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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장. 조우 (627/1,284)

630장. 조우

“여사님…….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주 회장님. 이러면 서로 곤란한 거 모르시나요? 도대체 기업 신용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강남의 VIP들이 주로 모임을 갖는다는 한 레스토랑의 비밀 룸.

주현태는 바짝 긴장한 채 주순자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다.

하지만 주순자는 보통 아줌마 수준의 여자가 아니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 사업체를 물려받아 경영에 참여한 경력까지 갖고 있었다.

크게 주목 받지 못했던 조근영을 대통령에 세웠을 만큼 정치적 감각 또한 탁월했다.

그런 주순자 눈에 주현태는 이미 재기불능의 기업인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받은 게 있어 예의상 얼굴을 비추러 나왔을 뿐이다.

“여사님!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이번 위기만 넘기면 동룡은 더 튼실한 기업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요? 시중 은행 대출이 막힌 것뿐만 아니라 돌렸던 어음도 몰렸다면서요? 그거 해결 가능해요? 국민들 여론도 좋지 않아요. 이제는…….”

“제가 바스타를 준비했습니다. 아드님 내년 아시안 게임 때 탈 말입니다. 합법적으로 군 면제 받아야지 않겠습니까.”

“바스타요?”

주순자는 바스타라는 말에 살짝 호기심을 보였다.

내심 숨길 수 없는 욕심이 엿보였다.

세계 최고 마장마술 경기용 말이 바스타였다.

승마의 승패는 기수가 아니라 말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좋은 말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다.

튼튼한 발과 날씬한 몸뚱이까지 모두 점수에 들어갔다.

거기에 똑똑한 기수와 소통이 잘 되는 말은 부르는 게 값.

“호주에서 며칠 전 계약했습니다. 몇 가지 서류 검사만 끝나면 곧 한국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무려 40억짜리 명마였다.

아무리 쌈지 돈이 많은 주순자라도 현찰 동원 능력은 기업이 굴리는 것에 비해 쳐졌다.

“그래요?”

“제 자그마한 성의입니다. 이번 한 번만 막아주신다면…….”

주현태는 비굴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제는 주순자만이 자신을 살릴 수 있었다.

벼랑 끝까지 내몰려서도 궁리 끝에 급히 말을 구입했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바스타보다 좋은 말이 없을 거라고 했다.

이 정도면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따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주순자가 탐을 낼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게 쉽지 않아요.”

주순자는 바스타를 욕심냈지만 주현태의 청을 쉽게 승낙하지 않았다.

권력을 잡긴 했지만 유지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순자는 요즘 들어 권력을 행사한다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특히나 국가 경영은 겉보기와 달리 어려웠다.

행정뿐만 아니라 국방과 외교까지.

어느 하나 대통령 제가가 필요하지 않은 일들이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았다.

요즘 같아서는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VIP는 시도 때도 없이 주순자를 찾았다.

오늘 사건만 해도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자칫 정권 초기의 권력형 비리 문제로 번질 수 있었다.

보좌관들과 여당 의원들의 도움이 따랐지만 야당과 국민의 반발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더 큰 문제로 확대될 우려가 있었다.

동룡 사태에 잘 못 끼어들었다가는 구설수에 오를 게 뻔했다.

청와대 참모들과 여당 쪽에서는 이미 지원 불가 발언이 나왔다.

당장 오늘 국회의원 기자실에서 야당 쪽 양우석 국회의원이 그 우려를 확인시켰다.

산업은행장과 주현태가 만나는 사진을 공개한 것.

그 파장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여당 쪽에서 기업 애로 청취라는 명분으로 방어하고 있지만 더 이상 개입했다가는 진짜 몸통이 드러날 수 있었다.

“……자금 지원은 됐습니다. 대신…… 한 놈만 처리해 주십시오.”

주순자의 속내를 눈치챈 주현태가 새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처리요?”

주순자의 식어가던 흥미가 다시 살아났다.

은행 관련한 문제만 아니면 충분히 도와줄 수 있었다.

특히 귀찮은 사람 처리하는 건 그녀 전문이기도 했다.

과거 보통 사람일 때와 달리 이제는 권력까지 잡았다.

“여사님. 장태산, 이 이름 들어보셨습니까?”

“장태산……?”

“이학희 동영상을 제공한 곳이 장태산이 속해 있는 로펌이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이학희 동영상요?”

“이학희를 밀어줬던 염중천 아내의 이혼 소송 담당 변호사입니다. 그쪽 로펌에서 작업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래~ 요? 감히……!”

주순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한참 잘나가는 자신의 인생에서 요즘 최대 오점이 된 게 이학희였다.

