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3장. 건들지 마
“당장 멈추세요. 그놈 건들었다가는 큰일 납니다.”
[그게……. 저도 곤란합니다.]
“총장님!”
[청와대에서 강하게 액션이 들어왔습니다. 시늉이라도 해야 합니다.]
“사건화 하면 여럿 다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사모님이 어떤 성격이신지…….]
천하의 검찰총장이 아내 주순자를 언급했다.
“하아아.”
오태용은 가슴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이 멋모르고 저지르는 오류.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하고 손에 들린 칼을 들고 망나니 춤을 췄다.
평생 2인자로 살아온 오태용은 그 어느 때보다 두려웠다.
장태산 하나를 잡겠다고 국가 사정 기관 모두가 개 떼처럼 움직였다.
힘과 힘, 강 대 강의 대결.
‘멍청한 여편네 같으니라고!’
정치적 감각은 탁월했지만 크게 판을 확장해 내지 못했다.
눈앞의 이익과 주변인들의 이권을 챙겨주고 생색내느라 바빴다.
빼돌린 해외 자산도 차고 넘칠 만큼 넉넉하건만 더한 돈에 욕심을 보였다.
한때는 정치 동지이자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주순자.
현 정권에 들어서면서 점점 사이가 멀어졌다.
더 이상 부부가 아닌 정치적 적으로 변질되어 버린 관계.
[조심하십시오.]
“네?”
검찰총장의 뜬금없는 경고.
[실장님을 향해 움직이는 칼끝이 있습니다.]
검찰총장이 수집한 정보를 살짝 흘렸다.
총장이 될 때 오태용이 그의 뒤를 많이 봐줬다.
이학희가 낙마한 뒤에야 오태용의 입김이 들어갔다.
그에 대한 대가.
“누굽니까?”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검찰총장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요즘 들어 점점 무기력해 지는 오태용.
이게 다 무식한 여편네 주순자 때문이었다.
“……총장님. 장태산 쉽게 건들면 안 됩니다. 액션만 취하세요. 진짜……. 다칩니다.”
[대충 감 잡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검찰총장까지 오른 인물이 그 만한 눈치가 없을 리 없었다.
그러나 총장도 엄연히 따지면 일개 공무원.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의 지시를 무조건 따라야 했다.
지금까지 임기를 제대로 채운 검찰총장과 경찰청장이 드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말 잘 듣는 사냥개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
“그럼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쉬십시오.]
늦은 밤이었다.
차량 스피커폰을 통해 통화하며 집으로 향하는 오태용.
어느새 차는 집에 딸린 건물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순자의 차가 보였다.
“……빌어먹을.”
욕이 자동으로 튀어 나왔다.
꼴도 보기 싫은 와이프.
오늘은 청와대에서 묵지 않고 집으로 온 것 같다.
딸깍. 치이익.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머리가 아파왔다.
요즘 들어 니코틴을 흡수해도 쉬이 가라앉지 않는 스트레스.
집에 들어가 그 면상을 볼 자신이 없었다.
아니 반대로 자신이 들어가는 걸 싫어할 수도 있었다.
“너 그러다 크게 다친다. 순자야…….”
오정 그룹에서 오태용도 그랬다.
승승장구했지만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걸 날려 먹었다.
그때를 잊지 않고 뼈에 새긴 채 살아가고 있는 오태용.
조근영 대통령 의원 시절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비선실세.
그랬던 그의 권력도 점점 꺾어지고 있었다.
주순자의 아버지가 투자했던 회사의 대표로 얼마 전 부임했다.
때때마다 언론에서 자신을 실세로 몰아 잠시 피신한 상태.
그 사이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조근영 대통령 측근들 모두 오태용이 일일이 면접을 보고 임명했건만 정보가 누락되어 보고 됐다.
“새끼들이 죽을 줄도 모르고…….”
변심을 눈치챘다.
은인인 오태용보다 주순자 곁에 바짝 붙어 눈치를 봤다.
생각만으로도 짜증이 몰려오는 오태용.
조근영 대통령의 오빠 조진원을 견제하기도 바쁜데 내부 총질이 진행 중이었다.
“장태산 건들면 안 돼. 그놈……. 위험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정에서 모셨던 장한수 실장의 전화를 받았다.
장태산 뒤에 오정의 임 회장이 있었다.
그가 당장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에라이!”
