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0장. 거물 (2) (617/1,284)

620장. 거물 (2)

“맛이 어떠십니까?”

“식감이 부드럽고 쫄깃합니다. 향도 괜찮고.”

“여기 수석 주방장이 홍콩에서 미슐랭 2등급을 받았던 인재입니다. 특별히 부탁해 최고급 샥스핀과 자연산 특등급 송이버섯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요? 어쩐지 맛이 좋더군요.”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삼청동에 위치한 중화요리 선(仙).

검은 대리석 외관의 건물로 2층과 별관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땅값 비싼 삼청동에서도 알짜배기에 위치했다.

주차 공간도 널찍하고 입구 쪽 교통상황도 불편하지 않았다.

인접한 청와대 덕분에 우람한 나무가 다른 곳보다 많이 우거졌다.

신선들이 먹는다는 교자가 유명했다.

일반인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 예약하려고 하면 최대 한 달이 걸린다는 맛집.

선은 창덕궁 주변 각국 대사관과 총리실, 감사원 등등의 고위직 직원들이 비밀 대화를 나누거나 회의를 하는 곳이 됐다.

가득이나 이곳은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룸.

따끈따끈하고 먹음직스러운 특별 교자를 맛보며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눴다.

요즘 대웅건설 인수 문제로 정신없는 동룡의 주현태 회장이 을이 됐다.

그 앞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인사는 신임 산업은행장 황기태.

프린스턴대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중용 대학교 교수였으며, 여러 기업들의 사외 이사를 겸했던 금융전문가였다.

현 정권 경제분과 인수위원회 출신으로 이번에 산업은행장에 낙점 됐다.

안경을 쓰고 머리가 살짝 벗겨진 전형적인 학자의 외모.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욕망이 컸다.

지난 최병박 정권 당시의 산업은행장 장만수처럼 보란 듯이 권력을 행사하고 싶었다.

금융인들 사이에서 장만수는 가장 부러운 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

경제부총리와 산업은행장을 거치며 자신의 손으로 100조 가까운 돈을 마음껏 사용했다.

자신이 공부해 온 모든 바를 경제계에 접목시켜 보고 싶은 학자들의 열망.

도박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정권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신창조 경제 같은 타이틀만 달면 아낌없이 자금을 집행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산업은행장에 오르자마자 입질이 왔다.

다시 산업은행으로 들어온 대웅 건설.

신창조 경제 발전을 위한 국가 소유 민간 기업 효율화 극대화 방안이라는 명목으로 매각 사업이 진행됐다.

대웅 건설 인수 건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동룡 주현태 회장.

주순자에게 허락을 받았지만 실무자에게 기름칠하는 것도 소홀하지 않았다.

주순자도 모르는 금융 쪽 기술적 영역은 황기태 도움이 절실했다.

잡스런 일로 주순자를 귀찮게 했다가는 언제 인맥 정리 당할지 몰랐다.

“주 회장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위에서 특별히 지시도 내려왔고 우리 직원들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입장이 다소 바뀌어 있지만 황기태도 주현태가 만만치 않았다.

자신도 어렵게 줄을 댔던 주순자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자였다.

사실 동룡의 대웅 건설 인수는 누가 봐도 말이 안 됐다.

자산이나 매출 규모가 달랐고 요 근래 사업 실패로 자본이 부실한 동룡 그룹이었다.

그런 기업이 삼키기에는 대웅 건설 덩치가 너무 컸다.

위에서의 특별 지시가 없었다면 경을 치고도 남았을 일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쪼로록.

주현태는 두 손으로 마오타이주 병을 잡고 황기태의 잔에 공손하게 술을 따랐다.

주 회장 역시 그걸 너무 알기에 산업은행장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앞으로 자주 만나야 할 인사였다.

대웅 건설 주채권은행들과의 채무 조정을 비롯해 여러 가지 편의 제공 권한이 산업은행장에게 달렸다.

민간기업이었지만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부분 사업장은 산업은행 관할이었다.

동룡이 10대 그룹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결단코 필요한 사업체들이었다.

“주 회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건배하시죠.”

“행장님의 건승을 위하여!”

나름 그룹 회장 신분이지만 주현태는 과거부터 눈치가 아주 빨랐다.

아버지의 재산을 모조리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빠른 판단력에 있었다.

“주 회장님과 동룡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두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팅!

그리고.

“크으.”

“역시! 마오타이입니다!”

입 안 가득 퍼진 독하면서도 달큼한 주향에 감탄하는 두 남자.

오늘은 풀코스로 예약이 되어 있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할 즈음 입장을 할 젊고 예쁜 연예인 지망생이 준비 됐다.

“다음 달까지만 신용 잘 유지하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돌아오는 만기 대출도 모두 연장하기로 약조가 되었습니다. 현금도 넉넉하니 행장님이…….”

특히 현금을 강조하는 주현태.

‘저 자식 저기 앉으려고 15억을 꼴아 박았으니…… 돈이 궁할 테지.’

