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1장. 쓰레기들 (618/1,284)

621장. 쓰레기들

“연지 씨, 팩스 받아놨어?”

“네, 팀장님. 자리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수고했어.”

“아닙니다.”

“부탁 하나 더 해도 돼?”

“말씀하세요.”

“연지 씨 미모를 닮은 따뜻한 커피 한 잔 부탁해~.”

“네…….”

고연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슬아슬하게 성희롱 경계를 넘나드는 발언.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 여직원에게 허락된 일은 많지 않았다.

아직 직분이 없었다.

그저 평범한 엘자 경제연구원 사업전략2부문 소속 신입 사원.

다들 경영학과나 경제학과 출신들이지만 고연지는 국문과 졸업생이다.

끌어줄 연줄이 없었다.

엘자 그룹 전통상 딸들은 경영에 참여시키지 않았었기에 누구도 고연지의 신분을 몰랐다.

언론에 노출된 경우가 없다보니 더욱 그랬다.

회장 딸임을 알고는 이렇게 대할 수는 없었다.

고연지는 팀에서 겉돌았다.

경제연구원이 맡은 일은 엘자 그룹 계열사의 당면 과제나 그룹 미래의 청사진을 제공하는 프로젝트가 대부분이었다.

거의가 계열사의 요청에 의해 진행되지만, 간혹 신사업 분야 같은 경우 아젠다 프로젝트가 진행되기도 했다.

고연지가 소속된 사업전략2부문은 엘자 화학이 주요 파트너였다.

생명과학과 배터리, 특수 첨단소재, 신약품 개발 같은 생명과학 분야는 그룹의 미래 먹거리로 불렸다.

현실적으로 고연지는 아직 능력이 부족했다.

세상사는 게 생각보다 녹록치 않다는 걸 요즘 제대로 깨닫고 있는 고연지.

“연지 씨. 복사 다 해놨어?”

“아직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아직도 안 했어? 시간을 30분이나 줬잖아. 아무리 국문과라지만 그 정도 업무 센스는 있어야 하지 않아?”

팀원 중 한 명인 여자 대리가 나타나 고연지를 갈궜다.

고연지가 나타나기 전까지 팀에서는 물론 사업전략2부문까지 통틀어 미모로 고개 좀 들고 다녔던 안미소 대리다.

“죄송합니다. 바로 복사하겠습니다.”

“됐어! 그깟 복사 하나 못하면서…….”

쌀쌀하게 냉기를 풍기며 안미소는 고연지를 스쳐 지나갔다.

꾸욱 입술을 깨무는 고연지.

학교 다닐 때가 천국 생활이었음을 몸소 깨달았다.

다른 친척 언니들은 모두 회사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고연지에게 사서 고생이라며 쓴소리도 했다.

엘자 그룹 딸들은 적당량의 주식 정도나 물려받고 취미 생활을 하다 어울리는 혼처가 생기면 시집 가면 그만이었다.

고연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꿈과 미래 같은 것은 따로 필요 없었다.

대학 졸업 때까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그룹 일.

자신을 자극했던 장태산이 아니었다면 그룹 일에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가장 먼저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나서서 장태산과 연줄이 있던 고연지를 회사에 심었다고 하는 말이 맞았다.

경영자로서의 전략적 판단.

‘인정받아야 해!’

고연지는 지금 자신이 어떤 테스트를 받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

곳곳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친척들의 눈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것도 버티지 못하면 평생 사업 쪽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 입장.

‘태산이는 지금쯤 학교에서 재미있겠네.’

힘들 때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장태산.

얼마 전 통화할 때 4학년에 복학한다고 했다.

변호사 자격증까지 획득해 두고 여유로운 대학 생활을 즐기고 있을 장태산.

‘오늘……. 순댓국 먹자고 할까?’

꼭 연인 사이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짧은 사회생활 경험이지만 진짜 마음 맞는 술친구를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뒷날 걱정 없이 마음 터놓고 텃새 부리는 직원들에 무능한 상사 욕을 막 해도 되는 친구.

언제부터인가 고연지에게 장태산은 그런 친구였다.

“연지 씨, 커피 어떻게 됐어?”

“네~ 지금 바로 갑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 구린 팀에 빨리 적응하는 게 관건.

고연지는 밝은 표정으로 씩씩하게 대답하고 탕비실로 뛰어갔다.

***

부우웅. 끼익.