죽기보다 집에 들어가기 싫은 오태용은 담배꽁초를 창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한 집에서 얼굴 보고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도 괴로웠다.
애새끼들은 지어미를 닮아 난잡했다.
가장으로서의 권위는 옛날에 죽 쒀서 개 줘버리고 살아왔던 오태용.
부우우웅.
그의 차가 빠르게 건물 주차장을 벗어났다.
***
주순자의 귀로 흘러드는 부드러운 말투.
아줌마라는 말이 따듯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누, 누구야!!!”
주순자는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버럭 소리를 쳤다.
발이 달라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낯선 남자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남자가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줌마가 나 보고 싶다고 사방에 광고하고 다니던데……. 나 찾았던 거 아닙니까?”
정말 잘생긴 사내였다.
낮게 깔리는 부드러우면서도 굵은 목소리.
씨익 웃는 남자.
주순자는 웃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만 싸늘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눈동자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도대체 누구…….’
쉽게 짐작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 저렇게 잘난 놈이…….
“장태산?”
“빙고.
하지만 본능적으로 입이 내뱉은 이름 하나.
맞았다.
‘이 자식이 미쳤나! 여기가 어디라고!’
어떻게 집안에 들어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소유한 건물.
가장 위층에 살고 있었다.
로비에는 특별히 고용한 경비들이 24시간 주변을 감시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도 2중으로 잠겨 있는 비밀번호를 해지해야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런데 태연하게 집안에 들어와 있는 장태산.
“아줌마. 이 와인은 버리십시오. 캄포피오린 와인은 맞는데 몰리나리 품종이 10퍼센트가 넘었습니다. 산도가 강해서 제대로 향을 느낄 수 없어요. 18개월 오크 숙성 원칙도 지켜지지 않을 것 같은데…….”
귀한 와인이라고 독일에서 일 보던 친구가 선물한 와인이었다.
뻔뻔하게 귀한 와인 병을 들고 품평을 하는 장태산.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와서 도둑질을 하고 있는 격이었다.
‘미친 새끼 아냐?’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당장 경찰에 신고하면 잡혀 갈 수도 있다.
주거침입과 절도죄를 비롯해 여러 죄목으로 10년 정도 감옥에 처넣어 둘 수도 있었다.
“너 뭐하는 새끼야?”
주순자 특유의 깡과 독기가 발현됐다.
장태산은 한국대 출신 부자 변호사다.
잃을 게 많은 자들은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법.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대통령을 만들어 냈으니 멍청한 것도 아니고……. 아줌마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흘리는 장태산.
“야! 내가 왜 아줌마야!”
주순자는 감히 자신을 싸구려 대하듯 아줌마라고 부르는 게 기분 나빴다.
분을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다들 주순자에게 사모님 또는 선생님이라고 호칭했다.
청와대에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인사들이 고개를 숙이고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리고 너 나 알아?”
“잘 알죠. 이름 주순자. 나이는 55세. 쌍둥이 아이들은 말 태워서 부정입학. 남편은 오정 비서실 출신의 인재. 조근영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같이 잠자는 사이? 뭘 더 알아야 할까요? 호빠 선수 둘과 애인사이라는 거? 지금 따님이 백수하고 호텔에 있는 건 알라나 모르겠네? 아드님은 클럽에서 여러 이상한 약물도 복용 중이던데 애들 자제 좀 시키세요.”
“!!!”
속을 꿰뚫기라도 한 듯 줄줄 나오는 주순자와 주변에 관한 정보.
듣고 있던 주순자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장태산을 치려고 준비해 왔는데 오히려 상대가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부끄러워 감추고 싶었던 내밀한 가정사까지 전부.
사소한 일상까지 다 파헤쳐 알고 있는 장태산.
두려움과 공포가 목을 죄어 왔다.
“구광필 아시죠?”
“…….”
자살했다고 알려진 강남 조폭 우두머리.
주순자와도 인연이 짧지 않았다.
과거 주순자의 아버지가 알고 지냈던 칼잡이였다.
그의 손을 이용해 사업에 방해되는 사람 여럿을 묻었다.
“막판에 마음 흔들릴 정도로 살려달라고 얼마나 애원을 하던지…….”
“헛!”
장태산의 말에 주순자가 신음을 흘렸다.
눈앞에 버젓이 서 있는 남자는 평범한 놈이 아니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차가운 눈빛.