주현태는 황기태의 지금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산업은행장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실력과 함께 돈이 필요한 시대였다.

황기태 집안이 먹고 살 만했지만 현찰 15억은 작은 돈이 아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언제 잘려 나갈지도 모르는 자리였다.

그 전에 굵직한 사건들을 처리하고 수고료를(?) 알아서 챙기는 게 업계 관행이었다.

나중에 문제가 된다고 해도 처벌받는 금액은 뇌물의 100분 1도 안 됐다.

무기명 채권과 현찰, 미국 국채 등을 뇌물로 받아 거의 발각될 일도 없었다.

오늘도 선물 상자에 현찰 5억을 준비해 온 주현태 회장.

밑밥을 천천히 진하게 뿌렸다.

대웅 건설만 품에 안으면 이런 푼돈은 돈도 아니었다.

‘장태산……. 어디 덤벼봐! 어린놈의 새끼!’

결코 원수 같은 어린 조카는 흉내 낼 수 없는 권력과의 돈독한 유착.

이게 바로 살 만큼 산 어른들이 노는 세상이었다.

***

또로로록.

홍천각 별실에 홀로 남은 현준규 은행장.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산해진미는 거의 젓가락이 가지 않아 깨끗했다.

우리들 은행의 은행장이라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한 축에 들었다.

하지만 오늘 현준규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홍천각이라는 장소와 별실, 그리고 돈 주고도 쉽게 접할 수 없는 특별한 상과 술.

나름 상류층이라 생각했던 현준규는 자신이 중산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떻게…… 그 나이에…….”

방금 전 자리를 떠난 장태산 회장.

그를 만난 건 현준규 일생일대의 충격으로 자리 잡았다.

기껏해야 스물다섯의 나이.

그 나이 때 현준규는 학위를 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장태산은 달랐다.

오정의 임성철 회장과 이런 곳에서 만남을 가지는 사이였다.

감히 일반 기업 대표들도 만나기 쉽지 않은 자신을 오라 가라 했다.

모든 일을 재치고 올 수 밖에 없었던 현실.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권력을 잡으면 낙하산으로 내려오는 정치인들의 태도와 사뭇 달랐다.

언행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정중했고 무게감도 넘쳤다.

게다가 세상 두려울 게 없는 그 눈빛.

동룡을 잡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음이 느껴졌다.

동룡이 현 정권 실세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지만, 미국 월가의 입김이 개입하면 얘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독자적인 경제 체제로 보이지만 사실 미국 행정부가 기침하면 독감에 걸리는 수준의 한국 경제.

주순자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지주회사 회장이라…….”

장태산이 던진 미끼는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못 받아먹으면 주둥이가 없는 멍청이꼴.

요즘 자리가 위태로운 것도 사실이다.

전 정권에서 임명한 자신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민간에 팔리기 전에 새로 은행장이 임명될 가능성이 컸다.

버틸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몇 달.

장태산은 그 기한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꿀꺽.

말로만 듣던 산삼주다.

그 귀한 걸 이곳에서 맛봤다.

장뇌삼이 아닌 진짜 산삼.

장태산과 함께하면 이런 술은 반주로 마시는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잘하게 아직 남아 있는 감정들이 결단을 막았다.

어설프게 먹어버린 나이.

그리고 가슴 저 아래 자리 잡은 자존심이라는 모자란 감정.

장태산을 보내고 현준규는 씁쓸한 마음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결단의 시간은 내일까지다.

시간이 촉박했다.

자신이 아니어도 장태산은 또 다른 은행장을 내세울 것이다.

똑똑.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들어오십시오.”

스르르륵.

열리는 문.

그리고.

“!!!”

현준규는 깜짝 놀랐다.

이곳 홍천각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중년의 미부.

처음 봤을 때 현준규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녀였다.

“제가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네? 네…….”

사라락.

화려하지 않고 기품이 넘치는 한복을 입고 곱게 올린 머리에 옥비녀를 꽂은 그녀.

“조 여사라고 합니다.”

“현준규라고 합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인사가 오갔다.

“한 잔 따라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 도대체 이분이 왜?’

자신이 아니어도 이곳을 찾은 사람은 많을 것이다.

오늘 술자리 값만 해도 1000만 원은 훌쩍 넘었을 터.

흙수저 집안에서 자란 현준규에게는 과분한 자리였는데 여 주인까지 나섰다.

또로록.

황금 잔에 채워지는 산삼주의 그윽한 향기.

“고민이 많아 보이십니다.”

“……그게 보입니까?”

“당연하죠. 말이 좋아 홍천각이라는 이름을 얻었지, 알고 보면 물장사 아닙니까. 오고가는 순님들 표정만 봐도 대충 짐작이 갑니다.”

스스로 낮춰 말하는 홍천각의 여주인 조 여사.

대충 계산해 봐도 건물과 땅값만 해도 1000억대는 됐다.

이 정도라면 개인 사업자 중에 손에 꼽히는 부자였다.

“아직 제 수행이 부족한가 봅니다.”

