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장. 거물 (1)
‘다……. 알고 있었어! 개자식!’
오수연은 엄습해 오는 수치심에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와인을 한 잔이 아니라 수십 잔을 연거푸 마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반면 장태산은 여유가 흘러 넘쳤다.
와인을 즐기며 전문수의 뒤통수를 칠 가격을 흥정해 왔다.
장태산은 결코 분노에 흥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람은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스타일이다.
배우들이 주로 흉내 내는 페르소나 따위가 아니다.
그의 진실한 진면목이 확실했다.
‘전문수 회장이 누군지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아. 그래서…….’
전문수 회장이 아들과 손자까지 엮이며 망신을 당한 후 뒤에서 수작 부렸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거물.
그냥 어린 애송이가 아니었다.
전문수 회장도 객관적으로 상대하기 벅찬 상대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게 오수연이 전문수의 말만 듣고 이 판에 뛰어 들었다.
짧은 소견에 저지른 어리석은 실수였다.
‘아직 기회는 있어!’
하지만 오수연은 자신의 미모와 연기력을 자신하고 있었다.
한껏 머리를 굴려 온갖 힘을 짜냈다.
“얼마 줄 건데요?”
짧았던 반말을 삼키고 눈빛을 반짝였다.
입가에는 매력적인 미소를 장착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의 이런 모습을 싫어했던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미소와 매력적인 여인의 향기에 취해 스스로 무릎 꿇고 발밑을 기었던 무수한 남자들.
오수연은 오늘 자신이 가진 최대의 매력을 발산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 있어요?”
“네? 뭐가요?”
“지금…… 저 유혹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안 되나요? 저 매력 있지 않아요?”
오수연은 스윽 소파에서 허리를 세우며 반듯하게 앉았다.
아직도 탄력을 잃지 않고 봉긋하게 솟은 가슴.
허리를 바로 세우자 보기 좋게 라인이 드러났다.
파밧.
그런 자신을 뚫어지게 살피는 장태산.
‘후훗. 남자들이란~.’
악녀의 매력은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법.
오수연은 싱긋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보톡스, 맞을 때가 된 것 같네요. 닥터에게 눈가 오른쪽 주름이 많다고 쫙 펴달라고 하세요. 잡티도 보이는데, 필러 안 해요? 나이도 있는데 관리 잘 해야죠.”
빠직.
보톡스와 잡티, 나이라는 말에 오수연의 인상이 구겨졌다.
여자, 그것도 여배우에게 있어 반드시 피해야 할 금기어들이었다.
그런 말들만 골라 거침없이 날렸다.
“진짜 겁이 없네. 장태산 씨, 내가 누군지 몰라?”
오수연은 연극을 멈췄다.
보통 남자들 상대하듯 해서는 통할 자가 아니었다.
“이름 오수연. 프로필 나이는 올해 35세, 하지만 실제 나이 37세. 집은 한남동 로얄 빌라. 가격은 40억. 광고 수수료를 비롯해 작년 기준 수익은 20억. 연대 중공업 주식 처분으로 약 100억 차익 발생. 강남에 130억 빌딩 소유. 부모님은 살아 계시고, 남동생 둘이 있네요.”
줄줄줄 쏟아져 나오는 오수연의 신상에 관한 것들.
“야! 너 뭐야! 니가 뭔데 남의 뒷조사야!”
오수연은 방금 전까지 유지하던 품위를 내던지고 폭발했다.
미리 알고 판을 깔았던 게 확실했다.
이럴 때는 분노해야 한다는 걸 오수연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 전문수 회장님이 한 달에 두 번 정도 오수연 씨를 찾으시네요. 평균 방문 시간은 4시간 정도. 그 시간에 뭘 하시나? 사업 얘기? 대본 연습 아니면…….”
재수 없는 표정으로 웃는 장태산.
“너…….”
오수연은 손가락으로 장태산을 가리키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비밀리에 관계를 이어간다고 애쓰지만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연대중공업 회장을 상대로 어쩔 수 있는 간 큰 기자는 없었다.
“사론 요즘 당신 전화 안 받죠?”
“…….”
진실 확인은 계속됐다.
“아주 살짝 손 좀 봤는데. 간이 생각했던 것보다 작더군요. 후후후.”
이제는 악마처럼 웃는 장태산.
‘위험해……. 이놈은 내가 상대할 레벨이 아니야!’
오수연은 늦었지만 처절하게 깨닫고 있었다.
“전문수 회장 너무 믿지 말아요. 전문수 회장 와이프가 눈치채고 정보 수집 중입니다. 괜히 그 윤기 나는 머리카락 다 쥐어뜯기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요. 전문수 회장 의외로 공처가입니다.”
“흐끅…… 흑.”
연속해서 던져지는 진실 앞에 충격을 받은 오수연이 딸꾹질을 했다.
