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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장. 복수의 시간들 (3) (624/1,284)

627장. 복수의 시간들 (3)

“이게 무슨…….”

“왜 문제 있나? 여기 변호사에게 자문을 받아 작성한 내용일세.”

“그게 아니라…….”

‘이 영감탱이가 노망이 들었나!’

동룡 그룹 주현태는 부리나케 허대부 집을 찾았다.

허대부의 요구대로 변호사를 대동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현재로서는 허대부만이 동룡 그룹에서 필요로 하는 자금을 대줄 수 있었다.

은행은 대출 문을 닫았고 다른 대부업자들은 능력이 안 됐다.

실질적으로 주현태의 목숨줄을 잡고 있는 허대부.

허대부가 주현태 앞에 내민 새로 꾸민 계약서가 제법 두툼했다.

대충 훑어봐도 탐탁지 않은 새로운 내용이 태반이었다.

그것도 미리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그럼……. 어쩔 수 없지. 가봐.”

허대부는 전혀 아쉬울 것이 없는 태도를 보였다.

또로로록.

그 옆에서 차를 따르는 애월도 주현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으으으으.’

주현태는 코너에 몰린 사실에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야?’

허대부는 어떻게 알았는지 주현태가 살고 있는 집은 물론 빼돌려 놓은 차명 부동산을 비롯해 가문의 선산까지 담보로 요구했다.

“대부 어르신…….”

허대부 앞에 무릎을 꿇은 주현태.

다시 한 번 바짝 엎드리며 간청을 해보려 했다.

자칫 이대로 재기하지 못하면 빤스 한 장 빼곤 남는 게 없을 지경이다.

이번에 다시 확인하게 되는 허대부의 악독함.

영락없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사채대부업자가 맞았다.

“해외 거는 빼놨어. 혹시라도 일 터지면 주 회장도 살아야지.”

진심 없는 허대부의 배려.

‘너구리같은 영감탱이! 내 반드시 이 고비를 넘기면 너부터 손봐주겠어!’

주현태는 뻣뻣하게 나오는 허대부를 향해 이를 갈았다.

“그럼……. 말미를 더 주십시오.”

“왜…… 자신이 없어?”

“석 달이면 됩니다. 그때까지만 봐주십시오.”

이렇게 되면 대웅 건설 인수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동룡의 사활이 벼랑 끝에 내몰렸다.

대웅 인수를 위해 빌린 자금 때문에 동룡의 기존 대출까지 흔들렸다.

석 달 안에 모든 수를 다 내서라도 수작을 부려야 했다.

급한 대로 주순자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대웅은 버리고 동룡 주력 기업은 살리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한다.

“이자는 알지? 난 서류에 기입된 법정이자 준수 못해. 우리 외손주 기저귀 값을 아직 못 벌었어.”

주현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직 시집도 안 간 딸의 자식 기저귀 값을 운운하는 허대부.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주현태는 허대부가 노골적으로 자신을 놀리는 거라 생각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주 회장을 믿지. 하지만 그걸 모르는 놈들이 많아. 나도 땅 파서 장사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이 말이야 남의 돈 귀한 줄을 몰라. 그만큼 목숨 귀한 줄도 모르고…….”

여러 복합적인 의미가 담긴 허대부의 말.

허대부가 손끝으로 움직이는 지하조직의 규모가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설픈 깡패들 수준이 아니었다.

거업들과 거래해 온 만큼 큰 사고는 없었지만 그 위명은 과거부터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했다.

꿀꺽.

주현태는 입이 바짝바짝 탔다.

허대부를 만날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어이, 변호사 다 읽어 봤어?”

“네? 네! 다 확인했습니다.”

동룡 그룹이 애용하는 강촌 변호사가 서류를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기한은 6월 말까지 하지.”

스윽.

대부 기한을 꾹꾹 적는 허대부.

“……알겠습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 안에라도 사태가 안 좋아지면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바로 권리 행사 할 거야.”

“그건 염려 놓으십시오.”

“흐흐. 염려 놓아야지. 한두 푼도 아니고……. 주 회장 잘 돼야 나도 돈 벌지.”

허대부의 돈을 4000억이나 땡겼다.

은행에 담보로 잡힌 물건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전부 허대부 손에 들어갔다.

주현태의 마지막 판돈.

“사인 해.”

서류 검토까지 마친 상태.

허대부가 주현태 앞으로 계약서를 밀었다.

‘이 수모 반드시 갚아주마!’

경직된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주현태는 펜을 들어 사인을 했다.

“사인이 멋있어. 주 회장……. 수고했어.”

여러 의미로 해석되는 허대부의 인사.