동영상 하나 때문에 검찰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작업하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권력을 잡긴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믿을 만한 측근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학희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그 만한 인물이 없지만 동영상 사태로 안타깝게 손절해야만 했다.

“천해운 회장의 천일 건설을 흡수한 외국계 자본도 그 장태산이 주축이 된 투자 회사에서 처리했습니다.”

“뭐라고요? 천일 건설까지요? 장태산 그놈이 도대체 뭐하는 놈인데 그래요?”

주순자는 불같이 화를 냈다.

천일 건설의 천 회장도 주순자에게는 쏠쏠한 스폰이었다.

갑작스럽게 외국 자본에 흡수되어 버렸다.

그 당시에는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 지금처럼 강하지 않아 눈 뜨고 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올해 나이 스물다섯. 한국대 법학과 출신 변호사로 동계 올림픽 동메달 리스트……. 그리고 수조원대 자본을 소유한 투자자입니다.”

“……네? 진짜요?”

주순자는 진심으로 놀라며 다시 물었다.

자신 주변에도 대단한 스펙을 자랑하는 인재들이 널렸다.

하지만 이십대 중반에 장태산만 한 스펙을 쌓은 천재는 없었다.

“제 조카라서…… 잘 압니다.”

“네???”

주순자는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얼마 전 부탁드렸던 일 기억하십니까?”

“설마 그 유산을…… 빼돌렸다는 이복 여동생…….”

“맞습니다. 그 여동생의 아들입니다.”

“어머어머! 나쁜 놈이군요.”

주순자는 단번에 장태산을 적으로 규정했다.

자신과 연결된 스폰들과 악연이 깊다면 당연히 자신의 적.

안 봐도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본능적으로 주순자는 알았다.

“부탁드립니다. 그놈만 눈앞에서 치워주십시오!”

주현태가 고개를 숙였다.

산업은행장을 만났던 시점의 사진까지 국회의원 손에 의해 까졌다.

분 단위로 여러 금융사와 대출이 물려 있는 은행들에서 전화가 빗발쳤다.

만기 어음이 돌아왔으니 통장에 잔고를 채우라는 독촉 전화.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허대부에게 빌린 2000억이 뜨거운 햇볕에 녹는 얼음처럼 녹아 사라졌다.

대웅 건설 인수는 진작 물 건너갔다.

이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주현태는 깊숙이 숨겨 아껴왔던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공길춘 실장 통해서 조치하겠어요.”

“감사합니다. 여사님!!!”

“당분간 제가 연락하기 전에는 먼저 전화하는 일 없기를 바라요.”

주순자의 계산은 정확했다.

동룡은 누가 봐도 위태로운 상황.

괜히 난파된 배 안에 잠깐이라도 머물고 싶지 않은 주순자.

그녀의 동물적 생존 감각이 잔뜩 촉을 세웠다.

“알겠습니다…….”

주현태는 올 것이 왔음을 알았다.

그동안 쌓았던 모든 공이 이번 일로 끝나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면 다시 한 번 기회가 오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장태산! 반드시 내가 너를 지옥으로 끌고 간다!’

주현태의 눈동자에 핏대가 섰다.

두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떨군 채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이판사판.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

“장태산!!!”

뭐지? 누가 나를…….

아무리 일정이 바빠도 학생이니까 학교에는 가야 하는 법.

양우석 국회의원이 또 한 번 실검을 장악했다.

동룡 주현태 회장과 산업은행장의 은밀한 만남.

두 사람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을 국회의원 회관 기자실에서 공개했다.

예상했던 대로 여론은 뜨겁게 끌어 올랐다.

대형 포털 사이트마다 동룡 관련 뉴스에는 악플로 도배가 됐다.

국민 누가 봐도 특정 기업 특혜.

동룡의 대웅 인수 건은 완벽하게 물 건너갔다.

정부는 물론 어떤 정치인도 이번 사건에 휘말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동룡의 통장 잔고는 수시로 은밀하게 보고가 됐다.

허대부를 통해 제공됐던 자금은 이미 다 녹아내렸다.

전환사채로 발행했던 자금도 폭염 아래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사라졌다.

길어야 한 달.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사적인 일로써는 가장 공을 들였던 작업.

곧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법학관에 차를 파킹했다.

사무실에서 유세라 상무가 만들어 준 커피를 한 모금 빨며 차에서 내리는 순간 누군가 나를 불렀다.

여성의 목소리.

허보영 목소리는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강의 시간.

또각또각.

구두 발자국 소리를 내며 한 여성이 다가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어! 넌!!!

“와아아……. 장태산 더 멋있어졌는데.”

가까이 다가온 여성은 활짝 웃는 얼굴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줄리엣?”

“헐……. 뭐야! 아직도……. 흑역사는 그만 좀 잊어줘라.”