그 사실은 오수연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전문수 회장은 웬만해서는 절대 밖에서 외박을 하지 않는다.
와이프 눈치를 보고 산다는 것쯤은 오수연도 잘 알고 있다.
만약 장태산 말처럼 그녀가 증거 수집 중이라면 가까운 시일 내에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와이프도 여자였다.
남편의 불륜을 알고 오래 참아줄 여자는 세상에 없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순식간에 이 바닥에 퍼지게 될 소문.
최소 연예계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해 왔다.
“오수연 씨, 충고 하나 하죠.”
처음부터 끝까지 화 한 번 내지 않고 말을 잇는 장태산.
진짜 무서운 남자다.
전문수를 오랫동안 상대해 왔던 오수연이었다.
몇 분 마주하고 있는 사이 뼈저리게 느꼈다.
“…….”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연기에 집중해 연예인으로서의 삶을 사십시오. 당신의 스폰 사생활은 어차피 연예계에서 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삶이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악행은 안 됩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그 불행이 전가될 수 있습니다. 타락한 삶이 가져온 당신 돈으로 먹고 사는 가족들……. 지금 허락된 그 삶, 신들이 어느 날 회수해 갈 겁니다.”
스스로 신빨이 좋다고 말했던 장태산의 진심어린 충고.
웬일인지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이 와 닿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에게도 이렇게 가슴을 울리는 조언을 듣지 못했다.
“흑……. 흐으윽…….”
오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여태 부모에게도 고백하지 못한 자신의 아픈 삶.
연예계라는 이 바닥에서 오래도록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가정이 있는 남자와의 거래.
대부분의 가진 것 없는 여배우들의 삶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폰 없이는 아무리 애써도 더 클 수 없는 직업군.
썩은 곳은 아예 발 디딜 자리 하나 없이 더럽혀진 대한민국의 연예계 바닥.
소녀시절에는 평범하게 연애하고 평범하게 가정을 꾸려 살고 싶었다.
하지만 허락되지 않은 풍요로운 삶을 탐하고 재물을 선택한 후로 아름답게 꾸었던 꿈은 사라져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가족들도 오수연의 눈치를 봤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 줄 거라 철썩 같이 믿었던 어린 시절.
살아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이제는 혼자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악업의 굴레에 갇혀 버린 자신의 삶.
“모든 일에 시작은 거짓이 섞일 때 문제가 됩니다. 올바름은 어떤 문제도 만들지 않습니다. 저, 오수연 씨 팬이었습니다. 앞으로도 팬으로서 실망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추궁하던 미소와 태도를 지우고 진심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는 장태산.
“흐으윽……. 흑흑.”
오수연은 부끄러움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가슴에 대못이 되어 박히는 진심 어린 조언.
눈앞의 남자는…… 진짜 위험한 사람이었다.
***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알겠습니다.”
현준규 행장은 단아한 여직원의 말에 차분하게 대꾸했다.
현준규도 처음 와 보는 곳.
서원각과 함께 역사를 자랑하는 성북구 홍천각.
고즈넉한 기와와 깔끔하고 기품 있는 방 안 분위기에 현준규는 다소 긴장이 됐다.
한참 젊은 사람이 이런 곳을 애용할 정도라면 보통 배포가 아니라는 뜻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장소였다.
스스로 장소의 분위기를 감당하지 못하면 이런 곳 정도는 알아서 걸러냈다.
“이런 긴장감…… 오랜만이군……. 허어.”
현준규는 처음 은행에 입사했을 때를 떠올렸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가 장난 아니었다.
은행 채용에 합격하지 못하면 줄줄이 딸린 동생들은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당시 잘나가던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현준규.
면접 때 느꼈던 첫 사회경험의 인상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벅찼던 순간이다.
드디어 스스로 일해서 먹고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을 때의 쾌감.
그때의 심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긴장감, 이상하게 그 때와 같았다.
야간 대학교를 졸업하고 박사 코스까지 밟고서야 오늘에 이르렀다.
운도 있었고 수완도 좋았다.
어려운 시절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정리해고 될 때에도 악착같이 버텼다.
가파른 인생길 막바지에 앉게 된 행장이라는 자리.
은행원으로서 꾸었던 꿈이었지만 막상 오르고 나니 감당해 내기에 꽤 벅찬 자리였다.
수시로 밀려들어오는 청탁.
최근 들어 정권 눈치 잘 살피면서 따박따박 월급 받고, 나중에 무사히 퇴직금까지 받고 정년퇴직하는 게 소원이 됐다.
대한민국 금융을 위해 제대로 헌신해 보고 싶었던 젊은 시절의 열정이야 여전했지만 요원했다.
특히 이번 정권은 그나마도 유지되던 원칙도 없었다.
오로지 주순자에게 얼마나 잘 보이느냐 그것만이 관건.
