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5장. 바쿨라
“다들 너무해……. 왜 내 말을 안 믿는 거야…….”
니마카라는 몹시 울적했다.
아무리 하프 드워프라지만 일족의 피를 이어 받은 드워프인 건 분명했다.
모두가 니마카라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드래곤 피어가 확실했어! 내가 아직 네 발로 기는 거짓말쟁이 드워프도 아니고! 다들 왜 안 믿는 건데! 이렇고 있다 드래곤 화나면 모두 죽는다고!”
니마카라는 속이 이만저만 상한 게 아니었다.
베커 황실수호공작은 인간들 세상에 침투해 있는 드래곤이 확실했다.
힘 좀 쓰는 엘프 장로의 하프 아들인 아르테우스가 찍 소리도 내지 못했다.
마력과 마나에 민감한 엘프가 드래곤을 모를 리 없었다.
드워프 마을에 도착한 즉시 드래곤 출현을 알렸다.
위대한 존재가 곧 이곳을 방문할 거라고 똑똑히 전했다.
잠시 소동이 일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인상착의와 여러 상황을 묻는가 싶더니 모두 니마카라를 무시하고 돌아섰다.
소문은 들어 익히 어느 정도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던 옛 베르샤 성의 영주.
드워프 이름으로 물건을 팔아먹는 사기꾼이라 생각하고 곧 일족 해결사들이 찾아갈 예정이었다.
간간이 드워프 제품이라며 물건을 속여 팔아먹는 인간들이 나타나고는 했었다.
어느 순간부터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자존심 강한 드래곤이 그럴 리가 없었다.
속이 타들어가는 니마카라.
사실을 전했음에도 근신 처분이 떨어졌다.
하프 엘프나 만나고 다니는 못생긴 드워프 여자.
드워프들도 추악한 인간들처럼 추녀에게는 더 엄격했고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엄마도 마찬가지.
도리어 말도 안 되는 엄포를 놓으며 잔소리를 했다.
그러다 엘프와 눈이라도 맞으면 종족 망신 제대로 시키는 꼴이라고…….
둘 사이에서 태어날 2세는 몸에 털도 없이 저주 받은 몰골로 살게 될 거라는 악담까지 퍼부었다.
“엄마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어?”
여성 드워프들 중에서도 상당한 미모를 자랑했던 엄마.
튼튼한 두 다리와 굵은 허벅지, 그리고 바위 같은 엉덩이.
윤기가 흐르는 온몸을 덮은 털이 뭇 드워프 남성들의 눈을 사로잡으며 설레게 했다.
콧대가 천공을 찌를 듯 높았던 엄마.
재앙은 예기치 않게 콧대 높은 엄마를 덮쳤다.
상인을 따라온 인간 용병과 눈이 맞았던 것.
상인들과의 만족스러운 거래에 족장이 술을 풀었고 그걸 마시고 취한 인간 용병과 드워프 엄마가 그날 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던 것이다.
다음 날 날이 밝고 눈을 뜬 둘은 서로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재수 없게 키만 멀대 같이 컸던 인간.
이목구비도 밋밋하고 턱수염도 별로 없던 인간은 큰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상인들과 함께 도망치듯 떠나 버렸다.
엄마도 음주로 인한 사고라 생각하고 그날 밤의 기억을 털어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이상한 것을 깨닫게 됐다.
니마카라를 임신한 것.
낙태가 허락되지 않는 율법에 의해 세상 빛을 보게 된 니마카라.
안타깝게 엄마를 닮지 않고 인간을 닮은 외모로 태어났다.
“그런데 왜 안 와? 온다며? 드래곤이라면 이럴 때 짠하고 나타나 내 말이 진실이라는 걸 밝혀줘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드워프들 돈 많다고 다 알려줬는데……. 줘도 못 먹어? 진짜가 아니었던 거야? 그럼…… 짝퉁?”
드워프 마을에서 그렇게 멀지 않는 계곡 근처 바위 위에 서서 니마카라는 혼자 화를 냈다.
곧바로 들이닥쳐 한탕 털어갈 것 같던 기세의 드래곤이 확실한 인간 공작.
어차피 먹지도 못하고 팔지도 못하는 물건들 싹 쓸어가 버리기를 은근히 바랐다.
매일 망치질과 광물들을 만지는 재미로 살아가는 일족들이 답답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니마카라.
그곳에서 목 좋은 자리를 마련해 드워프 물건을 팔며 부유하게 살고 싶었다.
맛좋은 맥주, 포도주 그리고 영혼까지 태워버리는 화끈한 용병술을 매일 마시며 뜨겁게 한 생 불사르고 싶은 니마카라였다.
스윽.
그녀는 아직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바로 옆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는 걸 말이다.
“마수 같은 드래곤 같으니라고! 나타나기만 해봐! 내가 확…….”
“확 뭐? 패주게?”