“아닙니다. 어르신 덕분에 한숨 돌리게 됐습니다.”

“그래……. 숨차면 한숨 둘려야지.”

속을 알 수 없는 능구렁이 같은 미소로 빙그레 웃는 허대부.

그 위로 짧은 순간 번득 스치는 경멸의 눈빛.

‘뭐야? 이 영감탱이…… 설마?’

인자한 듯 띤 미소 너머로 섬뜩함을 느낀 주현태.

“그럼 가봐. 피차 바쁜 몸인데.”

차 한 잔도 권하지 않고 허대부는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볼일 다 본 사람처럼 냉정했다.

***

- 방금 갔다.

“수고하셨습니다.”

- 클클. 내 돈도 아닌데 수고는…….

허대부 어르신이 전화를 줬다.

예상했던 대로 동룡 주현태 회장이 돈을 빌려갔다.

주 회장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허대부 명의 자금은 내 돈이다.

뒤에서 모든 플랜을 짜 그 위에서 말을 움직였다.

그동안 인맥을 동원해 주현태의 모든 재산을 파악했다.

해외로 빼돌린 비자금만 해도 100억이 넘었다.

주현태 회장은 안심하고 있겠지만 그것까지 겨냥했다.

넓고 촘촘해서 결코 틈새로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

6월까지 기한을 뒀다.

어차피 날짜는 무의미했다.

특약 조건에 걸리면 바로 회수 가능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빼앗고 싶지만 기업 인수 합병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는 머니 게임.

주현태 회장은 마지막 독배를 들었다.

그깟 2000억 녹아나는 건 이런 상황에서 일도 아니다.

개인들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큰돈이지만 기업체를 굴리는 그룹들에는 매달 움직이는 자금에 불과했다.

다만 동룡은 사업체가 그렇게까지 크지 않다는 것.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 너무 늦지 마. 애월이가 스승과 가야금 한번 타고 싶은 눈치야. 지금도 옆에서 언제 오냐고 묻는 손짓이 바빠.

“산삼주 많이 담가 놓으십시오.”

- 시간 되면 보영이랑 같이 들어와. 저녁 같이 먹으니까 좋더라. 젊은 시절에는 조용한 게 좋았는데 말이야. 한 해 한 해 쌓이다보니 집안에 사람 소리 들리는 게 더 좋아.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 많은 재산 누구한테 물려주나…….

명동 사채왕이 엄살이다.

틈만 보였다 하면 계속 돈으로 회유한다.

“기부하세요. 얼마 없는 돈인데 쓰시다 질리시면 재단 설립해서 기부하면 얼마나 폼 납니까. 재단 명은 대부 재단이 좋겠습니다. 가난하고 힘든 이들에게 재활의 기회를 허락하는 무이자 대부 재단! 돌아가실 때 하늘에서 큰 복을 하사하실 겁니다.”

- ……끙.

돈에 초탈한 내 대답에 한 방 얻어맞은 듯 앓은 소리를 내는 허대부.

몇 푼 안 되는 돈을 쥐고 참 머리 복잡하게 사신다.

사실 거짓말이 아니다.

허대부, 그 돈 기부하면 진짜 카르마 포인트와 교환 된다.

살아생전 많은 덕을 쌓지 못한 허대부에게는 그만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육신을 떠난 후 계산되는 실제의 돈은 교환 비율 폭이 상당히 달랐다.

저승 갈 때 노잣돈이 필요한 이유가 다 있다.

돈이야 말로 인간들이 욕망을 일으켜 창출해 내는 가장 강력한 기 덩어리였다.

“보영 씨 하고 시간 한 번 맞춰보겠습니다.”

- 그래……. 우리 보영이가 지 어미를 닮아서 아주 착해.

아직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보영 씨 엄마.

허대부를 방문했을 때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가정사가 있는 것 같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대부 어르신 안 닮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 예끼! 이 사람아! 대놓고 그러는 건 내 전문이야.

“하하. 죄송합니다. 점심 식사 맛있게 드십시오. 제가 언제 요리 한 번 해드리겠습니다.”

- 요리도 할 줄 아나?

“요즘 요리 하는 남자가 대세 아닙니까.”

- 흐흐흐. 기특한지고…….

허대부가 통화를 끝내려 하지 않았다.

그만큼 적적하다는 의미.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인간의 진심어린 정(情)은 살 수 없는 법.

허대부를 통해 인생을 또 하나 배웠다.

“이만 끊겠습니다. 일이 있습니다.”

- 그래. 내가 말이 길었네. 이해해. 그럼 수고하게. 젊음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보물이야……. 그럼 아주 귀한 보물이지…….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말끝을 흐리다 전화를 끊은 허대부.

