 반복해 명상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이슬 같음을 선조들은 누누이 전해왔다.

죽음을 떠나 있는 자유로움을 알기에 인간들처럼 삶에 집착하며 아등바등 살지 않았다.

먹거리도 대부분 자연에서 얻었고 능력도 뛰어나 숲에서의 삶은 늘 평화로웠다.

가끔 일어나는 번뇌도 슬기로운 선배들과 선조들의 격언으로 물리쳤다.

하지만 그 놈의 사랑에서는 엘프들도 당황스러울 때가 있었다.

성년이 된 엘프들에게 어느 날 신병처럼 찾아오는 사랑의 열병.

종족 번식을 위한 신의 선물이자 형벌.

그때가 되면 대부분의 엘프들은 짝을 찾았다.

욕심 없을 엘프들에게 허락된 가장 큰 감정.

그 시기는 모두 달랐다.

엘프 여왕처럼 뒤늦게 올 때도 많았다.

엘프가 아닌 다른 종족을 상대로 만난 엘프들은 대부분 뼈아픈 후회를 경험했다.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연과 신의 섭리로 받아들였지만 모두 다 감내하는 건 아니었다.

- 숲의 아이야……. 넌 행복하 거라. 참고 인내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란다.

“여왕님이시여…….”

하이 엘프이자 장로라는 막중한 임무를 어깨에 멘 세르미온.

그녀를 어린 아이를 대하듯 부르는 엘프 여왕.

오직 그녀만이 세르미온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었다.

드워프 혼혈 자식으로 고뇌하는 세르미온.

- 숲의 아이야. 진리를 깨닫거라. 나는 얻지 못했던 바른 가르침을 얻어 부디……. 너를 스스로 자유하게 하거라…….

파아앗.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기고 빛으로 사라지는 여왕.

“여왕님!!!”

아쉬움에 세르미온은 소리쳐 사라지는 여왕을 불렀다.

벌떡.

손을 뻗은 채 그대로 나무 침대에서 일어난 세르미온.

긴 기다림에 비해 무척 짧은 만남이었다.

“진리를 얻어 스스로 자유하게 하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수백 년을 명상하며 살라온 세르미온에게도 어려운 숙제였다.

머릿속에 박혀버린 여왕의 말.

세르미온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 때.

“세리미온 장로님.”

문 밖에서 조심스런 엘프 전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장로라지만 소박하기 그지없는 나무로 만들어진 집.

세르미온은 몸을 일으켰다.

엘프 전사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요?”

“…… 드워프들이 결계로 찾아왔습니다.”

“드워프들이요?”

넓은 중앙 산맥에서 같이 살아가고 있는 이종족인 드워프.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특별히 왕래는 없었다.

자연을 파괴하며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드워프들.

엘프들에게는 못마땅한 존재였다.

반면 드워프들은 고상 떠는 엘프들을 싫어했다.

불과 기름 같은 두 종족.

그러다 보니 세르미온이 드워프 혼혈을 낳았을 때 파장이 그만큼 엄청 났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함께입니다.”

“인간요???”

드워프는 인간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작품을 헐값에 매입해 비싸게 되팔아먹는 사기꾼 취급을 했다.

그런 드워프들이 인간과 함께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대우가 극진합니다. 드워프 경비대장이 호위 하고 있습니다.”

“네?”

“바람의 소리로 들어보니 그 인간을 신성한 사제로 모시는 것 같습니다.”

“!!!”

‘자존심 강한 드워프들이?’

세르미온은 당황스러웠다.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엘프들은 마법과 정령을 다뤘다.

특이한 마력을 타고는 드워프들도 전투력에서는 상대가 안 됐다.

‘인간이라고…… 인간.’

보통 때 같았다면 냉정하게 쫒아냈을 것이다.

인간들과 접촉하지 않은 세월이 상당히 길었다.

드워프들처럼 굳이 물건을 팔아 살아갈 필요가 없는 엘프.

오래 전 인간들의 전쟁에 휩쓸려 일족들 상당수가 소멸했다.

그때 이후 엘프들은 인간들과의 접촉을 꺼렸다.

특히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더욱 더.

“내가 가보겠습니다.”

“장로님이요?”

“네. 제가 가겠습니다.”