“아유라. 너 졸업 안 했어?”

1학년 OT 때부터 인연이 깊었던 경영대 퀸카 아유라.

지금이라면 졸업하고도 남아야 했다.

그런 아유라가 학교에……?

학생 신분은 아닌 것 같다.

“대학원 다녀. 보기에 아직 학생 같지? 신입생은 아니고…… 한 2학년? 그래 보여?”

청바지에 굽이 적당한 구두, 검은색 블라우스에 아이보리색 재킷을 걸친 그녀.

예뻤다.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인데 세월이 지나도 미모는 변한 게 없었다.

재학 중에도 마주칠 일이 드물었다.

나도 그녀도 바빴다.

그런 아유라가 갑자기 활짝 핀 화사한 봄꽃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응. 대학원생 같아. 그것도 박사 과정 밟는 노처녀 대학원생.”

“뭐, 뭐라고! 야! 장태산!!!”

이래서 동기가 편한 것도 있었다.

나이를 먹어도 입학 시절 추억을 공유하고 있어 가볍게 이름을 불러도 어색하지 않았다.

“성격 여전하네.”

“내 성격이 뭐~ 으흐흐.”

항상 당찼던 그녀.

승부욕이 남달라 나를 이겨보겠다고 번번이 기를 썼지만 매번 실패했다.

“나 복학 한 거 알았어?”

“네 단짝 친구가 알려줬어.”

“현수?”

“응, 아직 연락하고 있어. 그 녀석 경영 배신하고 법조계에 투신했지만 내가 큰마음 먹고 품어줬지.”

“현수의 탁월한 선택이지. 경영이 과거에나 경영이지…….”

“와아……. 너 변호사 됐다더니 우리 경영 막 무시한다.”

“진짜 경영은 학문과 이론보다 실전 감각이 우선이야. 나처럼 말이야~.”

“……재수 없는 건 여전해.”

“미투.”

“으아아아! 장태산 너 정말!!!”

장난 섞인 말에 화를 참지 못하고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아유라의 표정.

몸만 성인이 됐지 정신은 아직 철부지였다.

“오후에 수업 없어?”

“석사 과정에 있는 대학원생은 말이야~. 일반 학생들이 배우는 그런 학문 영역이 아닌 고 차원적인 미시와 거시의 세계를 다루는…….”

나를 흉내 내며 폼을 잡는 아유라.

“나 간다.”

바로 등을 돌아섰다.

“스탑! 지도 교수님이 한 번 찾아오래.”

“나를? 어느 교수님?”

“이동진 교수님.”

“아! 그 백발 교수님.”

버냉키를 비롯해 미국의 양적완화에 대해 심도 있게 토론했던 경영학과 교수님.

하긴 당시 내 입을 통해 쏟아진 말이 모두 실현된 시점.

교수님 입장에서는 애가 달았을 것이다.

“그래, 그 교수님이 너 무척 보고 싶어 하신다. 가서 소원 풀어드려라. 우리 지도교수님이 누구를 그렇게 막 애타게 찾는 분이 아닌데……. 두 사람…… 무슨 사이?”

“1학년 때 미래에 대해 깊은 얘기 좀 나눴다.”

“미래? 깊은 얘기? ……뭐야, 그것도 1학년 때?”

선뜻 믿지 못하는 아유라.

“애들은 몰라도 된다. 어른들만의 넓은 세계가 있어. 이제 겨우 미시와 거시를 논하는 대학원생이 어떻게 알겠느냐. 투자 회사를 경영하는 오너와 학문적으로 정점에 다다른 교수님과의 깊은 대화를. 오래전에 이미 미래 환율과 기술 금융, 패권 경제 전쟁에 대해 토론했단다.”

“진짜 너 밥맛이야. 으으으.”

아유라가 손을 내저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나의 상대가 아니었다.

“조만감 찾아뵙는다고 말씀드려.”

“……전화번호는 그대로지?”

“어.”

“으흐흐. 개인적으로 전화해도 돼?”

“……그럼. 당연히.”

“오! 장태산~.”

“자문료가 좀 세다. 10분당 1억. 감당할 자신 있으면 언제나 전화해. 기다릴게요. 호갱님~.”

“야! 장태산!!!”

학교에 오는 게 즐거울 일이 또 하나 생겼다.

아직 학교에 남아 있는 옛 친구(?)를 스치듯 만나는 일도 활력이 됐다.

띠리리리리리리.

지정되지 않은 심심한 스마트폰 벨 소리가 울렸다.

등록되어 있지 않은 번호.

게다가 암호화 처리가 된 듯 특이한 번호가 떴다.

“누구십니까?”

- 대표님, 접니다.

귓속을 파고드는 조용하고 은밀한 목소리.

“실장님?”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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