“아닙니다. 장태산 회장님이 직접 초청할 정도라면 대단한 분이 맞으실 겁니다. 우리들 은행의 행장님이신데요.”

배시시 웃는 조 여사.

‘알고 있었군.’

이 곳은 상류층들이 노는 곳.

중요한 정보가 오고가는 은밀한 장소였다.

본래 고급 술집에 술을 마시러 오는 이들은 세 부류였다.

술 마시러 온 자나 여자에 꽂힌 자, 그리고 정보를 얻기 위해 오는 자.

그 중에서도 조 여사는 수많은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핵심 인물이었다.

“제가 잠시 조언을 해도 되겠습니까?”

“경청하겠습니다.”

조 여사의 말대로 그녀는 술집 주인이었지만 현준규 입장에서는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이 여인이 알고 있는 인맥 대부분이 대한민국 끝판왕일 건 빤한 일.

“나이를 먹다보니 저절로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바가 있습니다.”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기품 있게 입을 여는 조 여사.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형답지 못하게 행동하는 자들에게는 형, 동생 할 일이 없고, 이용가치만 따지는 친구는 친구 아닌 짐승이요, 형, 동생의 도리를 모르는 아우들은 다시 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현준규를 지그시 바라보는 조 여사.

그녀의 현기 넘치는 눈빛에 현준규는 심장이 떨렸다.

“따르고 싶은 사람, 끝까지 갈 사람, 쳐내야 할 사람, 모두 눈에 훤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행장님은 어떠합니까?”

“!!!”

조 여사의 조언 같은 물음에 현준규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진정 찾고자 했던 답이 조 여사의 말에 담겨 있었다.

장태산은 쳐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따라야 할 사람이었다.

주저하던 감정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그래…… 남은 인생 올인 해보는 거야!’

장태산이 자리를 뜨며 말했다.

자신이 선택한 사람은 결코 먼저 배신하지 않는다고.

“조언…….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현준규가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고급 술집 홍천각의 주인이 아니라 친구처럼 다가오는 그녀.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가끔 찾아뵙고 지혜를 구하고 싶어도 이곳은 아직 제게 과분한 곳이라 안타깝습니다.”

현준규는 그나마 행장으로서 갖고 있던 허세를 완벽하게 벗어 버렸다.

“행장님은 언제든 오셔도 반갑게 맞아드리겠습니다.”

“네?”

“장태산 회장님께서 현준규 행장님이 자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충분히 자격이 되십니다.”

‘아! 장태산…….’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일을 진행하는 장태산 회장.

끝을 확인할 수 없는 거물의 벽.

현준규는 진심으로 무릎을 꿇었다.

“저도 한 잔 주시겠습니까? 앞으로 친구가 될 사이인데…….”

조용히 미소 짓는 조 여사.

현준규는 떨리는 손으로 술병을 들었다.

장태산의 사람이 되면 얻게 되는 또 다른 이점.

아직 현준규는 미모의 여인을 충분히 사랑하고픈 남자였다.

***

- 동룡이라고 했나요? 처음 들어보는데 뭐하는 회사인가요?

사라 요한슨에게는 처음 듣는 그룹명인 동룡.

차일드 가문의 방계수장의 딸인 그녀에게는 마치 동네 치킨집 수준일 것이다.

“그저 그런 별 볼 일 없는 회사입니다.”

- 알겠어요. 바로 처리할게요~.

가진 바 힘을 잘 이용했다.

기업 신용 강등.

한국에서는 힘이 들겠지만 사라 요한슨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계 3대 신용 평가 기관은 대부분 차일드 가문과 연관돼 있었다.

신용등급이 곧 생명인 기업에는 저승사자가 들고 온 명부 같은 신용 평가 기관.

IMF도 이들에 의해 작업됐다.

대규모 투기꾼들과 한 몸이 되어 움직인다.

미국 정치권과도 연결되어 있어 누가 감히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못했다.

중국이 이 구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체 신용 평가기관을 운용했지만 타락한 공산당 정권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짓거리였다.

“고마워요. 사라.”

- ……우리 사이에 고맙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요.

사라와 많이 가까워졌다.

“그래서 더 고마워요.”

- ……다니엘은 진짜 바람둥이에요.

“네?”

- 나쁜 남자인 걸 알면서도 몇 마디 말에 이렇게 기쁨으로 심장이 뛰니……. 이 기분…… 결코 당신은 모를 거예요.

안다, 그 기분.

그래서 진짜 미안하다.

“사라…….”

- 공짜는 아니에요.

“네?”

- 나도 데려가줘요.

“어, 어디를요?”

- 로리아나와 함께 갈 휴가……. 나도 불러줘요.

오! 마이 갓!

벌써 말이 새어나간 여름휴가 스케줄.

- 왜! 안 되나요?

금세 서운함에 촉촉하게 목소리가 젖는 사라 요한슨.

어차피 막장으로 흘러가는 분위기.

에라! 모르겠다!

“됩니다! 돼! 오세요……. 이번 휴가도 격하게(?) 놀아 봅시다!”

회귀의 전설 2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