웬만해서는 타 종족을 상대하지 않는 엘프 장로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임이 높은 하이엘프 장로 세르미온.

그녀는 걸음을 밖으로 향했다.

‘숲의 정령들과 여왕이시여. 저를 지혜롭게 하소서.’

***

위이이잉 위이잉.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지만 내 눈에는 분명하게 보이는 결계.

대단했다.

깊은 산맥의 거대한 산 정상 부근에 설치된 마법 결계는 계속해서 마력을 뿜어냈다.

스펙트럼을 통해 분석되는 태양빛처럼 갖가지 색깔이 섞여 있었다.

마력에서 뽑아낸 게 아니라 자연의 힘을 이용한 결계.

내 마력으로도 뚫고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베커 님. 엘프들이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독합니다. 드래곤 말고는 세상에 두려워하는 존재들이 없습니다.”

나를 따라온 드워프 경비대장 우르스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결계 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결계 안쪽 숲속 깊은 곳에서 감지되는 10여 명의 엘프들.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얼추 사이즈가 나왔다.

진짜 길었다.

옷에 착용한 미스릴 갑옷도 보통 옷감처럼 부드러운지 바람에 날렸다.

드워프가 제조한 미스릴 갑옷이 일반 커피라면 엘프 제조품은 고급 원두 커피였다.

그런 그들을 자존심으로 먹고 사는 드워프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그건 편견이에요!”

영업이사라 뻥을 쳤던 니마카라가 반박했다.

“니마카라 니가 몰라서 그래.”

“아르테우스는 안 그래요!”

“걔는 드워프의 피가 섞여서 그래.”

“……그러면서 드워프라고 인정하지는 않잖아요.”

“……인정하기에는 너무 못생겼다. 조상님들이 욕할 거다.”

성에 방문했던 드워프와 엘프의 혼혈인 아르테우스를 두고 못생겼다고 디스하는 드워프 전사.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납득하기 힘들었다.

누가 봐도 드워프들은 모든 미적 기준에 한참 모자란 외모였다.

평균 신장이 150도 안 됐다.

다리는 짧고 허벅지와 몸통, 얼굴과 손까지 모두 터질 듯 부풀었다.

추남의 모든 조건을 두루 갖췄다는 말이 더 맞았다.

“나도 마찬가지로 못생겼겠군.”

“아, 아닙니다! 어찌 바쿨라님의 사제를…….”

격하게 손사래를 쳤지만 우르스 눈동자에는 당황함이 가득했다.

드워프들 눈에 나는 어디 내놓을 수도 없을 만큼의 엄청난 추남이었다.

키도 크고 턱수염 없고 얼굴도 반질반질했다.

전혀 남자답지 못한 인간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난 신의 사제로 대우를 받았다.

어제 영문도 모른 채 망치를 들고 신의 화로에 불을 붙였다.

거의 무의식 중에 벌어진 일.

이계에서 능력을 줬던 대장장이신 바쿨라가 강림했다.

신의 망치를 휘두른 직후 모든 상황 정리는 끝났다.

드워프들이 나를 신의 사자로 대우했다.

선물도 받았다.

신전 깊숙한 창고에 보관되어 온 보물을 영접할 수 있는 창고 열쇠였다.

열쇠를 따고 안에 들어갔을 때 난 눈물을 쏟을 뻔했다.

차곡차곡 쟁여져 있던 마력 갑옷을 비롯한 상상을 뛰어넘을 만한 드워프들의 무구.

마수들을 사냥해 뽑아 놓은 상, 중, 하의 마력석 수백 개가 황홀하게 날 반겼다.

뿐만 아니라 바닥에 돌 대신 깔려 있던 황금 바닥판.

벼락부자가 됐다.

지구에서는 숫자로 재산이 불고 줄었지만 여기는 모두가 다 현물이었다.

종이 쪼가리에 새겨진 숫자 같은 건 취급도 하지 않는 이 세계.

아린을 밀어줄 만큼 충분했다.

마력 갑옷은 신축성 있는 재료로 만들어졌다.

드워프들도 인간들에게 팔아먹으려고 인간 맞춤형으로 제조해 놨던 것.

흐뭇하게 마음으로 한참을 보물창고 내부를 구경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드워프 마을은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푸른빛의 신의 화로.