“왔어!”

“어! 오늘도 왔네.”

“변호사가 학교는 왜 올까. 교수님들하고 입학 때 내기해서 졸업 때까지 전공과목은 A+래.”

“전설…… 미스터 장…….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다.”

한국대 법학관.

오전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이 대거 로비로 쏟아져 나와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나타난 장태산.

로비에 나와 있던 여학생들이 눈에 띄는 그를 보며 소곤거렸다.

남학생들은 입을 다물었다.

변호사에 교수들에게 주목 받는 학생이라는 걸 알기에 감히 뒷담화를 깔 자신이 없었다.

“보영아, 네가 보기에도 물건이지 않니? ……. 나 개인 과외 해달라고 할까?”

허보영 옆에서 친구 하나가 몽롱하게 눈이 풀린 채 물었다.

“나도 뜨겁게 개인과외 받고 싶다~.”

“어머~ 오전부터 무슨 소리야.”

“왜……. 넌 싫어?”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좋은 게 좋은 거지. 흐흐흐.”

“오늘도 스타일 죽이네.”

“아무거나 걸쳐도 모델이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로스쿨 여학생들.

장태산 옷차림을 놓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칙칙한 겨울 패딩을 걸친 남학생들을 단숨에 오징어로 만들어 버렸다.

뚜벅뚜벅.

청바지에 빈티지 스타일의 레드와 하늘색 체크무늬 플란넬 셔츠.

그 위에 진갈색 가벼운 재킷을 걸친 장태산.

여유가 넘치는 걸음으로 법학관 로비에 들어섰다.

그리고.

“오, 온다!”

“세상에 지금 우리한테…….”

여학생들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장태산을 보고 입을 가렸다.

입가에 절로 웃음기가 번지는 싱그러운 미소를 베어 물고 다가오는 장태산.

은은한 그의 포스가 주변을 압도했다.

“보영 씨 안녕~”

허보영에게 다가와 심플하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장태산.

“!!!”

허보영의 친구들은 더할 나위 없이 눈이 커졌다.

분명 지난주까지만 해도 안면이 없던 두 사람.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라는 건 알겠지만, 이렇게 편하게 인사하는 사이인 줄은 아무도 몰랐다.

파바밧.

친구들의 시선이 허보영에게 쏠렸다.

해명을 바라는 무언의 압박.

“안녕…… 하세요.”

“나이도 동갑인데…… 편하게 말 놓자.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헙!”

“으으으…….”

의미심장한 장태산의 말에 친구들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충분히 다양한 추측성 상상이 가능한 대화 내용.

거기에 허보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장태산이 저렇게 과감하고 저돌적으로 다가올지 몰랐다.

산삼주 나눠 마시고 자고 가라고 권했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그래. 편하게 말 놓자.”

허보영은 허대부의 딸이다.

바로 당황한 표정을 회복하고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점심 아직이지?”

“어? 응.”

“밥 먹을래?”

“그래.”

“보, 보영아!”

“저기 태산 씨, 우리도 아직 밥 안 먹었는데.”

“그래요? 그럼 같이 가죠.”

“웁스!”

“헤헤.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겁니다!”

두 명의 허보영 친구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자하연 식당 어때요?”

“저희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콜!”

조용한 허보영과 달리 두 사람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럼 바로 가죠.”

“넵!”

네 명의 남녀는 약속이나 했던 듯 씩씩하게 식당으로 향했다.

‘뭐지? 이 분위기…….’

한 번도 남자 친구가 있어본 적이 없던 허보영.

약속도 없이 나타나 친구들과 밥까지 먹으러 가자는 장태산.

앞서 가는 그의 듬직해 보이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평소에는 학식을 거의 먹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보기만 해도 입맛까지 살아나게 만드는 장태산.

허보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의 발걸음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

***

“태산 씨. 공부 안 힘들어요? 벌써 사시 합격해서 변호사가 되다니……. 정말 대단해요.”

“성적도 괜찮다고 하던데 왜 변호사 된 거예요? 우리 아빠 말로는 충분히 판사 쪽도 가능했다고 하던데.”

“아버님이 그런 걸 아세요?”

“헤에~ 아빠가 법원 행정처에서 근무해요.”

“판사님이세요?”

“네~.”

금수저가 금수저를 낳는 세상이다.

어릴 적부터 영어 유치원으로 시작해 부모가 짜놓은 학업 스케줄에 따라 상위권 대학까지 마치고 로스쿨에 들어왔다.