그에 따라 고위 공직자나 정부 산하기관장의 주인이 바뀌었다.
이대로라면 현준규 행장도 자리가 위태로웠다.
주순자에게 줄을 대지 못한 상황.
임박해 있는 4차 매각시기에 맞춰 잘려나갈 가능성이 많았다.
현 정권에 밉보이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리스트에 명단이 올라갔다.
대출 리스크 관리를 주문하는 자신의 정책을 달가워하지 않는 VIP 경제팀.
“벌써 봄이 왔네…… 왔어.”
독립된 별채 창문 밖으로 시원하게 전해지는 완연한 봄기운.
현준규는 기분 좋은 봄날에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제가 늦었습니다.”
젊은 남자가 들어섰다.
가벼운 세미 슈트 차림에 짧은 머리칼의 남자.
“회장님을 처음 뵙습니다.”
현준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몇 년 동안 입지전적인 전설을 만들어 낸 신화적 인물이다.
금융인으로서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진정한 인사였다.
“예가 과합니다.”
정중하게 같이 고개를 숙이는 장태산.
‘멋지군.’
현준규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눈빛에 담긴 정의로움.
소문처럼 돈을 밝히는 돈 귀신은 아니었다.
“앉으십시오.”
장태산은 자리를 권하며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예의를 지키면서도 자신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고 움직였다.
모자람과 넘침이 없는 조화로운 행동.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행장님이 응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약간의 긴장감이 흘렀고 각자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똑똑.
그때 들려오는 노크 소리.
“들어오십시오.”
스르륵.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들어서는 미모의 중년 여인.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은 인생 후반에 들어선 중년 사내 현준규의 심장을 거칠게 뛰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찾아오셨습니다.”
여인이 곱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린 화장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여인의 옷자락을 따라 은은하게 퍼지는 방 안의 분 냄새.
현준규는 괜시리 심장이 뛰는 바람에 얼굴이 붉어졌다.
나이를 먹어가다 보니 젊은 여성들보다 저렇듯 성숙한 중년 여성에게 더 감정이 쏠렸다.
“좀 바빴습니다.”
“임 회장님이 간간이 소식 전해주셨습니다.”
“귀한 분을 모시고 왔으니 최고로 준비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임 회장이라면…… 임성철 회장!’
현준규는 임 회장의 정체를 단숨에 파악했다.
철저하게 멤버십으로 운영된다는 홍천각.
자신도 섞여 보지 못한 사회 상류층들의 모임 장소였다.
스르르륵.
여인이 물러갔다.
모든 것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임성철 회장과 이곳에서 술을 마셨을 장태산.
새삼 달리 보였다.
하나를 보면 열을 짐작할 수 있는 법.
현준규는 아까보다 더 긴장됐다.
“술이 오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제가 초대한 이유는 이미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동룡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 장태산이 차라리 편했다.
길게 돌려 말하는 비슷한 또래 인사들과 대화 방법이 달랐다.
“제가 어떤 걸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현준규는 장태산에게 마음이 자꾸 갔다.
등에 업은 권력을 믿고 주거래 은행 중 한 곳인 우리들 은행에 소홀한 동룡 주현태.
“이번에 담보를 넘는 대출이 실행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윗선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이미 파악을 끝냈을 게 확실한 장태산에게 현준규는 숨기지 않고 순순히 사실을 얘기했다.
이 정도는 비밀 축에 끼지도 못했다.
“돌아오는 대출 만기 연장을 거절하십시오.”
“네?”
“이번 대출 외에도 이전에 진행한 대출이 있는 걸로 압니다. 아마 이달 15일이 만기죠? 액수는 800억. 연장 거절하십시오.”
“……그건.”
쉽게 확답을 해 줄 수 없는 사안이었다.
관행적으로 그룹들은 만기 연장이 가능했다.
문제가 될 만한 변수가 없다면 이유 없이 거절할 수는 없었다.
“동룡 신용등급을 정크 수준으로 만들겠습니다.”
“네! 시, 신용 등급을요!”
그렇게 되면 또 말이 달랐다.
신용 등급이 하락하면 당연히 만기 연장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잘 운영되는 그룹의 신용 등급은 개인이 함부로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세계적 신용 평가 기관과 국내 기관이 합작해 취급하는 기업 신용 등급.
외국자본 투자가 자유로운 요즘 시기에는 가뜩이나 국가도 개입하기 힘든 영역이었다.
“따라주시겠습니까?”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묻는 장태산.
‘크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커!’
현준규는 본능적으로 긴장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거물이다.
그것도 한반도의 백두대간인 웅장한 산맥 같은 거물.
자신이 섣불리 판단할 수준의 인물이 아니었다.
“……지주회사 회장 자리 하나 드리겠습니다.”
“네? 회, 회장요???”
회귀의 전설 2부