양질의 미스릴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고 드워프들은 좋아라 했다.

뜻하지 않게 밤새 먹고 마셨다.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술에 취했다.

본격적으로 드워프계의 미녀들이(?) 추파를 보냈다.

알코올 기운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거친 윙크와 두툼한 몸짓에 온 몸에 닭살이 돋았다.

종족 차별하는 남자는 아니었는데 드워프 미녀들은 죽어도 아니었다.

그렇게 날이 밝았다.

근처 온 김에 엘프들과도 만나보고 싶었다.

중앙 산맥의 실질적 주인이 엘프였다.

드래곤보다는 못하지만 인간들보다는 월등히 뛰어난 마법 재능.

탐났다.

잘만 되면 더럽고 치사한 인간 마탑 마법사들에게 아쉬운 소리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궁금한 것들도 있었다.

지구에까지 암암리에 소문이 자자하게 나 있는 엘프라는 종족.

이계에서 만나보고 싶은 종족 1순위였다.

“옵니다!”

그때 전사들 10여 명과 동행한 우르스가 한쪽 숲을 바라봤다.

사라락 사라락.

미세하게 들리는 발걸음 소리.

눈이 커졌다.

중요한 미지의 종족과의 접촉.

하프 엘프 아르테우스와 다른 진짜 엘프를 드디어 만나게 되는 순간.

남녀로 구성된 약 20여 명의 엘프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아니 천천히 다가온다는 건 착각이었다.

순식간에 바람처럼 바로 앞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엘프들.

“세…… 르미온 장로!”

우르스의 당황한 목소리.

엘프들의 중앙에 선 여자 엘프.

아! 아름다워라.

슈퍼 모델처럼 큰 키에 기다란 은발…….

마른 듯하면서도 허전하지 않은 완벽한 몸매.

고고하고 도도했다.

태생 자체가 고귀한 핏줄이라는 걸 사방으로 번지는 후광이 증명하고 있었다.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와 오뚝한 콧날.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색 눈동자는 티 없이 맑았다.

러시아 연방국가 초절정 미녀들도 그녀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만한 엄청난 미녀 엘프.

잠시 그녀의 미모를 넋을 놓고 감상했다.

다만.

“어! 아줌마다!”

기가 막힌 순간을 깨는 니마카라의 목소리.

헐! 아줌마란다!

“아르테우스의 어머니이자 엘프 일족의 장로인 하이 엘프입니다.”

우르스의 추가 설명.

잠시 흔들리던 마음이 진정이 됐다.

“여기는 그대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대지입니다.”

조용히 결계 안에서 나풀거리는 세르미온의 입술.

목소리는 차분하고 고요했지만 담겨 있는 기운은 무시무시했다.

“흥!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르스가 발끈했다.

드워프들 성격 참 급했다.

내가 나설 거라 그렇게 당부를 해 놓았는데 금세 잊어버렸다.

저 성격으로 정교한 금속 공예품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했다.

파바밧.

엘프들 눈빛이 변했다.

자신들이 모시는 장로에 대한 거친 말투에 기분이 나빠진 듯했다.

분위기가 안 좋게 흘러갔다.

그러나 나는 엘프들이 꼭 필요했다.

“도움을 청하고자 왔습니다.”

정중하게 나갔다.

“……인간은 더욱더 허락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도와줄 일이 없습니다.”

들어보지도 않고 단박에 거절하는 세르미온.

그녀와 눈빛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인간에 대한 거부감이 남다른 엘프들.

그럼 방법은.

“대화할 방법이 정녕 없습니까?”

세르미온 아줌마 엘프를 보며 재차 물었다.

팟!

순간 그녀 눈빛에 흐르는 약간의 호기심.

“……방법은 있습니다.”

“뭡니까?”

“자격을 증면하면 허락됩니다.”

“어떤 자격 말입니까?”

“……이 결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열고 들어오십시오,”

“말도 안 됩니다! 드래곤도 아니고 이 결계를…….”

경비대장 우르스가 흥분했다.

“그래요? 정녕 그거 하나면 됩니까?”

나도 모르게 씨익 피어나는 감출 수 없는 미소.

세르미온이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는…….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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