“목숨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다시 살아보니…… 지금 이 순간, 이 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끊어진 전화기를 들고 혼잣말을 되뇌었다.

허대부가 느끼는 젊음에 대한 귀중함과 의미가 달랐다.

생명은 한 번뿐이다.

언제 어디서나 불평불만에 원망만 토로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답.

결국 모두가 언젠가는 다 죽는다는 명제 앞에 숙연해지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회귀 뒤에야 알게 된 이 순간과 생명의 귀중함.

그 어떤 누구를 위한 죽음이 아닌 죽음.

결국 자신마저도 구명하지 못한 죽음.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로서의 죽음은 결국 감당하기 힘들었던 또 다른 현실로 자신을 데려오고 만다.

되돌이표로 끊임없이 반복해 도는 업만 남길 뿐이었다.

삐이이잇.

인터폰을 연결했다.

[네, 회장님.]

“유 상무님 잠깐 면담 좀 하죠.”

[커피 준비할까요?]

“언제나 감사~.”

[잠시만 기다리세요.]

동룡 공격은 모두 내가 지시했다.

복수의 기쁨을 한껏 누리고 싶었다.

한이 쌓인 엄마와 외할머니를 대신해 살풀이를 제대로 할 생각이다.

스르륵.

잠시 뒤 유세라 상무가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방안 가득 퍼지는 커피향.

“히말라야에서 재배된 고산 원두에요. 원두 크기는 작지만 갖고 있는 풍미는 단연 탑이에요.”

설명을 들으며 맡은 커피향이 남달랐다.

“인내를 품고 성숙해진 대부분의 생명체들은 다른 것들과 확실히 깊이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한두 해 더 살다보니 세상사는 맛이 달라요.”

어느새 30대가 된 그녀.

그러고 보니 눈빛이 깊숙해졌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의 상태를 어느 정도 읽어냈다.

때가 되면 알아서 커피와 적당한 차를 준비해 줬다.

“그 맛 찾다가…… 산으로 들어갑니다.”

“회장님 산에 가시게요?”

“네?”

“이번 생은 회장님과 이 회사에 뼈를 묻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니…… 저 산에 보낼 생각 마세요~.”

농담 아닌 것 같은 진담.

그녀의 완숙해진 미소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럼…….”

“국보은행을 비롯해 동룡 그룹에 대출한 금융권 전부에 통보하십시오. 동룡 같은 부실한 기업의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하면 여신을 모두 정리하겠다고 말입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동룡 대출 현황은 이미 전부 파악했다.

국내 투자 자금을 적당히 분산해 예치해뒀다.

은행장을 비롯해 금융권 중요 인사들과 교류해 인맥도 적당히 쌓아 두었다.

이제는 그 패를 사용할 때.

로버트에게도 통보했다.

해외 자금 형태로 들어와 있는 은행과 금융권 채권을 들고 흔들었다.

주순자 정도로는 막을 수 없는 자본의 폭풍.

오늘 허대부를 통해 수혈한 자금은 당장 내일쯤이면 바닥을 보일 것이다.

몇 달이 아니라 이달 말을 넘기기도 위험했다.

“회수한 동룡 발행 기업 어음들도 모두 돌리세요.”

준비한 카드는 한두 장이 아니다.

동룡 그룹 산하 기업들이 하청업체에 발행한 어음들을 긁어모았다.

만기가 지난 것들이기에 은행에 제출만 하면 모두 돌려받을 수 있는 어음.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유세라 상무는 길게 묻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 중에 동룡 주식 사놓은 거 없죠?”

“그럼요~. 제가 눈치 하나는 빠르답니다.”

유세라 상무가 믿음직스럽게 웃는다.

성수 덕분에 잔주름 하나 없이 팽팽해진 피부.

“그럼 바로 진행하십시오.”

“넵! 회장님.”

그녀와의 티타임을 가장한 무시무시한 작업에 관한 대화가 끝났다.

오늘 오후부터 당장 동룡에 자금을 대여한 금융권은 난리가 날 것이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당신의 모든 걸 잃고…… 얼마나 버티나 봅시다……. 외삼촌.”

유세라 상무가 나가고 난 뒤 남은 커피를 천천히 음미했다.

이제는 완연하게 찾아온 창밖의 봄.

잠깐의 여유를 즐겼다.

띠리리리리릿.

조용히 울리는 스마트폰 벨소리.

눈에 익은 번호.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하. 선배님 대낮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이 후배가 보고 싶어서는 아니실 테고…….”

- 장태산……. 지금 나 좀 보자.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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