“그렇지! 그 못생긴 드래곤 얼굴을 이 강철 같은 주먹으로……!!”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대꾸하던 니마카라는 순간 얼어붙어 말을 멈췄다.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
그놈이다.
영혼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목소리의 기억이 온몸을 지배해 왔다.
털썩.
고개를 감히 돌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위 위에 무릎을 꿇고 만 니마카라.
‘X됐다!’
어렸을 때부터 말썽을 부리거나 늦게 잠자리에 들 때면 엄마가 말했다.
무서운 드래곤이 나타나 털도 안 뽑고 한 입에 잡아먹는다고.
“위, 위대한 존재시여……. 제가 아침밥을 잘못 먹어 실언을…….”
“됐고.”
화가 난 듯 단번에 말을 자르는 인간의 탈을 쓰고 나타난 드래곤.
‘이대로…… 끝나는 건가……!’
미약한 꿈도 채 이루지 못하고 스러져야 하는 허망한 드워프 삶.
이렇게 끝나려고 태어난 게 아닌데 너무 억울했다.
“앞장 서.”
“네? 어디를요?”
예상했던 시나리오대로 흐르지 않는 상황.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드래곤이 길 안내를 요구했다.
성격이 포악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드래곤은 절대 자신을 모욕한 어떤 존재도 용서치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어디긴 어디야. 드워프 마을.”
‘아! 일족을 깡그리 죽이려고 그러는구나!’
역시 잔인한 드래곤의 심성.
“안내 안 해?”
“갑니다! 가요!”
니마카라는 바위 위에서 스프링처럼 튀어 일어났다.
절대 거역할 수 없었다.
드워프는 언제나 드래곤의 한 입 거리밖에 안 됐으니까.
***
“???”
“인간…… 아냐?”
“니마카라가 왜?”
중앙산맥을 다스리는 드워프 일족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재수 없게 못생긴 인간 하나와 함께 마을로 들어서는 니마카라.
멀리서부터 그 모습을 보며 수군거렸다.
하프 엘프와 함께 인간성에 내려가 드래곤을 봤다고 헛소리를 했던 니마카라.
목줄 없는 개처럼 인간 앞에서 졸졸 거리며 앞장서 등장했다.
수천 명이 넘는 드워프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는 마을은 금세 조용해졌다.
위대한 대장장이 신 바쿨라를 모시는 중앙 신전을 향해 뻗은 대로.
저벅저벅.
둘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주변에 어슬렁거리던 마수들은 대부분 소탕해 마을은 특별히 외각 경비가 없이도 평화로웠다.
언제든 마수가 출몰하면 모두가 용맹한 전사가 됐다.
평화가 넘쳐 드워프들은 평소처럼 자신들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곳곳의 대장간에서 항상 들려오던 망치 소리가 뚝 멈췄다.
터더더덕.
그제야 마을 경비를 책임지는 드워프 전사들이 나타났다.
온몸에 미스릴로 제작한 마법 갑옷과 무기를 들고 나타난 그들.
“멈춰라!”
길을 막아섰다.
손에 들린 창과 도끼에서 연신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니마카라!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더냐! 감히 인간을 허락도 없이 마을 안으로 들이다니!”
전사를 이끌고 있던 경비대장 우르스가 호통을 쳤다.
분노로 일그러진 눈동자가 활활 타올랐다.
“그게 대장님…… 여기 이분이…….”
니마카라가 혐오스럽게 생긴 인간을 한 번 돌아보며 바짝 긴장한 채 입을 열었다.
“뭐? 이자가 네가 말하던 그 드래곤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네…….”
“!!!”
니마카라 말에 우르스의 두 눈이 황소 눈망울처럼 커졌다.
‘드래곤?’
아무리 봐도 무장하지 않은 채 깊은 산맥에 들어온 무식한 인간.
방랑자처럼 로브에 가죽 망토만 둘렀을 뿐이다.
그리고 입가에 피어 있는 묘한 저 미소.
꿀꺽.
우르스는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드워프 전사들이 포위한 상태에서도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는 인간.
이런 인간은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물었다.
더군다나 이곳까지 오면서 어느 한 군데 흠도 없이 멀쩡했다.
그건 보지 않아도 강하다는 의미.
그래도 드래곤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좀 어리숙해 보였다.
단 한 번도 실제 본 적이 없지만 위대한 드래곤이 저런 몰골일 리는 없었다.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른 드워프들도 선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못했다.
드래곤이라는 말을 듣고 섣불리 나설 간 큰 드워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진실로 위대한 존재십니까?”
백발을 뒤로 깔끔하게 묶고 뒤뚱거리며 앞으로 나서는 한 존재.
중앙산맥 드워프의 족장 탕그르였다.
드워프들의 시선이 인간에게 쏠렸다.
드래곤인지 아닌지가 무척 중요한 순간.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드워프가 포위한 상태에서도 인간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그만큼 강한 힘을 갖고 있다는 의미.