정보와 돈이 없으면 이제는 금수저가 되기 힘들었다.

한눈에 봐도 허보영 친구들은 꽤나 잘사는 집안 딸들로 보였다.

가볍게 걸친 가방과 옷도 값나가는 명품들이다.

자연스러운 게 당연한 일상인 것처럼 어색하지 않았다.

“변호사가 원래 꿈이었습니다. 판사보다는 뭔가 세상을 위해 할 일이 더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와아아! 진짜 멋있다. 태산 씨는 낭만 변호사에요~.”

“어디 로펌 소속이에요?”

두 사람은 부쩍 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런 친구들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허보영.

골치 아플 때 학교만큼 힐링 하기 좋은 곳은 없었다.

그걸 지나고 난 뒤에 알게 되는 게 아쉬울 뿐.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청춘들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사방에 깔렸다.

현실에 묻혀 허덕이느라 벅차고 힘들어 좌절하고 꿈을 잃어가는 사회와 달랐다.

정해진 바가 없어 더 최선을 다하는 예비 사회인의 장, 대학교.

“우리 말 놓죠. 보영 씨 친구면 제 친구죠.”

“그, 그럴까 태산아?”

“으아아아! 태산아 나 권예림! 앞으로 잘 부탁한다. 특히 과외…… 안 되겠니?”

웬 과외!

그리고 얼굴은 왜 빨개지는 거야?

“권예림! 너!!! 태산아 난 신은진! 특별 과외 나도 부탁해!”

과외. 로스쿨생에게 굳이 필요할지 의문이다.

웬만한 건 제공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 내가 아는 로스쿨 기출 문제는 없다.

“권예림! 신은진! 스톱! 거기까지.”

허보영이 지켜보다 나섰다.

“그래, 과외는…….”

“우리끼리 스터디 하면 될 거야.”

바로 브레이크가 걸리는 두 여학생.

허보영의 파워가 남달랐다.

세 사람 중 리더가 누구인지 판명 났다.

아무리 부모가 잘나가는 판사와 사회 저명인사라 해도 명동 사채왕 앞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여기 명함.”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세 사람에게 돌렸다.

“JS 로펌?”

“JS 뜻이 뭐야?”

“정의와 신뢰의 약자.”

“오오오! 멋진데?”

“로펌 규모는 얼마나 돼?”

로스쿨생답게 로펌 규모에 관심이 더 많았다.

“변호사 동기들 위주로 지금은 열 명 겨우 넘어.”

“응? 동기들? 시니어 변호사 없어?”

“고문으로 몇 분.”

“운영이 가능해? 주로 취급하는 분야가 뭔데?”

전관예우를 받을 만한 변호사가 없다는 게 이해가 안가는 두 여학생.

허보영은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인지 입을 다물었다.

“먹고 살 만해.”

먹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우리 로펌 소속 변호사들 정도라면 미래 걱정 전혀 없었다.

아직 널리널리 소문이 나지 않았을 뿐 그도 멀지 않았다.

JS 로펌은 머지않아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로펌이 될 것이다.

사람과 평등의 대명사로 말이다.

“흐흐흐. 오늘도 그림 죽이는데?”

“……치마 짧은 거 봐라. 오늘도 소장각이다.”

“X바. 어떻게 이렇게 탱탱하냐?”

“복학했더니 이게 웬 떡. 크크.”

“신입생 때부터 날리더니 아직도 안 죽었네.”

“크으……. 단톡방에 올리자. 이런 건 널리 공유해야지.”

“누가 알면 우리 관음증 환자인 줄 알겠다.”

물감이 튄 옷차림으로 보아 미대생 정도로 짐작되는 남학생 두 명.

복학생인 듯한 두 사람이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고 저급한 웃음을 흘리며 낄낄 거렸다.

보영과 친구 두 사람에게는 들릴 리 없는 낮고 조용한 대화.

그러나 안타깝게 내 귀에는 똑똑하게 전달됐다.

인상이 구겨졌다.

짧은 치마를 입고 오가는 여학생들을 은밀히 감상하며 몰래 도촬 중인 복학생들.

시선이 도촬 대상이 된 여학생에게로 향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친구들과 수다삼매에 빠져 3층 식당으로 올라가고 있는 짧은 치마를 입은 그녀.

어! 어! 어어어어어!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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