이 자리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공포가 진하게 밀려왔다.
“앉아요. 대통령 보필하느라 피곤할 텐데 한잔해요.”
“……어떻게.”
귀신처럼 모든 걸 꿰고 있는 장태산.
거실 쪽 소파에 앉으며 자리를 권했다.
“아줌마, 내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르죠?”
이제 공격하기 위해 하나하나 알아가고 있었던 주순자.
그런데 이렇게 빨리 반격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인연이 참 묘합니다. 이런 만남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악연적 필연? 그것도 아니면…… 갑작스럽고 은밀한 조우?”
‘만만한 놈이 아니었어.’
안아 그룹과 몇 개 그룹을 해먹고 동룡까지 철저하게 망가트리고 있는 장태산.
진작 눈치챘어야 했다는 걸 주순자는 인정했다.
우습게보고 덤볐던 판단 착오.
은근히 자신과 비슷한 경향이 있음이 느껴졌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타입.
거기에 더해 짐작하기 어려운 능력까지.
정말 여기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구광필의 자살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던 주순자였다.
“원하는 게…… 뭐야?”
주순자는 조심스럽게 딜을 걸었다.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상상을 뛰어넘는 딜이 반복돼 왔다.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 협상의 묘미.
조근영을 대통령 자리에까지 앉힐 때는 그만큼 수많은 정치인들을 비롯해 깡패, 기자, 기업인들과 협상을 거듭해 온 결과.
그 중심에서 모든 걸 주도했던 주순자였다.
“내가 원하는 게 뭘까?”
장태산이 말을 놨다.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대는 놈.
자신의 집처럼 행동했다.
‘속을 알 수가 없어.’
나이도 어린 젊은 놈의 눈빛에서 도저히 읽어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철저하게 속내를 감출 줄 안다는 의미.
“말해…….”
주순자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침묵에 숨이 막힐 만큼 중요한 순간이었다.
“간단해.”
“뭐?”
“날 건들지 마. 지금 하는 짓거리 모두 멈춰.”
‘진짜 다 알고 있어.’
놈이 말한 의미를 곱씹으며 주순자는 장태산이 모든 걸 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 최병박 정권 시절에도 장애없이 승승장구하던 장태산이다.
국가 권력의 최정점에 다다른 대통령도 어찌할 수 없는 어떤 힘.
그걸 소유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냥 쭉 그대로 살아. 당신은 당신의 예정된 운명대로……. 난 내가 가고 싶은 대로.”
서로 터치하지 말자는 뜻밖의 제안.
주순자가 현재 권력을 쥔 실세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말했다.
“그거면 돼?”
“조용하게 살고 싶은 남자야. 학교도 졸업하고 사업체도 운영하면서 변호사 생활하기도 바빠. 아줌마와 노닥거릴 시간 없어. 그러니까…….”
장태산이 사람 좋은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미소가 치명적이다.
지금껏 만났던 어떤 선수들보다 인물이 잘났다.
그러나 확 감지되는 진득한 독기.
잘못 건드리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강렬한 독을 품고 있었다.
“나와 내 가족, 내 사람들 건들지 마. 마지막 충고이자 경고야. 만약 무시하면…….”
쇄애애앳!
“아악!”
와장차차자장.
장태산이 탁자 위에 있던 와인병을 주순자를 향해 순식간에 던졌다.
텅 빈 집안에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주순자.
귓가를 스치고 그대로 벽에 부딪쳐 산산이 깨져 나가는 와인병.
붉은 와인이 마치 피처럼 사방으로 쏟아지며 퍼졌다.
모든 게 한순간에 벌어졌다.
“내 인내심은 길지 않아. 아무리 여자라고 해도 봐주는 거 없어…….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 내가 하는 일을 알게 되더라도 모르는 거야……. 그러면 당신과 당신 새끼들 살려줄게.”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똑똑하게 귀에 박혀버린 장태산의 거래 조건.
거짓말이 아니다.
장태산이 갖고 있는 정보로 볼 때 그를 건드리는 순간 가족들 목숨이 위험해질 건 불을 보듯 빤했다.
자신처럼 더러운 어둠의 기운을 품고 살아가고 있던 놈.
“그 조건…… 모두 받아들일게…….”
주순자는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타협.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주순자와 장태산의 첫 번째 조우는 마무리 됐다.
조용하면서도 강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독하고 사나운 눈빛을 교환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