잘못 내뱉은 말 한마디가 일족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아리송한 대답.
“그 말씀은…….”
드래곤과 인연이 있다는 의미 정도로 해석할 수 있었다.
탕그르는 인간의 눈치를 자세히 살폈다.
자신도 본 적 없는 드래곤.
선조들로부터 교육받으며 수없이 많은 사례의 경고를 들었다.
드래곤이 나타나면 무조건 요구하는 바를 다 들어주라 했다.
“난 드래곤이자 인간이며 드워프다.”
“???”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대답.
저벅저벅.
그가 앞으로 나아갔다.
드워프들이 섬기는 위대한 대장장이 신 바쿨라의 신전.
거대한 화로가 개방된 채 보였다.
그 위를 덮고 있는 지붕과 거대한 망치 형상의 조형물은 드워프들의 자존심이었다.
그런 신전을 향해 인간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저……!!!”
경비대장 우르스는 당황했다.
신성한 신전 안은 누구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드워프에게는 사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신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신전의 화로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말릴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했다.
스윽.
그때 족장의 손이 올라갔다.
모두들 지켜보라는 신호.
드워프들이 잔뜩 숨을 죽였다.
드래곤이자 인간이며 드워프라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
도저히 말의 뜻이 이해 불가능했다.
처단은 잠시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드워프들은 여자라고 해도 인간 기사급의 전투력을 보유했다.
발달한 근육과 체력.
그리고 육체에 내재돼 있는 기본적인 불의 마력은 마수들도 두려워할 정도다.
적은 숫자로도 험난한 산맥에 터전을 잡고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다.
“어!”
“저저저저!”
“미친!!!”
그때 인간이 신전 안의 화로 앞에 놓여 있는 신의 망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쿨라가 생전에 사용했다는 신의 망치.
먼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을 제련해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왔다.
온통 새카만 망치는 그 어떤 물질로도 파괴할 수 없었다.
과거 바쿨라가 친구였던 드래곤과 힘을 합쳐 완성했다는 전설의 대장장이 무기.
그 무게만도 엄청났다.
드워프들 몇이 힘을 합쳐서야 겨우 들어 옮길 수 있을 정도였다.
동시에 두렵고 무서운 물건이었다.
바쿨라 신성이 담겨 있어 허락되지 않은 자가 잡을 경우 신의 불길에 휩싸여 타죽을 수 있었다.
중앙산맥 드워프들 마을에 이 신의 망치가 있어 장자 종족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 바쿨라의 신성 망치를 쥐려고 하는 인간.
‘죽으면 안 되는데!’
니마카라를 속이 바짝바짝 탔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유일한 기회.
저 인간은 반드시 드래곤이 맞아야 했다.
지금껏 일족들에게 당했던 수모와 멸시를 단박에 해소해 줄 은인이었다.
일족의 안위는 차후 문제였다.
일단 나부터 살고자 하는 인간의 피가 소용돌이치는 니마카라.
두 손을 움켜쥐며 그가 타죽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스으윽.
인간이 바쿨라의 신성 망치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
믿을 수 없는 장면에 드워프들의 눈알은 튀어나올 듯 커졌다.
저벅저벅.
손에 망치를 들고 거대한 모루 앞에 선 인간.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모루와 망치는 한 쌍이었다.
다른 어떤 물질도 신의 망치를 견딜 수 없었다.
스으윽.
망치를 높이 치켜드는 인간.
‘서, 설마!’
족장 탕그르는 순간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의 노래를 떠올렸다.
‘신의 망치가 불벼락을 만들어낼 때……. 위대한 일족의 성스러운 불꽃이 다시 피어오를 것이니……. 그때 모든 드워프들은 그가 곧 나임을…….’
차마 뒤를 떠올리지 못하는 탕그르.
“타아아아아앗!”
인간이 포악한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쇄애애애애애앳.
높게 들린 신의 망치가 엄청난 파열음을 내며 모루를 향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쩌어어어어어어어엉!
예상했던 것보다 크지 않은 충돌음.
내리치는 기세에 비해 떨어진 소리는 맑고 투명했다.
하지만.
지이이이이잉 지이이이이이이잉!
보이지 않는 마력의 거대한 파도가 드워프들을 순식간에 덮쳤다.
“크아아아악!”
“아아아악!”
과다다다다다당.
태풍에 휩쓸리듯 지켜보던 드워프들은 공간을 때린 파장에 맞아 바닥을 뒹굴거나 날아갔다.
쿵!
마력을 동원해 바닥에 도끼를 찍어 버티는 족장과 경비대장.
“허억!”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고 비명이 목구멍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화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천 년이 넘는 긴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신의 대장간의 화로.
순식간에 새파란 화염에 둘러싸이며 타올랐다.
그 앞에 오롯이 서 있는 인간.
털썩.
족장 탕그르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박았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격한 목소리.
“바쿨라를 영접하옵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